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Focus on being productive instead of busy." (Tim Ferriss)
시험에 떨어져서가 아니라 떳떳하지 못해서 부끄러웠다.
오래전 미국 유학 시절 가장 좋아했던 영화 중 하나가 'Cool Runnings'였다.
미국에서 가장 처음 내돈내산 했던 비디오여서 얼마나 많이 보고 또 봤는지 모른다.
이 영화는 자마이칸 봅슬레이팀 실화를 모티브로 한 코미디 영화다.
눈을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한 자마이칸 젊은 친구 4명이
봅슬레이라는 동계 스포츠에 도전하여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다.
이 팀의 코치를 맡은 '어빙 블리처'는 오래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나
부정행위가 발각되어 실격당한 후 업계에서 퇴출된 인물이었다.
자마이칸 팀은 우여곡절 끝에 참가한 올림픽에서 예상외의 선전을 하게 되었고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마지막 게임을 준비하게 되는데
게임 바로 전 날 코치의 과거 부정행위에 대해 우연히 듣게 된다.
팀은 큰 충격에 빠졌고,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코치에게 가서 따져 물었다.
"코치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대답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대답을 꼭 듣고 싶긴 하지만... 대답 안 하신다고 해도 이해합니다..."
"내가 왜 부정행위를 했는지 알고 싶은 거지?"
"네. 맞아요."
"음... 좋은 질문이네. 대답은 간단해. 난 이겨야 했기 때문이야.
난 인생에서 계속 이겨왔어. 그걸 지키려면 계속 이겨야 하는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니 모르겠어요. 코치님은 2개의 금메달이 있잖아요. 이미 모두 가졌다고요."
"그래 맞아. 금메달은 근사한 거야. 하지만...
네가 금메달이 없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넌 금메달이 있더라도 충분하지 않을 거야."
"코치님, 그러면 제가 충분한지 어떻게 알 수 있죠?"
"오 그건... 네가 결승점을 통과할 때, 그때 알게 될 거야."
잠깐 스쳐 지나가는 대화였지만 큰 깨달음이 있었다.
금메달은 1등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지만
내가 그 자격이 있는지는 경기를 마치는 순간 스스로 알 수 있다.
아무리 운 좋게 금메달을 목에 걸었어도
나 스스로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최고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최선을 다했고 세계 최고의 실력을 갖추었다고 믿는다면
설령 금메달이 없더라도 난 여전히 최고인 것이다.
스스로에게 솔직할 때 이미 우리는 알 수 있다.
충분한지 아닌지...
고등학교 3학년 때 난 학교 앞에서 하숙을 했다.
스쿨버스로 3시간씩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학교에서 3분 거리에 방을 구했다.
아침에 학교를 갔다가 밤에 야자 후 돌아오면
바로 또 집 앞 독서실에 가서 거의 매일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했다.
다음 날 새벽 6시에 왕십리에 있는 수학 학원에 갔다가 바로 등교를 했다.
1년 내내 잠을 하루 2~3시간 정도밖에 못 자면서 나름 최선을 다했다.
몸이 힘들고 지칠수록 오히려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도 모의고사를 보면 성적이 충분치 않았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되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결국 시험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은 내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넌 최선을 다했다고...
더 이상 열심히 할 수 없을 만큼 노력했으니 그저 운이 나빴던 거라고...
따뜻한 위로의 말들이 진심 고마웠지만 정작 내 맘은 편치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는 합격할 실력이 안된다는 걸...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버텼던 것 같다.
내심 요행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 자신을 속인 것 같아서 비겁하다 느껴졌다.
어린 나이에 그 아픈 경험을 통해 소중한 걸 깨닫게 되었다.
다시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겠다고,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큰 아들 태인이가 어느새 그 나이가 되었다.
고3.
실용음악과에 지원하기 위해 작곡 전공 입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엄마 아빠 모두 그 분야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보니
부로모서 지원해 줄 수 있는 데 한계가 많다.
그저 아들이 스스로 잘 해내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입시 준비는 대치동의 전문 실용음악 학원에 다니며 도움을 받기로 했다.
학교 끝나고 지하철로 한 시간 이상씩 가서 수업하고, 연습하고
거의 매일 밤 11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온다.
고3이니까 그 정도는 감내해야지라고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몸이 너무 고단하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루는 근처에서 저녁 모임을 마치고 시간이 대략 맞아서
학원 아래서 기다렸다가 태인이를 픽업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태인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화 Cool Runnings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 고3 때의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태인아, 네가 매일 지하철 타고 학원 가서 레슨 받고,
또 집에서 연습하고 숙제하고 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거 아빠도 잘 알아.
힘들고, 피곤하고, 스트레스받고...
그래도 항상 불평 없이 밝게 지내는 거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태인아,
네가 지금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그 목적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네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네가 되고 싶은 모습이 뭔지...
그리고 지금처럼 하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지...
이 정도면 충분한지...
네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너는 알고 있다.
솔직한 네 마음은 이미 알고 있어.
매일 레슨이다, 숙제다 하며 바쁘게 지내다 보면
네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느낌에 시간이 금세 흘러가기도 하거든.
부족하다고 느끼더라도 할 일이 많으니 무심히 시간을 보내기도 하거든.
그런데 기억해라.
성패는 네가 얼마나 수고했는가가 아니라
네 실력이 충분한가 아닌가로 결정 난다.
실력이 충분하지 않은 걸 스스로 알고 있는데도
'이 정도면 수고하고 있으니 괜찮아'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빠가 고3 때 그랬던 것처럼...
네 수고가 네 성공을 좀 먹지 않게..."
무던한 성격의 태인이한테는 조금 가혹하게 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 날 내가 했던 실수를 미리 알려주고 싶었다.
태인이도 미리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랐다.
인생을 당당히 마주하길 바랐다.
인생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꿈과 성공을 위한 것이어야지
애초부터 졌잘싸를 위한 것이면 안된다
충분하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수고스러운 자신 뒤에 숨으면 안 된다.
미래의 실패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미리 준비하는 것일 뿐이다.
스스로에게 당당하라.
수고가 성공을 좀먹게 두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