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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Feb 21. 2024

언니가 또 왔습니다!

언니에게 엄마의 부음을 알리면서 우리는, 언니가 오리라는 기대를 애초에 접었다. 태평양을 건너와야 하기에, 못 옷대도 언니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언니는 부랴부랴 항공편을 알아보고 태평양 건널 준비를 일사천리로 해나갔다. 입관을 보고 싶은 언니를 위해 입관 시간을

밤 아홉 시로 미루고 언니를 기다리기로 했다.


세상만사가 계획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여유롭고 만족스러울까. 예약한 에어프랑스 항공기가 5시간 반이나 딜레이 된다는 사실에, 언니는 핵융합이라도 일으키는 듯 요동치는 심장을 홀로 달래야 했다. 호흡은 가쁘고 마음은 바쁘기만 한데, 공항 측에서는 무성의하게 항공기 수리 중이라는 소식만 되풀이하니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언니, 언니 마음 아는데, 그냥 환불해 달라고 해. 언니는 엄마에게 할 만큼 했으니 누구도 언니를 뭐라 하지는 못할 거야."  

그러나, 탑승구 안에 들어온 상황이라 환불도 못한다는 언니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언니의 심정을, 우리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원래대로 입관을 아침 열한 시에 하기로 했으니까, 좀 늦더라도 맘 편히 가져, 언니!"


발인 전에 도착하여 엄마의 영전에 인사를 드리는 언니의 심정은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날아와, 침상에 누우신 엄마를 두 달 동안 케어하고 돌아갔던 언니. 얼마 안 가, 언니는 요양병원에서 엄마의 상태가 안 좋다 하여 또다시 날아왔었다. 근 일 년 사이에 세 번이나 큰 바다를 건너오게 되었지만, 엄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기 위한 언니의 이번 여정은 유난히 길고 지루했으리라.


연착된 항공기, 항공사 측의 무성의한 태도, 1시간 반 정도 더 긴 비행시간 등은 제쳐두더라도, 엄마를 잃은 슬픔만은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명백한 사실로 잠시도 마음가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므로. 시차 적응할 시간도 없이 언니는 엄마에게 달려와, 슬픔을 부려놓아야 했다. 형제자매들과 어깨를 다독이며 슬픔을 나누고 어루만져야 했다.


손주와 증손주 몇몇을 빼고 거의 모든 자손들이 참석한 발인식. 생육하고 번성한 자손들이 모두 참석하기에는 장소가 너무 비좁았다. 너무 슬퍼하면 고인이 좋은 곳으로 못 가신다며 아직까지 귀가 열려 있으니 귀 가까이 좋은 말을 들려드리라는 직원의 안내......

"엄마 수고 많으셨어요. 좋은 곳으로 가세요. 사랑해요. 감사드려요. 엄마의 영혼을 축복해요."


슬픔과 감사, 사랑으로 정제된 눈물이 간간이 오가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 엄마는 아버지 곁으로 모셔졌다.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주들이 뿌려드린 한 줌 흙을  덮으시고 삼십여 년 만에 아버지와 해후를 하실 엄마가, 지상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또 다른 세상으로 소풍을 떠나기 위한 첫 관문이었다. 소풍 떠나기에 알맞은 날씨였다. 햇빛이 찬란하여, 하늘마저 푸르러, 설경이 눈부신 겨울날의 소풍!


엄마의 오랜 고통이 끝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제 고아라는 생각 - 엄마 아빠도 없는 고아라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온통 옥죄어 들었다.

'이제 누구를 믿고 의지해야 하지? 엄마는 우리를 이어주는 끈이었는데, 작으나마 음성 강강하시던 울 엄마가 먼 길 떠나시고 이제 안 계시는데, 우리는 앞으로 어떡해야 하지? 엄마 없는 빈자리를 누가 채워 줄까? 채워지기나 할까? 그래도 언니 오빠들이 있어 다행이야. 언니 오빠들이 없다면 과연 이 슬픔을 곱다시 견디며 큰일을 무사히 치를 수나 있었을까......'


