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집으로 가던 길이었는지, 아니면 며칠 뒤의 예정대로의 방과 후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는 좌석버스에 탔었고, 그곳에서 동네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버지 쓰러지셨다며? 안타까워서 어쩌나."
나는 그 말을 버스 안에 타 있던 다른 이들이 들었을까 봐 눈치를 살폈다. 저 아줌마는 우리 집안일을 왜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저렇게 큰 목소리로 한담. 아주머니가 성숙하지 못한 어른이었건 말건, 당시의 나는 그렇게 어렸고 아빠가 그렇게 심각한 상태일 거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때가 내가 수능을 치르고 겨우 일주일이 흘렀을 때였을 거다.
아빠가 쓰러지던 날, 아빠는 아침밥을 물에 말고 마른 멸치를 쌈장에 찍어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기우뚱 쓰러지셨다. 엄마는 그날 일을 상기하면 항상, 제대로 된 식사를 챙겨주지 못했음에 가슴 아파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해서 제대로 된 식사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아빠가 쓰러질 때는 다행히 엄마가 곁에 있었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뇌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큰 수술비가 있을 리가 없었다. 누군가 보증을 서줘야 했다. 엄마는 큰아버지에게 연락을 했으나, 밭일을 하러 나가셨기 때문에 연락이 되지 않았다. 급한 대로 고모들, 고모부들에게도 연락을 했었다. 그러나 아무도 보증을 서주지 않았다.
뇌수술은 촌각을 다투는 일임을 누구든 잘 알 것이다. 이미 세네 시간이 흐른 뒤에야 큰아버지가 병원으로 찾아왔다. 직접 서류에 사인을 한 그때서야 뇌수술을 할 수 있었고, 아빠는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뇌경색, 뇌출혈... 낯선 질병이 원인인 채로 세미코마 상태인 그대로.
추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의료사고의 가능성도 있었다. 당시 뇌수술 전문의가 부재했으며, 수술을 한 전문의는 척추수술 전문의였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대기업 이름을 단 거대한 병원에 맞설 생각을 할 지식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뇌수술을 끝내고 중환자실에 있던 아빠는 깨어나지 못한 채로 일반 병실로 옮겨져서 몇 년간을 살았다. 차도가 없었고, 병원비가 부담이 됐으며, 결국 우리 가족은 가정간호를 택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