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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스 Dec 12. 2024

한글 떼고 사립초로 튀어

거북이와의 한글 전쟁 그 결말은


두둥, 라노의 6살 유치원 생활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 학습과의 전쟁이었다. 아이는 한글을 쓰기는커녕 기역니은도 모르는데 다른 아이들은 이것저것 그렇게 열심히 쓰는 건지. 유치원 활동지를 보면 이건 라노의 활동지가 아닌 친구들의 활동지인 날들이 많았다. 이름조차 쓰지 못하는 아이를 어째야 할지 고민하다가 어차피 시작할 한글 지금 시작하자 마음먹고 우리의 한글전쟁은 시작되었다. 


누가 알았을까. 이 한글 전쟁이 2년 가까이 이어지는 장기전이 될지. 사실 나 조차도 1년 정도로 예상했었기에 그 긴긴 시간의 전쟁은 지치고 피가 말라가는 꽤나 힘든 전투였다. 남들 다 한다는 한글이 야호, 프뢰벨 읽기 프로그램, 기적의 한글학습을 다 했는데도 라노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까막눈이었으니. 결국 난독증 검사까지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말로만 듣던 난독증 그게 너인 거니'

'진짜 난독증이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앞으로 어떤 치료를 더 해야 하는 거야'

'장애 진단받고 받은 보험금이 얼마나 남았더라. 난독증 치료비는 엄청 비싸다던데'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별의별 상상력이 날개를 달고 하루종일 날아다녔고 급기야 잠도 못 자고 불면증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6살 학기 초에 시작해서 7살 여름방학을 지나면서까지 한글을 못 읽는 라노를 보며 내 마음이 얼마나 문드러졌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아이를 기다려 주자는 생각은 하루에 열두 번도 더했지만 당최 진도가 나가지 않는 매일의 상황은 나를 절망 속으로 질질 끌고 가기에 바빴을 뿐이었다. 


아이큐 검사, 난독증 검사, ADHD 검사 모두 다 정상.
그런데 한글 학습이 18개월째 진전이 없음.


너 뭐야, 어느 별에서 온 거니. 라노가 어릴 적부터 다녔고 장애진단을 내려주셨던 소아 재활의학과 선생님은 흥미가 없는 분야이기에 학습이 늦어지는 것뿐인 듯하다. 별 다른 이상소견 없으니 좀 더 지켜보자고 하셨다. 이 상황은 웃어야 하는 상황이니 울어야 하는 상황이니.




7살 여름방학. 발리 한 달 살기를 산뜻하게 마치고 와서 난 마음을 다잡고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라노야 우리 학습 방법을 바꿔 보자. 


남들 하는 거 말고 처음부터 다시 우리 스타일로 천천히 하는 거야.


