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May your choices reflect your hopes, not your fears." (Nelson Mandela)
오랫동안 걸어온 길을 멈추려할 때 천 번을 망설였다.
현대글로비스에서 사업부장을 맡았을 때 몇 가지 의사결정을 했다.
뭔가를 되게 만드는 Go 의사결정도 있었지만
흐지부지하게 미뤄지고 있는 것들을 Drop 하는 No-Go 의사결정도 있었다.
그중의 하나는 공항 로봇 자율주차 과제였다.
이 건은 글로비스에서 진행 중인 몇 안 되는 미래적인 기술 과제였다.
사장님께서 공항공사 사장님과 직접 MOU를 맺은 관심 과제이기도 했고
당시 연구소에서 주요 과제 중 하나로 진행하던 과제였다.
하지만 거의 1년이 다 되도록 지지부진하고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사장님은 계속 빨리 진행하라고 Push를 하셨고
연구소는 매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은 했으나 진척은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연구소장을 겸임하게 되면서 이 과제를 가장 먼저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공항공사를 방문하여 그쪽 본부장을 만났다.
내부 보고에서 듣던 것과는 이야기가 많이 달랐다.
공항공사는 우리 로봇이 자율주차 서비스를 하는데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비스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보면, 매우 까다로운 B2C 고객들이
현재 기술 수준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클레임을 걸 위험이 매우 높다고 보았다.
하지만 글로비스와 MOU 맺으며 약속한 게 있기 때문에 강력히 반대는 못하고
글로비스가 정 원한다면
소규모 테스트라도 할 수 있게 주차장 일부 장소는 빌려주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사장님과 재경부서는 우리가 그 테스트 비용을 다 댈 수 없으니
공항공사에서 최소한 절반의 비용을 받아오라는 지시였다.
테스트를 위해 공항 주차장의 바닥 보강 공사, 카메라들이 설치된 검사 공간 등
인프라 투자 등에 들어가는 비용이니 그쪽에서 내는 게 맞다는 논리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건 의지가 있다는 전제 하에 가능했다.
당시 공항공사 입장의 온도를 감안하면
그쪽에 비용을 전가하는 건 그냥 과제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와 같았다.
양쪽의 온도차이를 알면서도 내부의 Push가 크다 보니
담당 팀장이 차마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 보려고 계속 들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고심에 빠졌다.
아닌 걸 알면서 계속 부딪쳐 보면서 뭔가 열심히 하는 척을 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실체를 보고 드리고 끊고 갈 것인가.
답은 나와 있었다.
사장님 방에 직접 올라갔다.
"사장님, 제가 어제 공항공사에 다녀왔습니다."
"어 그래? 뭐라카드노?"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쪽에서는 이 과제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고?"
"그쪽은 저희 주차 로봇의 기술 수준이 매우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실제 고객 대상 서비스를 하면 수많은 클레임이 나올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어요.
오랜 서비스 운영 경험을 기반으로 판단한 거라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장님들 간 MOU건도 있고 하니 글로비스가 꼭 테스트를 해야겠다고 한다면
일부 공간은 빌려주겠다는 입장인데 크게 기대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절반의 비용을 부담하라고 요청하는 건 전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이 과제는 여기서 Drop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실제 서비스도 아니고 몇 달간 한시적으로 1~200명 대상 테스트를 해보자는 건데
17억 이상의 비용을 우리가 혼자 투자하여 바닥과 벽체 공사까지 하는 건 오버인 것 같습니다.
테스트 결과에 따라 큰 사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제가 봐도 테스트로 끝나고 의미 없는 투자로 남을 가능성이 너무 높습니다.
사장님이 오케이 해주시면 문제 되지 않게 그쪽에는 제가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박상무, 난 한번 한다고 했다가 또 안된다고 하고... 그런 거 제일 싫어한데이.
어려워도 한번 하겠다고 한 건 어떻게든 되게 만들 생각을 해야지... 어?
이 세상에 쉽게 되는 게 어디 하나라도 있드나?"
"네 사장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 생각엔 이 과제가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음... 알았다. 그래 그럼,
그쪽에서도 문제 되지 않게 깔끔하게 잘 마무리하고...
그 대신 나중에 이런 자동주차 사업을 다른 회사가 먼저 했다는 뉴스 나오면
그때는 니 내한테 죽는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이 과제를 끝내더라도 관련 기술은 계속 모니터링하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첫 번째 Drop이었다.
그 이후도 몇 번의 유사한 의사결정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로 도심 근교 자동화 창고 과제가 있었다.
