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쾅쾅쾅’ 누군가 거세게 문을 내려친다.
사람의 심장을 직접 두들기는 충격이 적막을 깨고, 앙상한 나무 뼈대가 울리며 뒤틀리는 신음을 냈다. 남자는 새삼스레 집안을 둘러본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정성스레 채운 공간이 아직도 이리 텅 비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어두운 통로로 또 다른 남자가 들이닥쳤다. 집안의 남자는 불쾌했다. 함부로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저 하찮은 수컷의 면상이 건방져 보였다. 이제는 자신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어깨를 움츠러뜨리지도 않았다. 혀를 날름거리며 입 주변으로 침을 발라대는 꼴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네놈이 어디까지 방자할 수 있는지 보자.’ 남자가 침을 꼴깍 삼켰고, 침입자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아까부터 바깥이 소란스러운데, 장로께서는 이리도 태연히 계시다뇨. 얼른 사람들을 모아야 합니다.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지만 결코 심상치 않습니다. 날카로운 위험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어요. 그러나 이걸 잘 넘긴다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서 함께 가시지요.”
잠자코 듣고 있던 남자는 빈정거리는 웃음을 과하게 지었다.
“우리? 어딜 함부로 같은 급으로 올라서는 거냐. 이 더럽고 천박한 놈아. 바짝 엎드리는 재주가 가여워 먹고살게 해 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제 입으로 들어가서는 안 될 것까지 양껏 쳐 넣었나. 어디 그 더러운 살집을 허락도 구하지 않고 내 집안으로 들여놔. 네 놈이 잊고 있던 너와 나의 차이를 기억나게 해 줘야겠구나.”
남자는 의자를 뒤로 젖히며 일어섰다. 콧등을 잔뜩 찡그리고 으르렁대면서 표정에 걸맞은 험악한 말을 마구 쏟아냈다. 듣고 있던 남자는 순간 당황했지만, 그도 절대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아니, 이고르 장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술이라도 취했소? 아니면 너무 급박한 상황에 정신 줄이라도 놔 버린 거요? 헛소리를 하려거든 곱게 하시오. 모래뿐인 땅에서 들짐승처럼 떠돌다가 이 땅에 털 날리는 몸뚱이만 가져온 당신들이, 칼질 몇 번에 대지의 진정한 주인들을 깔보다니. 오만방자한 이방인이야 말로 망각한 진실을 깨달을 때가 왔나 보구려.”
긴장감이 흐르는 와중에도 남자는 혀를 능수능란하게 놀렸다. 마치 평소 그를 바라보던 속마음이 드러난 것처럼. 시비를 건 남자는 머리가 쭈뼛 올라섰다. '이 놈 또한 오늘 밤 내 심기를 건드는 놈 중 하나구나.' 무자비한 잔혹함이 한 구석에 자리 잡았던 자비를 몰아냈다. 그는 조용히 송곳니를 꺼내 들었다.
“그래. 네 놈이 자신의 잘못과 거만함을 뉘우칠 놈이었다면, 이 지경까지 이르지도 않았겠지. 괜찮다. 나도 가장 손쉬운 이 방법을 선호하니까.”
별안간 남자는 송곳니를 비스듬히 세우고 뱀 같은 남자의 목덜미로 달려들었다. 손쉽다는 말에 누구나 수긍할 정도로 늑대 같은 남자는 상대를 와락 껴안은 채로 마구 뒤흔들며 송곳니를 여러 차례 내리꽂았다. 목을 내준 남자는 이미 살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짐승의 싸움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생명력이 지독한 뱀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광기 어린 짐승은 오랜만에 맛본 피에 취하여 울부짖었다. 백작의 환영들과 사무엘이 뒤늦게 도착했다. 가장 흉포한 이 짐승을 상대하려면 아무리 뛰어난 검술가라도 각오를 단단히 가져야 했다. 여자는 사무엘의 팔목을 잡아 뒤로 물러났다.
‘하얀 남자는 한달음에 달려드는 괴물의 광분에 부드러움과 침착함으로 맞섰다. 그는 우아한 몸짓으로 칼을 몸통과 평행하게 만들어 뒤로 빼었다가 정면으로 과감히 찔렀다. 아뿔싸, 칼에 관하여 문외한인 내가 봐도 상대의 몸통이 단박에 꿰뚫렸을 군더더기 없는 행위 였거늘. 맞은편에서 달려드는 건 인간의 몸짓보다 변화무쌍했다. 그 자는 또 다른 손에 들려있던 송곳니로 뻗어 나오는 칼을 흘렸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짐승의 어깨도 칼날에 의해 선으로 깊이 파였다. 하지만 그보다 치명적인 송곳니가 백작의 오른쪽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한 번, 두 번, 백작은 자신을 파고드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칼을 비스듬히 세워 상대의 목으로 가져다 댔지만 힘이 부족했다. 절망적인 상황임을 알아차린 찰나, 짐승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푸른 달빛에 비친 그의 가슴에 검은 얼룩이 이미 여기저기 크게 번져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작은 점들이었으나 종이에 떨어진 잉크처럼 삽시간에 퍼져나간 것이다. 백작의 솜씨는 아니었다. 하얀 남자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늑대의 목을 몸통에서 떨궈냈다.’
