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Happiness is not a station you arrive at, but a manner of traveling." (Margaret Lee Runbeck)
순간 나는 확증적으로 췌장암 말기 환자가 되었다.
아주 오래전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보고 있으면 금세 마음의 공명상자가 건드려지는 TV 광고가 있었다.
한 아빠가 어린 아들과 단둘이 야구장에 갔다.
2장의 야구장 티켓은 $28.
2개의 핫도그, 팝콘, 콜라는 $18.
1개의 싸인볼은 $45.
11살 아들과의 행복한 대화는... Priceless (가치를 매길 수 없음).
There are some things money can't buy. (세상에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For everything else, there's mastercard. (그것만 빼면 모두 Mastercard로 살 수 있다.)
(https://youtu.be/Q_6stXKGuHo?si=7T_ff9c4F_VffoUW)
따뜻한 광고였다.
그 광고를 볼 때마다 어릴 적 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아마 내가 7살이나 8살 정도였던 것 같다.
추운 겨울에 아버지와 나, 남동생 셋이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갔다.
어디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엄청 많은 곳을 걸어 다녔는데
아빠가 신발가게에 들어가서 우리에게 신발을 사주셨다.
동생이랑 나에게 똑같은 축구화를 한 켤레씩 사주셨는데
흔한 검은색이 아니라 밤색 월드컵 축구화라서 너무 맘에 들었다.
그때 마침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는데
신발가게 아저씨가 발목까지 올라오는 털구두도 권하셨다.
웬일인지 아빠가 그 털구두까지 한 켤레씩 또 사주시는 거였다.
하루에 신발 두 켤레를 산 건 난생처음이었다.
동생과 나는 양손에 신발을 들고 부지런히 아빠를 따라다녔는데
아빠가 시내의 극장에서 성룡의 취권을 보여주겠다고 하셨다.
너무 재밌을 것 같아서 동생과 나는 신나 했다.
그런데 매표소에서 우리가 너무 어려서 티켓을 팔 수 없다고 하셨다.
아빠는 아이들이 기대하고 왔는데 한 번만 봐달라고 계속 부탁하셨지만
그 매표소 아저씨는 끝까지 안된다고 하셨다.
어린 마음에 내가 아빠한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는 대신 건너편 극장에서 하는 장훈 야구영화를 보자고 하셨다.
취권이 보고 싶었지만 그냥 야구 영화가 더 좋다고 말했다.
그렇게 장훈 영화를 보았는데 내용이 좀 슬펐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난 후 버스를 타고 신림동 집으로 돌아오는데 너무 졸렸다.
하지만 아빠 혼자 우리 둘을 안을 수 없는 걸 알기에 꾸벅꾸벅 졸면서 버텼다.
졸다가 고개 들어보면 버스 차창 밖으로 눈발이 펑펑 날리고 있었다.
그 겨울밤, 얼굴과 발이 꽁꽁 얼어붙을 만큼 추웠지만
아빠와 처음 극장에서 영화도 보고, 새 신발도 두 켤레나 생긴 최고의 밤이었다.
It was priceless.
광고를 볼 때마다 그 겨울밤이 생각났다.
마음이 뭉클해져서 한국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고 싶어졌다.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고 따뜻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내게 그런 행복감을 주는데 30초면 충분했다.
예전에 회사 동료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갔다.
췌장암인데 불과 몇 달 전 해외여행까지 다녀오실 만큼 건강하셨다고 했다.
갑자기 돌아가셔서 너무 황망해했다.
아직 젊은 친구라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몰랐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췌장암이라는 게 그랬다.
병에 걸려도 자각 증세가 잘 나타나지 않는 게 특징이라고 했다.
기껏해야 체중이 급감하거나 가끔 복부 또는 등에 통증이 나타나는 게 전부이고
그나마 그런 증상을 느꼈을 때는 말기인 경우가 많아서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손쓸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래서 췌장암은 '죽음의 암'으로 불린다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그 당시에 이유 없이 내 체중이 급격히 줄었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운동을 하거나 다이어트를 따로 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세 달 사이에 체중이 8kg 줄고 허리 사이즈도 2인치가 줄었다.
프로젝트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겠지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가끔 명치끝이 아프고 잘 때 등도 좀 아팠던 것 같았다.
회사에서도 가끔 신물 넘어오는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하긴 8kg이 갑자기 빠지는 건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지.
기분이 점점 찜찜해졌다.
몇 년 전 큰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 우리 집은 가족력도 있었구나.
설마, 작년 건강검진에서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괜찮겠지 하다가도
회사 동료의 아버지도 건강검진 때는 문제가 없었다고 했는데...
두 달 뒤 예약된 건감검진을 취소하고 내일이라도 병원에 가봐야 하나?
혹시라도 잘 못된 결과가 나오면 어쩌지?
아직 우리 애들이 어린데 미안해서 어쩌지?
부모님께는 최송 해서 도대체 뭐라고 말하지?
한번 의심의 꼬리를 물자 생각은 불길함 속으로 폭주했다.
비극적 시나리오로 방향을 잡은 나의 머리는
나를 췌장암에 걸려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는 40대 가장으로 만들었다.
1분도 안 돼서 이미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건강검진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과체중이었던 게 정상 체중으로 들어왔으니
음식 조절과 규칙적인 운동으로 계속 유지를 하라는 의례적인 피드백이 다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괜한 걱정을 했던 게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마음은 내 생각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다.
행복한 생각이든 불행한 생각이든 마음은 늘 온전히 내 편이 되어 준다.
마음은 정말 부지런해서
방향을 정해주기만 하면 순식간에 저 멀리 달려가서 나를 기다린다.
무의식 중에 힌트만 얼핏 던져주었을 뿐인데
순간 살을 더하고 근거를 만들어서 네 생각이 맞다고 나를 지지해 준다.
세상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매일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 24시간.
그걸 무엇으로 채우는가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 여정이 행복했는가 불행했는가는 내 마음이 정한다.
나는 생각의 방향을 정하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마음이 다한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행복이라는 호롱불을 들고 빛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빛은 우리 손에 들려 있었다.
행복은 선택이다.
아침에 눈을 떠 창문 틈으로 환한 햇살이 비추면
기지개 한번 크게 켜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로 한다.
오늘은 왠지 정말 좋은 날이 될 거라고
목소리 높여 함박웃음으로 주문을 외워 보기로 한다.
반복되는 피곤한 일상 속 나른한 오후가 찾아와도
커피 한잔의 향기와 여유에 감사하기로 한다.
온종일 치열한 싸움 끝내고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오는 밤길에도
기대치 않게 날아온 메시지 하나에 빙긋이 웃어 보기로 한다.
세상이 날 배신하여 오랜 믿음이 어이없이 무너져도
여전히 내 어깨를 토닥거리는 사람 있음에 기분 좋아버리기로 한다.
내 맘대로 되지 않아 속상하고 때론 몸까지 아파 서러워도
얼굴 묻고 엉엉 울 가슴 빌려줄 이 있음에 감동하기로 한다.
가슴을 활짝 펴고 높은 곳을 주시하며
원형 경기장에 들어서는 막시무스처럼 당당하게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로 한다.
나의 행복으로 인해 즐거워할 이유를 얻을 누군가를 위해
최선을 다해 내가 먼저 행복하기로 한다.
하루하루 그렇게 나
먼저 행복해하며 기다리기로 한다.
참을성 있게 나
먼저 행복해하기로 한다.
행복은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