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마포를 찾았을 땐 외투 속을 뚫고 들어오는 막바지 바람에 살짝 추위를 느꼈는데 그새 봄기운이 만연하다.
낡고 오래된 골목 구석구석 드러나는 형형색색 꽃나무들이 보기만 해도 따습다
이토록 예쁜 정경을 몽글몽글두 눈에 담을라 치면 아찔한 오르막이 낭만을 훅 치고 들어온다
눈은 호강인데 몸은 암벽등반이 따로 없다.
숨을 헉헉거리며 굽이 굽이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두 다리에서 부화 직전의 알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기세다
이 구역 택배 사장님들께 진심 존경을 표한다
주소를 보니 맞게 찾아온 듯하다.
문고리에 걸친 채 살짝 문이 열려있다
불필요한 소음이 최대한 옆집으로 새 나가지 않게 열려있는 그 작은 틈 사이로 코를 박고 어르신을 조심스레 불러본다
금세 소리를 듣고 안에서 나오시는 인기척이 들린다.
어르신은 한눈에 뵙기에도 상당한 멋쟁이셨다
특별히 멋을 부리지 않아도 시크한 멋이 묻어난달까?
무심히걸친 마 셔츠는 마치 손을 닿으면 베일 듯 아찔한 킬각을 자랑했다.
정갈한 7대 3 가르마로 곱게 빗어 올린 헤어스타일은 기름을 바른양 윤기가 좔좔 흘렀다.
이런 게 타고 난 부티인가 싶을 정도로 뽀얀 피부에 올블랙 패션의 어르신은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련미가 철철 넘쳤다
왕년에 할머님들께 인기가 꽤나 많으셨을 거 같다.
물론 영정사진으로 뵌 아내분께서도 상당한 미인이셨다
어르신은 우리를 보자마자 본인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쉬지도 못하고 일하러 나와서 어쩌냐고 미안해하셨다
대부분 어르신들은 우리도 복지관 직원인 줄 아신다
직장에 나와서 일하는 개념으로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다
근데 우리 세 사람은 스스로 이 일을 자초한 사람들이라 진심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놀러 나오는 마음으로 나온다
우리를 기다리는 이에게 이웃의 정과 가족의 사랑을 나눠주는 일이 생각보다 꽤 보람되고 즐겁다.
본격적인 생신축하기념의 시작을 알리며어르신께 고깔모자를 권해드리니 쑥스러운 듯 사양하셨다
머리모양이 망가질 수 있겠다 싶어 굳이 한번 더 권하진 않았다
대신 셋이 입을 모아 생신 축하 노래를 불러드렸다.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생신축하 합니다 ~~~~~
노래가 끝나자 잠시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잠깐 생각에 잠긴 어르신은 곧이어 눈물을 훔치신다
처음엔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면 다소 당황스러웠는데 지금은 어르신께 기쁜 날이니 마음껏 우시라는 농담을 건넬 정도로 넉살이 늘었다
잠시 기다려 드리자 어르신은 이내 말랑말랑해진 감정을 우리에게 들킨 게 쑥스러우셨는지 갑자기 고깔모자에 관심을 보이셨다
이렇게 쓰면 되는 거냐고 급기야 머리에 얹어보기까지 하셨다.
이 순간을 놓칠 수 없다
이런 표현 살짝 버릇없지만 순간 너무 귀여우셨다. 웃으면서사진으로 추억하나 남기자고애교를 부리니 어르신도 우리가 무안하지 않게 받아주셨다
곧이어 그간 살아오신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어르신은 슬하에 6남매를 두셨는데손주의 손주까지 보셨다고 했다.
20대 초반에 결혼해서 어느덧 증조할아버지가 되셨다
아마 아까 잠시 감정이 올라왔던 이유가 자식들 생각이 나서 그러신 거 같다.
우리가 뵙는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가족과 거의 왕래가 없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독거노인분들이많다
저마다의 말 못 한 사연과 가슴 아픈 가족사가 있기
때문에 어르신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스스로 말씀하지 않은 부분은 우리도 더는 자세히 알려고 들지 않는다
화제를 돌려나는 어르신께 한 가지를 여쭈었다.
이토록 동안이신 비결이 뭔지 궁금했다.
알고 보니 원래 타고나신 거였다.
심지어 몸에 해로운 술, 담배도많이 하셨었다.
젊은 시절,전남광진에서 완도, 해남을 오가며공장 직원만 120명 둘 정도로 크게 가공업을 하셨는데 2003년도에 부도가 났다고 했다 한창 사업할 땐 술도 엄청나게 드셨단다
아침까지 술을 먹고 저녁에 다시 또술을 먹기 위해 낮에 운동을 다녀오실 정도라니 정말 사람도, 노는 것도 꽤나 좋아하신 한량의 삶을 사신 듯했다.
부도 이후, 술은 일부러 끊으셨지만 담배는 아직 완전히는 못 끊고 며칠에 한 개비 정도만 핀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웬만한 70대보다 피부도 좋고, 젊어 보이셨다
참고로 어르신은 낼모레 90을 바라보신다.
어르신을 뵈니 술 담배가 꼭 만병의 근원은 아닌가 보다 물론 연세가 있다 보니 전혀 불편한 곳이없으시진 않겠지만 안색도 좋으시고 동안이신 건 확실했다. 성품도 남에게 피해 주는 걸 유독 불편해하시는깔끔한 성격이셨다 복지사님들께서 가끔 식사를 초대해도 손을 자꾸 떨어 수저를 놓치거나 음식을 흘리기 때문에 옆에서 같이 먹는 사람에게 민폐가 될까 싶어 웬만하면 복지관도나오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신다고 했다.
매일 틀어놓는 티브이가 유일한 친구고 놀이라고 하셨다
가끔 복지관에서 봉사자분들과 직접 먹거리를 전달해 주시기 위해 집으로 직접 찾아오시기도 하는데 한 번은 같이 오신 봉사자분께서 어르신보다 두 살 밖에 어리지 않더라는 거다.
그때 그분께 많이 미안한 마음이 드셨다고 한다 그 어르신은 내가 봐도 진짜 대단하시다 80대 후반이신데 아직 봉사자로 활동하신다니 놀랍고도 존경스럽다
이 동네가 평지 길이 아니다 보니 조심하셔야 한다. 나이 많은 본인 한 사람때문에 여러 사람이 고생하는 거 같아 얼른 가야 한다고(하늘나라) 씁쓸히 말씀하시는 어르신을 뵈니아직은 못 간다고 전하라는 노래 가삿말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