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In a universe of ambiguity, this kind of certainty comes only once, and never again, no matter how many lifetimes you live." (『The Bridges of Madison County』中에서)
그날의 우연적인 사건은 우리의 만남을 필연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내와 나는 소개팅으로 만났다.
어느 화창한 봄날 토요일 오후, 강남역의 일마레에서 약속을 잡았다.
시티극장 앞에 미리 도착해 주변을 걷다가 10분 전에 일마레 입구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문자를 보냈다.
"혹시 어디세요? 전 입구 바로 앞에 앉아 있어요."
"아 저도 거의 다 왔어요. 1분 내 도착이에요."
잠시 후 그녀가 헐레벌떡 들어왔고, 나는 일어서서 꾸벅 인사를 했다.
"늦었죠? 죄송해요."
"아니요. 전혀요. 시간 딱 맞춰서 오셨는데요. ㅎㅎ"
서빙 보시는 분이 자리를 안내해 주셨고,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파스타를 주문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네 저도 반가워요. ㅎㅎ"
"어제 회사에서 산행 가셨었다고 들었는데 피곤하진 않으세요?"
"네? 아 산행은 아니고... 그냥 친구들과 놀았는데..."
"아 그래요? 제가 잘 못 들었나 봐요. ㅎㅎ"
"집이 영등포 쪽이라고 하시던데 강남쪽은 자주 나오시나 봐요."
"네? 아니 저는 집이 교대 쪽이에요. 회사 버스를 강남역에서 타니까 거의 매일 나오죠."
"아... 제가 잘 못 알았네요."
말이 잘 안 맞는다 생각이 들 무렵, 갑자기 그녀에게 전화가 울렸다.
뭔가 짧게 통화를 하더니 그녀가 얼굴이 굳은 채로 벌떡 일어섰다.
"헛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순간 멍해졌다.
'어 이게 지금 뭐지? 아... 파스타...'
나는 서빙 보시는 분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주문을 취소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나도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소개팅은 그렇게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일마레 문을 나서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박XX씨 맞으신가요? 혹시 지금 어디세요?"
"아 제가 지금 일마레 앞인데 어디세요?"
"저는 지금 시티극장 앞에 있어요. 제가 그쪽으로 올라갈게요."
"아 네. 저는 그레이색 바지에 검은색 남방을 입고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곧 뵈어요."
그렇게 우리는 시티극장 옆 언덕 골목 중간쯤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내려가고 있었고 그녀는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조금 전 상황이 떠올라 나도 몰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도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우리가 기억하는 서로의 첫인상이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좀 늦어서 죄송해요. 제가 시간을 맞춰서 가긴 했는데요.
들어가는데 입구에 다른 분이 앉아계셔서 착각하고 그 분과 테이블에 앉았지 뭐예요.
몇 마디 말을 해보니 그분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죄송해요 하고는 나와서
시티극장까지 다시 내려온 거였어요. 너무 웃기죠? ㅎㅎㅎ"
헉. 레알?
알고 보니 강남역 일마레의 입구가 두 개였다.
우연히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소개팅을 잡았던 또 한 쌍의 남녀가
우리와 각각 크로스로 만나 서로 잠시 엇갈린 테이블에 앉았다가
뭔가 잘 못된 것을 눈치채고는 놀라 헤어졌다.
나와 1분간 만났던 그녀는 원래 아내와 1분간 만났던 그 남자를 만났어야 했던 것이다.
라디오 여성시대의 사연에서나 나올법한 일이 그렇게 우리에게 벌어졌다.
그리고 그날 그 우연적인 사건은
우리의 만남이 필연적이라고 느끼게 만들었다.
그렇게 만나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결혼을 하게 되고, 어느새 두 아이가 생기고
여느 연인처럼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게 되었다.
10주년이 되던 날, 우리는 다시 그 강남역 일마레에 갔다.
이젠 둘이 아닌 넷이었다.
큰 아이가 고른 블루베리피자와 게살파스타를 시켜 늦은 점심 식사를 했다.
레드와인 한잔을 시켜 나누어 마시며
미국에 있을 때 갔었던 Mondavi 와이너리를 이야기했고
두 아들에겐 빛, 향, 맛 3단계로 와인을 즐기는 법을 알려 주었다.
엄마 아빠가 여기서 처음 어떻게 만났는지도 이야기해 주었고
아이들은 옆에 소개팅을 하는 커플들을 훔쳐보며 미소 짓기도 했다.
돌아오던 길에 엄마에게 10주년 선물을 사주려고 Zara에 들렀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에게 스웨터 하나씩을 사주었고
그다음 주에 개학을 하는 아이들의 옷만 잔뜩 사서 나왔다.
그리고는 서초동에 있는 부모님 댁에 가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아이들은 Wii 볼링게임을 실컷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둘째 아들은 늘 그랬듯 잠이 들었고
큰 아들은 끝까지 잠을 참고 버텨서 아파트로 혼자 씩씩하게 걸어 올라갔다.
이 녀석은 엄마, 아빠가 많은 짐을 챙겨 들고서
잠든 두 아들을 안고 집에 올라가기 어렵다는 걸 안다.
그 속을 아는 아빠는 고맙다며 큰 아들에게 뽀뽀를 해주었다.
잠자리에 든 아들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해주었고
아빠의 기도가 끝나자 아들은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리고는 자기 전 나는 손수 쓴 편지를 아내에게 건넸다.
그렇게 10주년을 기념하는 하루가 갔다.
감사한 하루였다.
엄마 아빠가 처음으로 만났던 강남역 일마레에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이야기해 주고 축하를 받는 것은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감동적이었다.
그런 소소한 감동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
결국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표현은 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 사랑한다면 어떻게든 보인다.
사랑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한다.
그 사람을 위해 나를 기꺼이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만든다.
사랑은 그 사람을 위해 나를 더 강한 사람이 되게 한다.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께 무릎을 꿇어야 하더라도,
비웃는 사람들 앞에 벌거벗고 거리를 뛰어다녀야 하더라도,
원수의 가랑이를 기어서 지나가야 하더라도,
가슴 깊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은 없다.
정말 중요한 것 앞에선
덜 중요한 것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십 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돌아보면 어제인 듯 기억에 선하고
뻗히면 손에 닿을 듯 가깝습니다.
그 순간 어떤 느낌이었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솜털이 서던 그 느낌까지 생생합니다.
하지만 문득 다시 돌아보면
십 년은 참 오랜 세월입니다.
너무나도 다르게 자라온 두 사람이 어느새
서로를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취향을 강요하지 않는 법을 알게 되었고
욕심을 버려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둘이었던 우리가 어느새 넷이 되어
부모님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더 좋은 아들, 딸이 되고 싶어 졌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당신이
캐러멜이 많이 묻은 팝콘을 골라서 건네준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가끔 일 이야기를 했을 때 내 기를 살려주려고
나보다 2배 3배 펄펄 뛰며 내 말에 동의해 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늦은 밤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한 내게
리모컨을 건네주며 일부러 말없이 자리를 비켜주는 것도 알고 있지요.
그 모든 게 참 고맙습니다.
좋은 사람은
나를 성숙하게 하고 나를 자라게 합니다.
그대가 그랬습니다.
나 또한 그대에게 그러하겠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십 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할 시간을 생각하면
지난 십 년은 찰나와 같을지도 몰라요.
남은 시간에 감사합니다.
그대여서 고맙습니다.
십 주년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