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사의 엘리베이터였다
'인류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카피에 속지 말았어야 했다. 번지르르한 홈페이지와 여러 브랜드를 운영하는 그럴싸한 규모. 그 스타트업 특유의 세련됨에, 나는 속절없이 매료되었다. 당시 취업이 절실한 탓에 단단히 콩깍지가 씌었던 게 분명하다. 수많은 그저 그런 채용 공고들 사이에서, 그곳은 마치 오아시스처럼 빛나 보였으니까.
면접관 중에는 대표가 있었다. 홈페이지 문구처럼 화려한 말발을 자랑하는 대표가 마음에 들었다. 입만 살았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어찌 되었건 나는 합격했다. 직책은 3개월의 수습 기간 후에 정해준다더니, 기간이 끝나자 논의도 없이 덜컥 '사원'을 붙여주었다. 내가 따져 묻자, 성과를 보여야만 직책을 줄 수 있다며 말끝을 흐렸다. 무슨 성과를? 어떻게?
지난 회사에서 쌓은 4년 경력과 직책이 깡그리 무시당했다는 패배감. 그래도 견딜 만했다. 공백이 긴 탓이라며, 일할 수 있게 된 것이 어디냐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니, 감사해했다. 물론 연봉은 지난 회사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충격적인 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연봉조차 나중에 들어온 무경력의 신입사원들보다 낮았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싸한 징조는 도처에 깔려 있었다. 공고에는 '식대 별도'라더니, 막상 근로계약서에는 식대 포함 연봉이 적혀 있었다. 대표에게 묻자, 그는 선심 쓰듯 그 자리에서 월급을 찔끔 올려주었다. 진짜다. 시장통 흥정도 아니고. 인사 기준은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입사 시기에 따라 수습기간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심지어 수습 기간 중 급여가 깎이는 사람, 다 받는 사람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체계'라는 게 없었다. 초기 스타트업이라서? 글쎄. 그 엉망진창인 인사는 회사가 몸집을 불리고 내가 퇴사할 때까지도 정리되지 않았다. 직원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다 돈다는 것을 모를까? 아니, 제발 차라리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것이길 바랐다. 무지한 것보다는 나빴기를.
나는 입사 초반에는 팀장의 직속 부하로 일했다. 서로 일하는 스타일이 너무 잘 맞았다. 그의 칭찬과 입김에 힘입어, 반년 후 주임을 건너뛰고 바로 대리가 되었다. 소소한 우수 사원 보너스도 받았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인사 체계가 변경되었다. 주임 및 대리를 없애버리고 팀제를 시행한단다. 나는 하루아침에 맨 아래로 추락해서, 팀원이 되었다.
동시에 나의 팀장은 다른 부서의 실장이 되었다. 그의 빈자리에 사회 초년생이 올라갔다. 나은 건 나보다 몇 달 먼저 입사한 것뿐인 남자 직원이었다. 엄밀히 말해 그와 내 업무 영역은 달랐으며, 그가 내게 조언을 해줄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표는 조직도 발표 전날 나를 불러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가 나보다 '적극적'이라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고 말했다. 대표는 일단 나대고 목소리 큰 사람을 좋아했다. 세상은 대개 그런 사람을 능력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자, 다시 팀 개편이 일어났다. 조직도 발표가 되는 당일 오전에 대표가 날 불렀다. 이번엔 실장으로 앉히겠단다. 대리에서 팀원이 된 때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직책을 받고 싶지 않다. 분명 또 끌어내릴 것이지 않느냐(실제로 그렇게 됐다). 그래도 내가 해야 한단다. 그렇게 강제적으로 실장이 되어서는 직책 수여식인지 뭔지 상장 같은 것도 받았다. 나는 그때 옆에 선 직원에게 '무슨 지랄인지 모르겠어요.'라고 참지 못하고 속닥거렸다.
아. 한 가지 이야기하지 않은 게 있다. 직책 변경에 따른 연봉 변화는 없었다. 그냥 결재라인 정도가 바뀌고, 회사 내 호칭이 변경될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꽤 기분이 더러웠다. 나보다 직책이 낮았던 사람들이 나를 직책 없이 부르고, 내가 그들을 팀장님 실장님으로 불러야 할 때마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이후 다시 팀장이 되었다가, 실장이 되었다가, 다시 팀장이 되었다가, 최종적으로 팀원이 되었다. 나는 결국 팀원으로 퇴사하게 됐다. 하하. 직책만 이 정도로 변화한 것이다. 분명 내 업무는 거의 바뀌지 않았는데, 팀명도 끊임없이 변경되어서, 여태 만들어진 명함을 모아보면 10장이 넘었다. 그래, 이 모든 건 겨우 5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회사의 '엘리베이터'라고 불렀다. 자존심을 지켜내고 수치심을 낮추기 위해서는 그러지 않으면 안 됐다.
직책을 내리면 나가라는 소리가 아닌가. 스스로도 끊임없이 되새김질 한 문장이었다. 그렇지만 회사는 직책을 내리면서도 내가 필요하다고 사과했다. 아니, 그래도. 내가 이딴 취급을 받으면서 견뎌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환경 탓을 하며 익숙함에 취해 변화하기를 두려워했다. 세상에 던져지기를 무서워했다. 지방 본사에 있을 때는 다른 일자리가 없어서 참았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그저 생존하느라 버텼을 뿐이라고.
그렇게 쉼 없이 오르내리던 엘리베이터가, 겨우 5년 만에 멈췄다. 그건 고장 난 엘리베이터였을 뿐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나와 발을 내디딘 곳은, 지옥도, 척박한 동토도 아닌, 새로운 기회의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