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은 20년 지기 친구다. 어릴 적 유치원에서부터 친구였던 우리는 대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나오며 여러 추억을 쌓은 막역한 사이다. 20대까지의 L은 나름 다부지고 혈기왕성한 친구였으며, 학교에서 매일 술과 사람을 즐기던 밝은 친구였다..
하지만 30대의 L은 매일 ‘아프다’라는 말을 삐걱거리는 종소리처럼 뱉어내는 고장 난 벽시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탈모 의혹을 받고 있는 논란의 주인공. 내가 있었다
L의 집에 방문한 나는 바닥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L은 여러 전화번호를 찾다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아.. 지금 방문해도 된다고요?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L은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탈모 전문병원 예약이 다 되었다는 신호였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힘없이 밖으로 나섰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신축 빌딩 가장 높은 곳에 병원이 있었다. 빌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화려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병원 입구가 나타났다. 나는 그 휘황찬란한 입구를 보며 이곳에 얼마나 많은 탈모인들의 근심걱정과 그것이 치환된 자본이 들어갔을까 상상했다.
안으로 들어오니 ‘모내기클럽’이라는 탈모 극복 방송을 홍보하는 배너가 보였다. 순간 피식했으나 이윽고 저런 못된 센스에 피식한 내가 조금 미워졌다. 잠시 후, 간호사 한 분이 우리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깔끔하고 모던한 분위기의 진료실에는 샤프한 인상의 의사 선생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진료실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의사 선생님의 머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는 나름 검게 채워져 있었으나 머리의 질감이 묘하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를 보고 나는 선생님 역시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유추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눈 의사 선생님은 먼저 L의 상태를 진단했다. 그는 책상 옆에 있던 임산부 초음파 측정기 같은 기계를 L의 정수리로 가져갔다. 기계가 L의 머리에 닿자 앞에 있는 모니터에 확대된 L의 머리카락들이 보였다.
“뒷머리 대비 머리카락이 많이 가늘어졌네요. 이마랑 정수리 모두 탈모 초기가 맞네요”
따뜻했던 인사와 달리 진단은 너무나 차갑고 무자비했다.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재판관 같았다. 선고를 받은 피고... 아니 L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착잡함이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음 재판을 기다리는 나 역시 긴장감으로 온몸이 가득 찼다.
그리고 곧 나의 정수리에도 심판의 측정기가 다가왔다. 그것은 내 정수리 이곳저곳을 이리저리 파헤쳤다. 모니터에는 황무지 같은 피부에 말라비틀어진 잡초처럼 듬성듬성 흩어져있는 내 소중한 머리카락들이 보였다.
“노난씨도 머리카락이 많이 가늘어졌네요. 특히 정수리는 탈모 중기 진입 단계네요...”
주...중기라니! 그 한마디 선고에 내 마음이 산산조각 났다. 그 와중에 내 진단 결과를 들은 L은 뒤에서 끅끅대며 얄밉게 웃음을 참고 있었다. 나는 겨우 충격을 이겨내며 바짓가랑이를 붙잡듯 의사 선생님께 질문했다.
“제가 요즘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런데... 스트레스만 잘 조절하면 치유가 될까요?”
“스트레스는 탈모의 가속화 원인일 뿐 근본적인 원인이 아닙니다. 이건 그냥 유전성 질환이에요”
“선생님... 다른 방법이 혹시 있을까요??”
“현재로서는 약 처방 말고는 큰 치료법이 없어요... 처방전 써드릴 테니깐 아래층 약국에서 구입하시면 됩니다.”
잠시 후... 우리 손엔 먹는 약 삼 개월치 그리고 머리에 직접 바르는 미녹시딜 한 박스가 담긴 약봉지가 들려있었다. 특히 내 봉지에는 탈모약 중에서도 가장 강한 두타스테리드 성분의 약이 담겨있었다. 약국에서 나온 우린 옆에 있는 벤치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게 뭐냐...”
“탈모일 줄은 알았지만, 막상 들으니 가슴이 출렁 내려앉더라”
“한창 파릇파릇하고 풍성했던 우리가 이렇게 되다니...”
“그래도 내가 너보단 나을 줄 알았는데”
“미친놈! 그 와중에...”
“미안... 약이나 꾸준히 잘 먹자...”
그렇게 어릴 적 매일 놀이터에서 해맑게 뛰어놀던 92년생 두 친구는 초라한 비닐봉지 하나 씩을 손에 들고 차가운 삼십 대의 현실을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