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식물인간은 항상 몸이 축 늘어진 채 눈을 감고 조용히 잠자는 듯이 그려진다.
그러나 우리 아빠는 그렇지 않다. 뇌경색이라는 질환의 특성 때문으로 알고 있는데, 팔은 접힌 채로, 손가락은 주먹을 꽉 쥔 채로, 무릎은 과도하게 펴진 채로, 발은 아래쪽으로 쭉 펴진 상태로 굳었다. 심지어 무의식 상태가 아닌 반의식 상태여서,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잠을 자기도 한다. 큰 소리나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놀라기도 한다. 불편한 것이 있거나 아플 때면, 기침을 하거나 숨을 거칠게 내쉰다. 어억, 어억, 하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낼 때도 있다. 온몸에 꽈악 힘을 주며 씩씩거리는 건 예삿일이며, 이를 부득부득 갈기도 하고, 경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곁에서 간호하는 사람은, 통잠을 결코 자지 못한다. 커헉, 하고 가래를 뱉는 소리에 잠을 깰 수밖에 없다.
호흡을 위해 목을 뚫는 기관절개술을 했기 때문에 수시로 가래를 빼줘야 하는 것이다. 목이 뚫렸으니 콧줄로 음식을 공급해줘야 한다. 만약 병원에서 기관절개술을 해야 한다고 득달을 해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목숨만 겨우 살리는 시술이다. 다시 정상인처럼 회생할 가능성은 매우 드물다. 엄마가 아빠를 병원에서 간호하는 수년 동안, 얼마나 많은 환자들을 보았겠는가. 이건 경험에 의한 충고다.
변은 스스로 배출하지 못하여 손가락으로 파내야 하며, 수시로 자세를 바꿔주지 않으면 욕창이 생기고야 만다. 팔다리 또한 수시로 주물러줘야 경기를 일으키지 않으며, 몸에 부기가 생기지 않는다. 목욕은 보통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데, 아빠는 원래 마른 편이었고 지금은 더 말랐기 때문에 성인 여성 두 명이서 힘겹게 들어 욕실로 이동시킬 수는 있다. 때도 일반인처럼 나오고, 머리카락이나 수염도 건강했을 때와 같이 빨리 자라는 편이라 제때제때 밀어줘야 한다.
여느 사람들처럼 감기에 걸리고, 감기가 심해져 폐렴에 걸렸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목에서 피를 심하게 토해냈었는데, 응급실 의료진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할 폐 엑스레이 사진을 내게 보여주면서 손쓸 방법이 없다고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었다. 여기 보이는 흰색이 모두 염증이라고. 울먹거리는 나에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던 그 의료진을 나는 아직도 원망한다. 그러나 아빠는 살아났다.
최근 아빠는 새로운 질병까지 갖게 되었다. 각막이 벗겨지는 재발성각막상피미란이다. 얼굴을 닦던 수건에 상처를 입은 건지, 아니면 그저 오랜 투병 생활의 일환으로 나타난 질병인지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 값비싼 한 달짜리 보호렌즈를 상시 착용해야 한다.
뇌수술을 한 병원에서 자진 퇴원을 한 이후에(말이 자진 퇴원이지 병원에서도 더 이상 손쓸 도리가 없다며 퇴원을 종용했었다.) 가정 간호를 받고 있는데, 크게 의미는 없다. 처방된 약이나 필요한 의료용품을 가져오고, 산소포화도와 혈압, 혈당 등을 체크해 준다.
지금 생각나는 건 이 정도. 아무렇지 않게 나열을 한 것 같겠지만, 환자 본인과 곁에서 간호를 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란 말로 다 못할 것이다. 힘을 주면서 쌕쌕 호흡을 내뱉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아빠의 숨을 틀어막으면 모든 것이 평안해질까, 나는 어떤 처벌을 받게 될까, 그래도 우리 가족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면. 예전엔 이따위의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왜 연명치료 거부는 있으면서, 되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사람의 안락사는 허용해주지 않는 것일까. 암환자의 호스피스는 허용이 되면서, 왜 식물인간의 호스피스는 허용되지 않는가. 존엄사와 안락사는 환자 본인과 병간호를 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도 분명히 허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범위가 암이나 불치병에 한정되지 않고 넓어져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18년째 식물인간인 사람에게는.
모든 고통과 죄책감을 환자와 그 가족들의 몫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한다.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니고, 살고 싶어서 사는 것도 아니다. 아빠가 고통스러워하는 마지막을 보고 싶지 않다. 이제는 그저 평안하게 눈을 감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