라노는 한글 학습이 늦어져서 발달센터에서 언어치료와 함께 인지치료를 받고 있었다. 인지치료 선생님과 상담하면서 라노는 통문자보다는 결합문자에 대한 이해가 훨씬 낫다는 걸 확인했다. 아이들의 뇌 구조에 따라서 한글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이 다른데 라노는 문자를 그림처럼 인식해서 머리에 저장시키는 걸 어려워한다고 하셨다. 결합문자로 한글을 학습시키는 도구들을 찾던 중 난독증 아이들을 위한 교재가 눈에 띄었다. 조음장애인 라노는 정확한 발음을 어려워해서 치료받고 있었는데 그 교재에는 입모양, 혀의 위치의 그림이 한글과 함께 있었기에 라노에게 훨씬 쉽게 다가올 듯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라노와 나는 하루에 20분씩 주말에도 빠지지 않고 매일매일 쉬지 않고 한글과 놀았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라는 게 이런 걸까. 매일매일 잠깐씩 지치지 않고 라노는 조금씩 천천히 촉촉하게 한글에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두 달이 흘렀고 라노는 읽기 시작했다. 심지어 조금씩 쓰기도 시작했고 8살 5월쯤 초등학교 입학 후 받아쓰기에서 백점 맞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지금도 그 당시의 짜릿함이 잊히지 않는다. 친정 엄마는 오랫동안 아이 머릿속에 쌓인 게 한꺼번에 나온 것뿐이라고 설마 한두 달 학습한 게 이렇게 빵 터지겠냐고 하셨다. 그 말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라노에게 딱 맞는 학습법을 찾았기에 한글을 빵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끝까지 남들이 다 하는 방법으로 라노를 질질 끌고 갔다면 라노의 한글 전쟁은 더 길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육아는 결국 엄마가 아이를 얼마나 잘 알고 아이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가느냐가 핵심이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한들 내 새끼에게 맞지 않는 건 아이와 엄마를 지치게 할 뿐이라는 걸 한글전쟁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라노의 유치원을 고를 때에도 남들 좋다는 곳보다는 라노에게 맞는 곳을 찾느라 수많은 유치원 설명회를 2년 동안 다녔었다. 그러한 내 교육 가치관은 초등 입학을 앞두고 다시 한번 요동치기 시작했으니 그건 바로 사립초등학교. 유치원 때 한 번 경험했기에 초등학교도 입학 전 2년 동안 설명회를 다녔다. 아이가 6살 때, 7살 때 되도록 많은 학교 설명회를 가서 직접 듣고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남들은 더 좋은 교육환경, 외국어와 악기 등 여러 가지 강점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사립 초등학교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 수많은 엄마들 속에 난 혼자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곳에서 라노는 좀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랄 수 있지 있을까'

'혹시나 발달이 느려서 문제가 생기면 여기에서는 라노의 상황을 좀 더 이해해주지 않을까'

'교육 가치가 인성이나 리더십 등에 있기에 학습은 좀 더 수월하게 진행되겠지'


뭐 이런 식의 생각으로 라노에게 맞는 학교를 찾았고 다행히 라노는 추첨일에 합격공을 뽑았다. 추첨하고 며칠 후 교장 선생님과의 간단한 면담 후 최종 입학이 확정되는 절차였는데 혹시 면담할 때 라노의 발음이 문제가 되진 않을지 급 걱정이 되었다. 사립초는 도움반(특수학급)이 운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에 라노를 부담스러워하면 어쩌지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자식 키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특히 느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의 부모보다 더 많은 걱정과 고민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게 현실이다. 나 또한 남들은 안 해도 되는 걱정들을 많이 했는데 그 결정의 중심에는 항상 라노를 진짜 위하는 게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거였다. 라노를 진짜 위한 다는 건 이기적인 마음이 아닌 라노가 세상 속에서 조금은 느린 걸음이지만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걸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이번 결정도 라노를 위해서는 면담 시에 라노의 상황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발달이 느린 건 아이가 잘못한 게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학교 측에서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으니 향후 도움반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이미 도움반이 운영 중인 근처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겠다고 미리 말씀드리자로 가닥을 잡았다. 라노와 나와 학교 모두를 위한 방법을 찾아놓고 그렇게 교장선생님과의 면담을 갔다.


교장 선생님께 라노의 상황에 대해 얘기했더니 교장 선생님은 라노와 간단히 몇 마디 나누셨다. 초등학생이 되면 엄마가 깨우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는 등 기본적인 생활습관에 대해 설명하셨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셨다. 라노와 대화를 마치시고는 세상 온화한 미소로 내 어깨를 다독이시며 따뜻한 말을 건네주셨고, 그 자리에서 난 펑펑 울었다. 며칠간 걱정하고 고민했던 게 무색해질 만큼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내 마음 깊이 들어와 촛불을 켜듯 천천히 밝혀졌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따뜻해진다.


