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속도로 걸을 수 있음에 감사
COVID-19라니 작명센스 훌륭했다. 2019년을 잊지 말자는 의미처럼 19라는 숫자가 떡하니 박혀있으니 처음 발생하여 전 세계가 떠들썩했던 그날이 떠오른다.
2019년 겨울은 라노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몹시 예민한 나날이었다. 한글이 아직 어설픈데 이래도 되나 싶고, 또래 친구들보다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스스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기에 매일 잔소리로 전쟁 같은 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몹쓸 역병이 돈다고 하더니 며칠 후 유치원이 휴원을 하고 졸업식도 온라인으로 진행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어머나 이게 뭐야 싶었지만, 아이의 입학식이 계속 늦춰지고 등교가 미뤄지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나, 이건 신이 라노에게 주신 기회야
집에서 지내는 동안 너를 하드 트레이닝 시켜주겠어. 우린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거야
라노는 나랑 학습하는 게 익숙한 아이니까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이 성장할 수 있을 거야
뭐 이런 희망적인 생각들이 샘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우리의 힘든 홈스쿨링이 시작되었고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지만
넌 COVID-19의 최대 수혜자였던 듯하다.
라노의 발음은 종성 자음이 거의 다 뭉그러지는 상황이었기에 가족이나 유치원 친구 등 자주 보는 사이가 아니면 알아듣기 힘든 상태였다. 예를 들면 "엄마, 놀이터에 가서 친구랑 놀고 싶어요"라는 말을 라노가 하게 되면 "언마, 노이터에 가셔 치구양 노요 시퍼요" 이런 식이었다. 라노에게 익숙한 유치원 친구들은 이해해 주고 다시 한번 물어봐 줬지만 학교 친구들은 많이 당황하고 얘는 도대체 뭔가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COVID-19가 찾아왔고 우린 엄마표 홈스쿨링으로 읽기 연습과 말하기 연습을 할 시간이 생겼다.
동네 엄마들이 놀이터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아이랑 초등 3학년 수학 공부를 시키다가 분수를 하다 보면 친자 확인을 한다는.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통해 아 이 새끼가 내 새끼가 맞는구나 확인을 한다는 것인데. 난 라노와 오랫동안 많은 학습을 진행해 왔었다. 세돌이 채 되기 전에 언어치료를 시작했기에 아이와 매일매일이 학습이고 훈련이었다. 뽀로로를 볼 때에도 오늘 뽀로로 기분이 어떤지 에디는 왜 저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많은 대화를 했었으니까. 내 자식은 내가 가르치는 거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어릴 적부터 많은 훈련을 함께해 왔기에 우린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어렵지 않은 관계였다.
"라노야, 학교에 가면 시간표라는 게 있어. 유치원에도 생활계획표가 있었잖아. 우리 시간표를 같이 만들어 보자. 엄마는 수학이랑 언어치료는 매일 했으면 좋겠는데. 체육이랑 미술도 물론 해야지. 진짜 재밌겠다"
야심 차게 시간표를 만들었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잠든 아이를 두고 식탁에 앉아서 물끄러미 이 시간표를 보고 있자니 이러다가 나 미쳐버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건 신이 주신 기회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수업을 준비했다.
