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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스 Nov 28. 2024

공짜로 언어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네겐 선생님이며 내겐 치료자이자 친구이시니

2016년, 라노가 30개월이었을 때 영유아 검진을 통해 언어발달이 늦어 보이니 언어치료를 받는 게 어떨지 권유받았다. 바로 언어평가를 받았고 수용언어는 정상발달이었지만 표현언어는 14개월이나 늦었기에 바로 치료가 시작되었다. 라노의 발달이나 문제 상황에 따라 언어치료, 감각통합치료, 놀이치료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치료가 더해지기도 빠지기도 했다. 3년간 최소 주 2회~3회 정도는 치료실에 갔고 1~2시간씩 대기실에 앉아 아이를 기다렸다.


언어치료실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 엄마들끼리 여러 가지 얘기들을 한다. 정상발달 엄마들도 할 얘기가 많은데 아픈 아이 엄마들은 서로 공유할 정보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녀들의 대화 주제는 어디 치료실 대기가 요즘 많이 풀렸다더라, 거긴 바우처 안 되는 대신 보험 실비로 치료가 가능하다더라 등 치료실 정보는 기본이다. 내게 가장 흥미롭던 대화 주제는 아이 문제로 남편이나 시댁과의 갈등을 풀어가는 문제와 학령기 아이들이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처하는 법 등이 매우 꿀정보였던 거 같다.


만 3년의 치료실 짬밥이지 않은가. 여기저기 귀동냥으로 많은 정보를 얻었고 꾸준한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 순간 난 바로 이 방법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건 바로 실습 선생님의 방문 치료였다.


"ㅇㅇ이는 요즘 치료실 왜 안 와? 치료 더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아, 자기 그거 몰라? 요즘 ㅇㅇ이 집에서 치료받잖아. 대학생 선생님한테 공짜로 치료받는다던데?"


그 당시에는 그녀들의 대화가 진짜 영양가 없다고 생각했다. 주요 정보도 없고, 효과에 대한 검증도 없고 저게 무슨 의미의 대화들인지. 하지만 라노의 장애판정 이후 그날 그녀들의 대화에 등장했던 세 개의 단어가 머릿속에 갑자기 떠올랐다.


대학생. 공짜. 치료


치료실 생활이 시작된 이후부터 라노에게 가장 필요한 건 '자극'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반드시 치료가 있어야 한단 생각에 단 한 번도 치료를 중단한 적은 없다. 내게 있어 라노의 치료실이란 반드시 필요한, 절대로 끊을 수 없는 '생명수' 같은 존재였기에. 라노의 장애판정 이후 제일 먼저 생각난 건 치료 횟수를 늘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매일 받는 치료비는 월급쟁이에겐 부담스럽기에 섣불리 나설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던 것. 이 위기 상황에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세 단어를 생각해 낸 나 자신을 토닥토닥 칭찬해 주고 바로 실습 선생님 영입에 나섰다.




실습 선생님 수업은 말 그대로 언어재활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 졸업 전 이수해야 하는 실습의 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한 학기 동안 아이의 치료를 동영상으로 녹화하고 수업을 평가받고 학점을 받는 건데 어떻게든 매일 언어치료를 시키고 싶은 마음에 주 2회는 언어치료실, 주 2회는 실습 선생님과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라노는 첫 번째 실습 선생님과 2학기 동안 발음 치료를 받았다. 처음에는 한 학기만 받는 걸로 시작했으나 선생님은 라노와 수업을 하는 게 실전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라며 연말까지 쉬지 않고 매주 2회 수업을 진행해 주셨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인연인가.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 같은 존재였다. 라노의 치료실 선생님도 3년간 쉬지 않고 성실히 함께 해주시던 분이어서 너무나 감사했지만 인간은 이렇게 간사하고 돈 앞에 작아지는 존재이지 않은가. 연말이면 자격증 시험을 보고 취득 예정인 예비 치료사임에도 무료로 이렇게 열정적인 수업을 진행해 주시다니 매 순간 감동이고 감사했다. 심지어 아이에게 진심을 다해 치료를 진행해 주셨고 치료 후 상담도 최선을 다하셨으며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부족함을 인정하고 교수님께 물어본 후 다음 치료시간에 답변을 주기도 했다.


그녀는 아이에게는 실습 선생님이었지만 내겐 '치료자'였다. 그 당시 아이의 상태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그 누구와도 감정을 교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선생님과의 관계는 달랐다. 꼭꼭 닫혔던 내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고 그녀에게는 무엇이건 얘기할 수 있었고 아픈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고 위로해 달라고 나아질 거라고 얘기해 달라고 투정 부릴 수 있었다. 라노의 당시 상태에 대해서 남편보다 더 많이 정확히 알고 있던 그녀였기에 내 마음을 진심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다.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멀리 떨어뜨리고 동굴 속으로 들어간 날 위로해 주고 치료해 주고 손 내밀며 토닥여주는 '친구'의 역할까지 해주었다.


사춘기 시절 부모님께도 말 못 할 고민을 말하던 그런 친구


대학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하다가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던 그녀였기에 풋풋한 대학생은 아니었던 게 내겐 더 편하게 대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에 갇혀 있는 날 세상 밖으로 이끌어 주는 유일한 빛과 같은 존재였던 그녀. 요즘에는 자주 연락하지 못하지만 라노의 성장의 순간마다 가끔 연락하며 소중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두 번째 실습 선생님과는 2학기 동안 한글 읽고 쓰기에 대한 치료를 받았다. 라노는 대학원 석사 논문 연구대상자였기에 좀 더 심층적으로 아이에 대해 봐주셨고 코로나로 등교가 힘든 상황에서 보냈던 1학년을 실습 선생님 덕분에 무사히 잘 보낼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겠으나 라노는 정말로 좋은 실습 선생님들을 만나 충분히 좋은 치료를 받았다. 열정적인 그녀들은 라노의 치료를 위해 나뿐만 아니라 기존의 치료사 선생님, 교수님 모두가 소통할 수 있게 해 주어 더 좋은 치료로 방향을 잡아가곤 했다.




지금 그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내 마음이 급하고 힘들었기에 내 새끼만 바라봤고 내 처지만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아이가 치료로 얼마나 변화하고 발전하는지에만 집중했기에 그녀들의 노고와 수고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거 같다. 라노와 내게 그 시간들은 너무나 소중한 시간 들이었는데 그땐 왜 그걸 몰랐을까. 물론 스승의 날이나 추석 등에는 상품권이나 선물, 카드 등을 통해 사례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공짜 치료에 대해 내 양심상 어느 정도의 대가를 지불한다는 그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 가치관으로는 분명히 그녀들에게 감사하고 아이와의 시간과 추억에 대해 소중히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때 내겐 그 정도 마음의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3년의 시간 속에 난 오직 라노에게만 집중했고 라노와 관련된, 라노를 도와주는 이들에게 또한 마음을 주지 못하던 시간들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미안하고 고마움이 가득하다.


그 시간들 속에서 아기병아리 같았던 라노의 소중한 실습 선생님들은 이제 어엿한 치료사가 되어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한 가지 확신하는 건 라노와 함께 했던 두 선생님은 모두 훌륭한 치료사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녀들은 라노에게 진심이었고, 치료에 최선이었으며, 보호자인 내 멘탈까지도 감싸안는 따뜻하고 유능한 최고의 치료사였다. 설령 치료사의 길이 힘들어 다른 길을 걷게 될지라도 그녀들의 빛나는 미래를 멀리에서 오랫동안 응원하고 기도할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 갇혀있을 뻔한 나와 라노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 주었던 첫 번째 계단이었던. 그녀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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