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좋아
"안녕히 계세요, 저 짤리러 갑니다."
곁에 있던 동료에게 나직이 말했다. 인사 부서장에게서 시간이 되냐는 메시지를 받은 직후였다. 동료는 재차 되물으며 놀란 토끼눈을 떴지만,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회사의 경영 사정, 수개월 전 있었던 대량 해고, 분위기, 조직 변경, 실적 압박, 그 모든 것에 이유가 있었다.
사실 한 달 안에 그만두려고 했었다. 나는 더 이상 이 회사를 원하지 않았다. 회사가 내게 남긴 상처는 아물고 흉터가 되기를 반복해서, 더 이상 새롭게 새겨질 공간이 없었다. 분기에 한 번 이상은 꼭 일어나는 조직 변경, 기준 없이 오르내리는 직책, 그렇게 부품처럼 갈아 끼우는 인력들에 대한 무심함.... 최근 제일 참을 수 없던 건 무능한 상사들이었다.
인사 부서장은 나름 힘겹게 입을 떼는 듯했다. 그리고 뜻밖의 '지방 발령'을 말했다. 지방에 인력이 부족해서, 전직 명령을 내리고 어쩌고, 아무튼 당장 2주 뒤에 지방으로 출근을 해야 한단다. 한방 먹었다는 생각. 그리고, 마지막까지 더럽고 치사하게 군다는 생각. 그냥 자르면 회사에 누가 되니까, 내가 자진해서 그만두는 것으로 정리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래, 그래 줄게. 어차피 그만두려고 했는데 실업급여 타면 되니까, 오히려 좋아.
그리고 일주일 뒤, '전직 명령에 의한 자진 퇴사'가 공식화되었다. 인수인계는 길게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을 리스트업 해놓았고,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자료들만 넘겨주면 됐다. 나머지 영역은 알려준다고 한들, 일한 지 얼마 안 된 사회초년생인 동료 한 명이 쳐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며칠 뒤, 퇴사를 했다. 다음은 직속 상사의 아주 엄청난 대목이다.
"언제 그만두세요?"
"오늘요."
직속 상사는, 경영진이 나에 대한 처리를 논하고, 인사 부서장과 내가 면담을 두 번 하고, 인수인계가 끝나는 당일까지 이걸 몰랐다고 했다. 어째서? 나는 그를 믿지 않는다. 정말 무능해서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고단수인지. 둘 중 하나인데 이제는 알 바가 아니었다.
조금씩 정리했는데도 여전히 양손 가득한 잡동사니를 들고, 회사를 나섰다. 사무실 안 대부분의 직원이 우르르 나와 나를 배웅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나 역시 그 많은 퇴사자들처럼 연기처럼 사라지려고 했으니까. 고생했다며 마지막 인사들을 한마디씩 해주는데, 눈물이 울컥 솟았다. 물론 회사에 대한 그 어떤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동료 직원들의 따스한 정 때문이었다. 남은 직원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틈 사이로 보이는 훌쩍이는 얼굴들, 그것이 내가 이 회사에서 가져가는 유일한 레거시였다.
경영진들은 아무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나는 근속연수 5년 차 직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