혼자 힘으로는 힘들기에 시중에 나와있는 훌륭한 교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너무나 큰 힘이 되었었다. 특히 팩토는 에르고아기띠 이후에 내가 지정한 노벨 평화상 후보 감이었다. 참고로 라노는 두 돌이 지나서까지 잠잘 때에는 아기띠에 매달려 자는 아이였다. 잠투정이 심해서 그냥 누워서 재우는 건 불가능한 아이였는데 아기띠만 해주면 바로 잠드는 것이 아닌가. 남편과 나는 우리가 사용하던 에르고라는 브랜드의 아기띠를 만든 사람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어야 한다는 농담을 하곤 했었다. 그만큼 팩토 교구는 우리의 홈스쿨링에 평화를 선사했으나 이 어찌 고맙지 아니한가. 라노는 팩토로 수학과 과학을 쉽고 재밌게 접하기 시작했고 5학년인 지금도 어렵지만 포기하지 않고 궁금하고 알고 싶어 하는 과목이 되었다. 교구와 실험을 통한 학습이 문자만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교사의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언어치료를 하면서 아이와 글을 갖고 노는 건 많이 익숙했기에 교재들을 참고 자료로 활용해 국어 시간도 어렵지 않게 넘어갔다. 문제는 음악, 미술, 체육 이 음미체가 가장 문제였는데 이건 친정엄마 찬스로 자연스레 넘겼다. 나름 유아교육 전공자이며 소싯적 어린이집 운영 경험이 있던 우리 엄마는 교육자로서 엄격하게 키우며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더니 이렇게 도움이 된다고?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는 오늘과 내일이로구나 싶었다. 어찌 됐든 라노는 외할머니와 함께 그리고 만들기 등 손 많이 가는 일들은 죄다 함께 했다. 심지어 애국가 4절까지 읽고 쓰고 외우고 태극기 그리고 노래 부르기까지 이 얼마나 알찬 수업인가. 우리 엄마의 부캐는 에어로빅 경력 30년의 현재는 줌바 여왕이기에 라노는 방송댄스까지 섭렵하며 홈스쿨링의 끝판왕을 경험했던 것이다. 지금도 가끔 차 타고 가다 보면 티아라의 롤리폴리 틀어달라고 하며 흥얼거리는데 그 시간들이 좋은 기억으로 남은 듯하다.
친정엄마의 도움과 교구 등 여러 가지 방법들이 많았으나 하루는 길어도 너무나 길었다. 심지어 라노는 건강해도 너무나 건강했기에 집에서만 지내는 시간 동안 힘쓸 곳이 없으니 더더욱 힘들어했던 터. 하루 이틀은 재밌게 보내겠지만 COVID-19로 인한 가정보육은 1년이 넘어갔기에 뭔가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건 아주 쿨하게 깨끗한 집을 포기하는 것이었으니.
이 또한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었다.
선천적으로 알레르기가 심한 나는 어릴 땐 엄마가, 결혼 후에는 나 자신이 가장 집중했던 건 다름 아닌 '먼지'와의 전쟁이었다. 집안일 중에 청소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먼지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바로 재채기를 했기에 살기 위해서라도 깨끗한 집은 내가 살아가는 필수 조건이었는데. 이걸 포기해야만 정신이 건강한 너와 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난 먼지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재채기하고 콧물 눈물을 흘릴 줄 알고 40년 가까이 살아왔다. 그런데 청소를 대충 하며 그렇게 하루이틀 한 달 두 달 지내다 보니 2~3일에 청소기 한 번씩 돌리고도 멀쩡히 잘 살아가는 내가 되어 있었다. 라노를 위해 라노가 만들어 놓은 놀이 공간은 그대로 3일 정도는 지켜 주었다. 그 당시 가장 요긴한 장난감은 바로 빈 박스였는데. 새로 산 공기청정기 박스로 한 달은 놀았었다. 안에 들어가서 놀고 박스 겉면에 전지 붙여서 그림 그려서 놀고 나중에는 구멍 뚫어서 눈만 빼꼼히 내놓고 돌아다니면서 라노에게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줬던 고마운 박스였다.
온 국민이, 전 세계가 COVID-19로 힘겨워하고 있을 때 나와 라노는 힘들지만 꿀맛 같은 시간들을 보냈다. 분명 힘든 순간들이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라노에게 다시 오지 않을 기회야. 놓치면 안 돼.
언론에서는 학습 공백으로 학교에 복귀하게 되면 많은 아이들이 힘들어할 거라고 했다. 언어치료실 대기실에서 친하게 지내던 엄마들은 안 그래도 늦은 아이들인데 걱정이라며 정상등교를 두려워했다. 그럴 때마다 난 미소 지었다. 라노에겐 아닐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매일매일 아이를 돌보고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부족한 부분은 바로바로 채워 넣을 수 있었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과정을 내가 매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우린 앞으로 나아갔다.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라노는 조금씩 속도를 높이는 듯했고 정상등교가 시작된 2학년에는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비슷한 속도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놀랍게도 받아쓰기나 단원평가는 거의 틀리지 않고 수행할 수 있었고 몇 번의 성공 이후에 라노는 한두 개만 틀려도 아쉬워하고 더 잘하고 싶어 했다. 그 마음이 내겐 너무나 감동이었다. 점수가 감동이 아니라 성공 경험을 아이가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했다.