바라볼수록 위로 오빠 언니들의 노쇠해 가는 모습도 안쓰럽고, 그나마 제일 젊은  막둥이들은 생각할수록 가련하게 다가왔다. 어엿한 중년이 다 되어가는 조카들은 듬직하고, 파릇파릇한 조카손주들은 사랑스러워 자꾸만 눈길이 갔다. 모두가 시내의 한 식당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차지하고 앉아 엄마가 베풀어주신 마지막 갈비탕을 깨끗이 비워냈다. 큰일 아니면 좀체 보기 힘든지라 아쉬운 이별 의식이 있은 뒤에사 갈 사람은 모두 가고, 동생집에 모였다.


"엄마의 목욕권이 남아 있는데 그걸로 우리 목욕탕이나 갈까?"

목욕권도 못다 쓰고 가신 엄마가 야속하고 그리운 막내딸은 언니들을 이끌고 목욕탕엘 가자 한다. 남자들은 한숨 붙이고, 조카들은 같이 커피와 간식을 배달시켜 먹기로 하고, 왕언니는 형편 상 올라갔기에 네 자매가 생전 처음으로 같이 목욕을 갔다. 누가 시작했는지, 아궁이 앞 커다란 고무통 뜨거운 물속에 우리를 넣어 놓고, 등짝 스매싱을 날리며 때를 밀어주시던 엄마얘기로 또다시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손은 까칠하여 때수건이 따로 필요 없고, 살갗까지 벗어지도록 뽀독뽀독 야무지게도 밀어주셨다는 아득한 전설 속 엄마.


동생은 방방 떠서 목욕권을 빼먹고 오는 실수를 했건만 상관없었다. 언니들과 목욕할 수 있는 기회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어서 아무래도 좋았다. 둘씩 짝을 지어 등도 밀어주고, 샴푸가 어떤 것이다요? 린스 좀 줘 보시요잉? 떠들며 피로를 푸는 데 여념이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서도 동생은 신발장 열쇠를 손목에 끼고 나오는 깜찍한 실수를 했다. 주인에게 말하여 만능열쇠로 겨우 신발을 찾아 신고 나왔는데 입구에서 삐익 삑, 신호음에 딱 걸린 것이다.


나이도 제일 어린것이 왜 그러냐고 탓을 하지만, 그럴 만도 한 것이, 가까이 살며 엄마 일에 제일 신경을 많이 썼고, 엄마의 손발로 엄마의 든든한 심부름꾼으로 살아온 세월얼마였던가. 

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직장과 가정도 살펴야 했고, 더구나 시댁에도 소홀할 수 없는 맏며느리임에야.


괜찮다. 괜찮아. 그런 실수야 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열쇠 갖고 가서 삶아 먹으려 한 것도 아니고. 사소한 위로를 던지며,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편의점으로 몰려간 우리는 바나나 우유를

쪽쪽 빨며 유리창 밖을 응시했다. 추억 속으로 빠져들기 좋은 시간이었다. 언니랑 시내에 있는 목욕탕에 간 적이 있었지. 엄마가 고무통에 들어갈 만큼 커버린 우리에게 목욕비와 간식비를 쥐어주면, 우리는 신나라 목욕을 하고 요구르트와 호빵을 사서 삼키곤 했지..... 


목욕으로 물 건너온 언니의 피로가 다 풀렸음 하는 게 우리 모두의 바람이었지만, 언니는  시차적응으로 인해 며칠은 고생할 것이다. 가뜩이나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언니. 이 주간의 휴가로 언니는 고국에서 모처럼 딸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언니는 고국에서 살고파서 고국으로 돌아와 혼자 생활하던  딸내미와  강원도로 여행을 떠날 거라 했다.

"딸내미와 즐거운 여행 다녀오시고, 서울 오면 우리 집에 꼭 오소이?"

아쉬운 이별의 시간, 엄마가 가신 지 삼일째 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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