물류회사로서 자체 창고에 대한 투자 없이 사업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고
특히 Last Mile 배송을 신사업으로 추진하는 입장에서는
당일 배송, 익일 배송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했는데
이를 위해 서울 근교에 자동화 창고 최소 2개 이상을 확보해 보자는 게 아이디어였다.
전략적으로는 가야 할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일단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규모의 창고를 찾기가 어려웠을뿐더러
화주사가 없는 상태에서 필요한 수백억 원의 선투자 규모도 비현실적이었다.
재경을 포함한 유관 부서를 통과할 확률이 제로처럼 느껴졌다.
자동화를 위해 파트너로서 솔루션을 검토했던 "Ocardo"는 오히려
우리 창고의 규모가 너무 작다고 결국 거절을 했다.
해당 부서 멤버들은 오랫동안 이를 위해 열심히 뛰었지만
현실적인 벽을 체감하고 다들 기가 꺾여 있었다.
내가 면담을 했을 때는 이미 다들 스스로 안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내겠다, 제발 좀 기회를 달라'라고 해도 될까 말까인데
추진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이런 상황이면 희망고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멤버들에게 그동안 수고했다고, 이쯤에서 이 과제는 Drop 하자고 했다.
멤버들은 오히려 홀가분해했고
좋은 리소스들을 Free up 하여 다른 과제에 투입할 수 있었다.
두 번째 Drop이었다.
그리고 또 거의 3년을 끌어온 평택 물류센터 건축 과제도 있었다.
평택에 자사의 부지가 있어서 거기에 물류센터를 만들자고 시작되었는데
실제로 큰 건축이 수반되는 프로젝트이다 보니
사업성 검증부터 건축을 위한 컨설팅, 설계, 위험성 평가 등
수많은 프로세스들을 진행해야 했다.
우선순위에서 밀린 건지 어쩐 건지 시간이 너무 오래 소요되었다.
내가 사업부장이 된 후 이 과제라도 최우선적으로 처리를 하려고 들여다보니
그동안 컨설팅을 받았을 때와는 상황이 매우 달라져 있었다.
처음 이 과제 발의 당시에는
시중에 센터도 매우 부족하고 건설비도 그리 높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 3년 사이에 물류센터 업계의 상황이 180도 바뀌어 있었다.
시멘트 값을 비롯하여 모든 자재들이 크게 올라 있었고
우리가 컨설팅을 받으며 따져 놓았던 건축 비용은 그 사이에 수십억이 올라서
아무리 바꿔봐도 손익을 맞추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반면, 업계 상황이 그러다 보니 오히려 외부에서는
건축 허가만 받고 추가 진행에 난항을 겪고 있는 부동산 개발사들이 늘어나서
우리는 훨씬 유리한 조건에 주변 센터들을 임대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모든 조건이 변했는데
원래 하려고 하던 과제라는 이유만으로 계속 진행하는 게 맞을까?
고민 끝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실장을 불러서 말했다.
"실장님, 아무리 오래 끌고 왔더라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처음 기획했을 때와 모든 게 다 바뀌었는데 어떻게 모른척하고 그냥 갑니까?
내가 사장님께 Drop 하겠다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동안의 Sunken Cost는 잊어버리시고...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냐 궁금해하실 테니 대안도 준비해 봅시다.
그래야 보고할 수 있어요. 서둘러 주세요."
그렇게 또 한 과제를 날렸다.
돌아보면 이유는 제 각각이었다.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거의 불가능해진 경우도 있었고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이 없어 의지가 사라져버린 경우도 있었으며
그간 환경이 바뀌어 안 하는 게 오히려 낳은 경우도 있었다.
그 이유가 뭐든
회사 입장에서 내가 믿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어딘가가 다다를 수 있다는 소망으로 견디며 한참을 걸어왔는데
이제는 그만두어야 한다고 느껴질 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이 들 때
막막하고, 불안하고, 쓸쓸하고, 억울하고, 주저앉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백만 가지 감정이 요동을 쳤다.
신사업을 잘해보라고 사업부장을 시켜놨더니
이 건 이래서 안된다, 저 건 저래서 안된다... 무슨 계속 안된다고만 하느냐
비난을 받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것들이 두려워서
스스로 아니라고 믿는 일을 계속 열심히 하는 척할 수는 없었다.
나 자신에게 그랬고,
함께 하고 있는 우리 팀에게 더욱 그랬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불확실한 것들을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마음도 큰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지금껏 철석같이 믿고 영혼을 담아 해오던 것들을 멈추어야 할 때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습관처럼 각인된 관성을 이기고
오랜 기대를 깨부숴야 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뭔가를 해내는 것도 소중한 성과지만
정말 아니라면 중간에 멈추는 것도 못지않은 성과다.
그만둘 결심.
그 용기는 진정성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