"어머니, 라노 말도 잘하고 대답도 잘하는데요. 학교 생활하는데 전혀 문제없을 거예요. 라노는 지금 무궁화호를 타고 가고 있어요. KTX 타고 가면 도착지에 빨리는 도착 하겠죠. 하지만 라노는 무궁화호 타고 가면서 창밖 풍경도 보고 계란이랑 사이다도 먹고 그림도 그리고 엄마랑 얘기도 많이 하고.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끼고 그 모든 것들을 소화시키면서 도착지로 열심히 가고 있는 거예요. 도착했을 때 KTX 타고 간 친구들보다는 늦겠지만 더 많은 추억과 경험을 갖고 가는 거예요. 속도는 늦지만 결국 더 큰 성장을 할 수 있는 영양분을 쌓고 있는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라노 믿고 격려해 주세요."


진짜 어른이고 참 교육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학교를 선택한 나를 매우 칭찬했다. 다른 사립초등학교처럼 외국어나 악기 등에 치중하기보다는 독서, 인성, 인문학 교육을 중점적으로 진행하는 학교였다. 초등학교 시기의 학습 속도는 중요하지 않기에 독서와 토론을 통한 깊고 넓게 생각하는 힘을 기르자는 교육 가치관이 너무 맘에 들어서 선택한 학교였다. 교장 선생님 역시 학교의 교육 가치관에 맞는 분이셨고 입학 후에도 라노를 격려해 주고 사랑해 주셨다.


라노는 초등 입학 전에 다행히 한글을 뗐으나 학교에서는 한글 교육을 진행해 주셨다. 그것도 라노 한글 학습 시에 눈여겨봤던 교육과정평가원의 찬찬한글로 꼼꼼히 세심하게 한글교육을 해주셨다. 라노는 그 누구보다 촘촘히 한글 교육을 받았고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까지 3년 동안 1년에 100권씩 책을 읽었었다. 


한글학습이 전혀 안되던 6살을 생각하면 라노의 초등학교 생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었고 토론했고 글도 많이 썼다. 교장선생님 말씀처럼 라노는 무궁화호를 타고 가면서 경험한 많은 것들을 통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느린 아이를 키우면 느린 거에 익숙해지고 아이를 기다려 줄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다. 느려도 너무 느리니까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주고 이해해줘야 하는지 인내심이 바닥을 칠 때가 많다. 아이에게 매번 화낼 수는 없으니 참고 참다 지치고 지쳐 온몸이 물에 젖은 듯이 무거워지고 차갑게 느껴질 때도 있다. 혹시나 아이에게 내 감정이 들키지는 않을까 싱크대를 부여잡고 심호흡을 크게 하기도 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꺼이꺼이 울기도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나와 라노는 분명 성숙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왜 내게 이런 아이를 주셨을까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아이고 내 팔자야 이런 생각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라노와 함께 하면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어렵게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우린 더 큰 성취감을 맛보고 있지 않은가. 가끔은 교만해져서 너와 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못할 일이라는 생각까지 하는데.


라노와 나 우리의 팀플로는 못할 게 없어.


이 생각 하나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버틸 수 있는 거 같다. 수많은 좌절들이 있었지만 그만큼의 성공도 있었기에 이제는 왜 내게 라노를 주셨을까 더 이상 원망하지는 않는다. 라노를 제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와 라노의 환상적인 팀플로 여기까지 왔으니 라노는 반드시 내게로 왔어야 하는 아이라는 확신이 가득한 오늘이다. 


나의 아이는 내가 아니면 안 되기에 내게 온 소중한 선물이다. 택배가 잘못 배송되듯이 그렇게 잘못 올 리가 없다. 육아로 하루하루 지쳐가더라도 너는 내가 아니면 안 되고 나 또한 너 아니면 안 된다는 우린 그렇게 서로에게 최적의 파트너라는 생각으로 너와 나를 믿고 신뢰의 육아를 해야 하지 않을까. 가끔은 나도 나 자신을 믿지 못하고 이게 맞는 건가 싶을 때가 많지만. 내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이니까 최선의 선택을 한다고 나 자신과 아이를 믿고 오늘을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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