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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Nov 06. 2024

내 브로콜리를 돌리 도오!



큰일이다! 단골 미용실이 이사를 가야 한단다. 이십여 년 가까이 한 곳에서 영업을 해 오던 터에 급작스레 건물주로부터 나가 달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원장님, 가게를 내놓고 고민 중이라 털어놓는다. 기존 세입자에게 좀 부담스러울 만치 월세를 올려 달라기엔 뭐 하고 해서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는 모양이라고, 원장님은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미용실 고객들과 주차문제로 언쟁을 심심찮게 벌이던 건물주 할머니에 대한 서운함을 종종 피력하던 그. 할머니의 핍박이 결국 세입자를 새로 들이려는 의지의 세미한 암시였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 2년도 아닌데, 20여 년 가까이 월세를 내 온 세입자를, 그것도 하루아침에 내쫓다시피 나가라 하다니. 올려 달라는 만큼 월세도 꼬박꼬박 올려 주었는데 말이다. 머리 손질을 하다가도 건물주 얘기만 나오면 그는 달변가가 되곤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할 말이 많고 그가 하는 말이 구구절절 옳아도, 꼭대기층의 건물주와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세무서 말고 세입자들 중에 과연 있을까? 있다 한들, 본전도 못 건질 게 뻔한 싸움은 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그는 순순히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섰다. 가까운 곳으로 옮겼으면 하는 고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사업장을 옮기기로 결정을 보았다며 명함을 건넸다. 

“잘 되었네요!” 

한 달에 한 번 커트를 해야 하기에 단골 미용실의 부재가 제법 심란하게 다가오던 나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9월 중순 경, 한 달 동안 양분을 먹고 자란 머리털이 묵직하게 느껴져 명함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아직 오픈을 못 했어요,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있나...... 그럼 언제 개업을 하시냐, 시르죽은 음성으로 물으니, 시월 초가 되어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머리털이 날아오르려 해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 아무 곳이다 찾아 커트를 해야지. 고독한 미식가가 고파오는 배를 달래며 가게를 찾듯, 열심히 미용실을 찾아 두드렸다. 

집 근처의 미용실을 세 군데 정도 돌았으나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 쉬는 날인데 잠시 나온 거라며 거절, 이제 막 들어가던 참이라며 거절, 약속이 생겼다며 거절...... 손님만 들어가면 어서 오시라고 반가이 맞아주던 옛날이 그리워졌다. 다리도 아프고 마음도 지쳐가기에 마지막으로 한 곳만 더 가 보리라 맘먹었다. 만약 또 거절을 하면 시월 초까지 참아버리지, 뭐...... 



다행히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린 미용실은 영업 중이라 터벅터벅 들어가서는 미용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 어디서 자르신 거예요?”

“왜요? 커트한 지 한 달 정도 되었는데 뭐가 잘못되었나요?”

“거의 안 자른 거 같이 수북한데요. 더운데 왜 이렇게 자르셨을까?”

할 말이 없었다. 소위 기술자 입네 하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잘 알기에 잠자코 있기로 했다. 자신의 기술이 최고다, 타 기술자들을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옥에 티를 찾아내지 못해 안달인 듯한 태도를 감추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만심에 기울어진 자존심은 좀 위험하지 않나 하는 생각..... 


단골 미용실 원장님에게 머리를 하면 아이들도 동료들도 잘 어울린다고, 어느 미용실이냐 묻곤 했는데, 왜 이 원장님은 이러실까. 기분이 불쾌해지려 했다. 

미용실 원장님들은 대개 고객들과 대화를 많이 시도한다. 어색함을 달래려 그러는 것이겠지만 차라리 침묵이 나을 뻔한 원장님들도 있는데 이번 원장님이 그런 류의 사람 같았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말없이 바라보는데, 영양가 없는 말을 건넨다. 머리 손질을 귀찮아하는 게 보여요,라는 둥, 진작 이렇게 시원하게 쳤어야죠,라는 식의 핀잔도 서슴지 않는다.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바닥에는 마구 숱을 쳐낸 탓에 머리카락이 제법 수북했다. 


“원래 커트를 잘하는 사람은 최소한으로 자르고 잘못하는 사람은 마구 자르는 법이거든!”

늘 객관적인 의견을 내보이던 남편이 언젠가 던져주던 말이 생각나며 완성된 머리를 훑어보는데, 휑한 느낌과 함께 선머슴 모양을 한 두상이 들어온다. 이전 원장님은 머리카락을 최소로 잘라, 완성되고 나면 바닥에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그리 많지 않았었다. 숱도 최소한만 쳐내는 게 철칙인 원장님이었는데......



이런, 내 브로콜리가 이렇게 홀쭉해지다니! 삼차원으로 볼록볼록, 제법 양감이 풍부하던 두상이 기가 잔뜩 눌렸다. 귀퉁이가 잔뜩 눌린 브로콜리가 되어버렸다.

“엄마, 커트 다른 곳에서 했나 보네?” 

대번에 알아채는 눈치 백 단 아이. 원장님, 이렇게 왕창 솎아내 버리면, 시원하긴 한데 스타일이 너무 이상하잖습니까? 입체감이 별로 없잖아요. 그러나 한 마디 항변도 못하고 돌아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허공에 외쳐 본다. 

‘내 브로콜리 돌리 도오! 내 브로콜리를 돌려 달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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