라노는 18개월까지는 정상발달이었고 심지어 걸음마, 발화 어휘 수는 빠른 편이었다. 하지만 그건 라노에게 잊힌 기억일 테고 라노가 기억하는 라노의 인생은 온통 실패와 좌절뿐이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항상 뭐든 못하는 아이였고 그로 인해 친구들에게 무시받는 게 일상이었다. 언젠가부터는 잘한다고 칭찬하면 거짓말이라고 친구들은 나보다 더 잘한다고 하면서 너와 내 마음은 상처 투성이었는데. COVID-19가 잠잠해지면서 마스크를 하고 정상등교를 하게 되었고 라노는 학교에서 성공을 경험하고 배우고 맛보고 즐기게 되었다.
지금의 라노가 있게 된 건 전 세계가 힘들었던 그 시간 속에 우린 온 힘을 다해 달려왔던 결과가 아닐까. 그 과정 중에 수많은 인연들이 도움이 되었던 것도 라노가 참 복이 많은 아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홈스쿨링 기간 동안 주 2~3회씩 집에 와서 언어치료를 해주셨던 실습 선생님 덕분에 라노는 발음 교정을 완벽하게 받았고 한글 읽고 쓰기도 깊게 배울 수 있었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은 또 얼마나 사랑이 많은 분이셨는지. 학기 초에는 까칠한 인상의 나이 지긋한 여자 선생님이셔서 걱정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라노는 지금도 가끔 얘기한다. 2학년 선생님은 우릴 정말 사랑해 주셨다고. 1년 동안 28명의 아이들과 지내면서 단 한 번도 화내거나 혼내지 않으셨다니 정말 대단한 분이셨다. 1학년을 입학식도 못하고 온라인 수업으로 보내고 현장수업은 50일도 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이라 많이 힘드셨을 텐데. 라노에게도 항상 자신감을 주셨고 이런저런 상장도 받을 수 있게 하시면서 라노를 격려해 주셨던 너무 따뜻한 분이셨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생각난다. COVID-19로 사회와 단절되어 지내는 기간 동안 라노를 쑥쑥 성장시킬 수 있었던 건 나의 의지와 라노의 실행만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퇴근하고 돌아온 집이 매일매일 엉망이어도 이해해 주고 라노와 몸으로 즐겁게 놀아줬던 남편 덕분에 라노의 대근육 발달이 촉진될 수 있었다. 힘들고 지치고 수업 내용이 바닥이 날 만 한데도 매번 라노에게 다양한 자극을 주었던 외할머니 덕분에 라노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집에만 있을 수는 없으니 같은 단지에 사는 유치원 친구 엄마들은 서로의 집을 돌아가며 아이들을 놀게 했고 혹여나 발달에 지장이 생길 수 있었던 사회성이 문제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어느 순간에도 라노 곁에는 항상 좋은 사람들이 함께 했었다.
아마 이것도 아니었으면 난 깊고 깊은 동굴 속에 라노와 둘이 갇혀서 캄캄한 어둠에 우리를 숨기고 살았을지 모른다. 좋은 이들이 항상 함께 했고 그들 덕분에 라노와 나는 세상 속에서 어울리고 성장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요즘도 의식적으로 라노에게 얘기한다. 누구누구 누구가 있었지. 그래서 우린 참 고마웠지. 우리도 누군가에게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는 삶을 살도록 하자. 라노는 많은 도움 속에서 성장한 아이로 그 가치를 알고 있는 만큼 누군가에게 기꺼이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도 내일도 라노는 조금씩 꾸준히 도전하고 성공하고 실패도 하며 그렇게 적당한 속도로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느림이 아닌 그 적당한 속도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