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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스 Jan 02. 2025

마흔에도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나의 영미


나이가 들어가면서 관계는 넓어지지만 정작 깊고 농도 짙은 관계는 과연 몇이나 될까 내게 묻는다. 20대와 비교해 보면 휴대폰에 입력된 지인의 수는 늘어났다. 하지만 정작 갑자기 전화해 깊숙한 곳에 있는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읽고 헤아려줄 이는 더 늘어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줄어들지 않았음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그런 내게 가족도 모를 내 마음속 나를 끄집어 내주는 친구가 있으니 그 이름은 영미. 나의 영미와의 인연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노의 유치원 등원 첫날. 영미의 키티는 라노와 같은 유치원에 한 살 어린 여동생으로 등원버스를 함께 타고 유치원으로 떠났다. 그렇다. 나의 영미는 처음엔 내게 아줌마 사이에서 흔하디 흔한 인연인 '아이 친구 엄마' 딱 이 정도였다.


아줌마 세계에서 '아이 친구 엄마'의 범주는 굉장히 넓다. 매일 보는 유치원 친구 엄마부터 주 1회 만나는 학원이나 문화센터 친구 엄마까지. 그렇게 볼 때 유치원 친구 엄마는 꽤나 높은 등급의 친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이이긴 하다. 우린 등하원 시 매일 두 번은 만났고 놀이터투어를 두 시간씩 했으며 한두 달에 한 번은 아이를 재우고 아파트 상가에서 밤마실하며 시원한 맥주도 함께했다.


라노는 언어가 늦어서인지 또래보다 좀 어리숙하고 어리바리한 면이 많다. 그래서 동갑 친구보다는 한 살 어린 여자 아이들과 잘 어울렸다. 예쁘고 착한 키티는 라노에게 누구보다 최고의 동생이자 친구가 되어주었다. 아이들 덕분에 나의 영미와 나도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졌다.


어리숙한 거북이 아들 덕분에 유치원 버스에 아이를 태울 때에도 놀이터에서도 난 항상 맘 졸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아이들을 지켜봤다. 그럴 때마다 내 곁엔 항상 영미가 있었고 라노 곁에는 키티가 있었다.


언니 괜찮아
라노 너무 착하고 귀여운데 걱정하지 마
발라당 까진 애들보다는 라노가 훨씬 나아


그녀는 언제나 따뜻했다


눈 오는 날 창밖을 보며 마시는 마시멜로 가득 담긴 핫초코처럼 항상 달콤했고 따스했다. 불안했던 내 마음도 그녀와 함께 할 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처럼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다.


그렇게 키티엄마는 언젠가부터 내게 '나의 영미'가 되었다.




라노의 발달지연이 나아지지 않고 제자리걸음으로 장애판정을 받는 순간에도 그녀는 함께해 줬다. 나보다 먼저 울어주었고 나보다 먼저 힘내주었다. 내가 울어야 할 눈물을 대신 흘려주고 아무렇지 않은 듯 툭툭 털고 일어나 나 또한 아무 일 없는 듯이 생각하게 해 주었다.


그런 영미 없는 미국살이가 딱 2년이 지났다. 처음 남편의 발령 소식을 친정엄마한테 알렸더니 첫마디가 이랬었다.


키티엄마한테 얘기했어? 너네 어떻게 하니.


나의 영미에게 나의 미국행을 알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첫사랑을 남기고 군대 가는 마음이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미안하기도 하고 그녀 없이 지낼 내 생활이 막막하기도 했다. 미국행이 결정된 걸 알리던 날 역시나 우린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고 한국을 떠나던 그날도 펑펑 울었다. 중학교 졸업식 때 좋아하던 체육선생님께 인사하다가 주저앉아 울던 여중생이었던 그날만큼. 오랜만에 소리 내서 엉엉 울었던듯하다.


다 큰 성인이 타인 앞에서 소리 내 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숨김없이 모든 감정을 드러내도 괜찮으며 나아가 감정을 교류하며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음이 아닐까. 내게 영미는 그런 존재인 듯했다.


나이 들어서 맺는 관계들은 계산적이거나 서로의 관심사가 비슷하거나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듯하다. 하지만 나의 영미와 나는 그냥 친하다. '친하다'라는 말 이외에 딱히 뭐라 설명할 표현이 생각나지 않지만 이게 정답이다. 우린 정말 친하다.


마흔이 다돼서 친한 친구가 생겨서 오랜 시간 함께해 줘서 너무나 고맙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닌 내 삶에 들어와


별거 아니야.
괜찮은데.
아무렇지도 않은데 뭐.


이러한 말들로 내 불안을 잠재워준 나의 영미. 고맙고 또 고마워. 여름방학 때 한국 들어가면 시원하게 치맥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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