그는 온몸을 바르르 떨며 내게 말했다.
“메로빙 장로에게 가주게. 오늘 최후를 맞이한 이들에 대해 소상히 일러주게나. 그리고 다음 일은 알아서 해 달라고 전달해 주게. 부탁함세.”
말미에는 이를 딱딱 부딪치는 소리마저 들렸다. 다행히 하얀 여자가 그를 부축하였기에 나는 그에 말에 따라 이 마을의 첫 번째 장로에게 향했다.
나는 그의 집 앞에 들어섰고, 현명하게 늙은 자는 문 앞에 마중 나와 있었다. 그는 나 혼자 왔음을 확인하고 서두르지 않으며 나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의 집에 들어선 건 처음이었다. 노부부가 겨우 부대끼며 살아갈 만한 크기가 펼쳐져있다. 마룻바닥에서 삐거덕 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장로는 창가 옆 작은 탁자에 놓인 두 개의 의자 중 하나에 앉았고 내겐 맞은편 의자로 손짓했다. 나는 숨도 고를 겸 밤새 지워진 내 무게를 의자에 완전히 내려놨다. 자애로운 표정의 노인은 내게 안도의 시간을 나눠줬다.
“마을의 광대, 아니 백작, 아니 백작의 후손이 당신에게 가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푸른 달빛아래에서 이미 죽어가는 헨데에게 부탁받아 또 다른 행정관의 집에 쳐들어 갔습니다. 하얀 남자는 그곳에서 여덟 명의 인간을 살해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나이 든 행정관과 두 명의 장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다음으로 들어간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고르 장로의 집으로 가니 이미 게라드는 시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하얀 남자는 상처를 입었지만 결국 늑대의 형상을 한 마지막 남자를 처단했습니다.”
노인은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그간 보이지 않았던 큰 반응이었다.
“그리고 당신에게 다음 일을 알아서 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노인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고맙네, 여기까지 그 말을 전하러 와줘서.”
나는 내심 이 어질고 선한 인물로 말미암아 우리가 겪고 있는 잔혹한 폭풍이 누그러지리라 기대했다. 능히 그럴 자격이 있는 이가 겸양마저 갖춘 탓에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도록 이 시간, 이 마을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그의 고귀함과 대단한 위치를 추켜올리고 싶었다.
“광대가 이야기한 것처럼, 지금 이 혼란스러운 사태를 지혜롭게 이끄실 분은 오직 장로님뿐입니다. 부디.”
“어리석은 놈이 아무것도 모르고 지껄여 대는구나. 누가 그 간악한 놈의 자손이 아니랄까 봐.”
뭉툭한 쇠망치가 내 목덜미에 사정없이 떨어지고, 얼음이 심장을 감쌌다. 생각과 말이 멈췄다.
“미치광이 백작과 네놈 할아버지의 사악한 꾀가 우릴 이 지옥에 가둔 거야. 그때는 우리가 그들의 악함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지. 하지만 시간이 흘러 우리의 악의가 그들의 후손이 맞서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을 뿐이야. 누가 제깟 놈들을 불쌍히 여기고, 이제와 우리가 했던 짓들을 후회할 줄 알았느냐?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무릎이라도 꿇고 잘못했다고 할 줄 안게야? 침을 뱉어주마 이 더럽고 남에게 해만 끼치는 족속들아. 너희들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런 고통 속에 살지는 않았을 거야.”
메마른 입에서 모으고 모은 걸쭉한 것이 내 얼굴로 달라붙었다. 그제야 난 정신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말을 내뱉어야 할지 몰랐다.
“썩 꺼져. 네놈들에게 해줄 말은 그것뿐이야. 제발,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나자. 이 마을도 여기에 사는 모든 인간도 지상에서 사라져 더 이상 세상에 어떤 해악도 남기지 말자. 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제 그만 사라져라.”
악에 받친 그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리는데도 침대에 누운 노부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대꾸할 말도 행동도 찾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울상이 되어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데 증오가 서려있었다. 입은 사납고 독살스럽게 웃고 있었다. 미처 어느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올바르고 착하고 도덕적 기준이 될 만한 어른이라 생각했던 자의 참모습이 가히 놀라웠다. 나는 그를 등지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늙은이는 낑낑대며 의자인지 테이블인지를 옮겼다. 문에 손을 가져대 댔지만 잠시 기다렸다. 뭔가가 천장으로 휘릭 감겼다 내려오고 팽팽한 장력이 두어 번 튕겨졌다. 이내 나무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단말마가 짧게 들렸다. 곧이어 기괴한 냄새가 풍기기에 나는 바깥으로 얼른 뛰쳐나왔다. 그 모진 시간을 보냈는데도 여전히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