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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거짓에 바래진 희망, 반성, 희생, 각오

by 고전을 마시다

여인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말을 꺼냈다. 강당의 기온은 확연히 상승했고, 나의 피로는 절정에 다다랐다.

은은한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갖은 애를 썼다. 경건한 마음이 깃든 마냥 잠시 눈을 감으며 오만상을 찌푸려도 봤고, 허벅지를 꼬집기도 했다. 돌연 눈앞에 전날 날 꿈속 세계로 데려간 아지랑이가 나타났다. 그 오묘한 현상의 위력을 체감한 바 있었기에, 이번에 난 부질없는 짓은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불가항력의 기운에 굴복하여 정신과 육체를 맡겼다. 그 무한한 힘은 한 점을 향해 집요하게 파고들더니 공간을 왜곡해 나갔다. 점의 종착지는 곧 움푹 파인 것처럼 깊이 함몰되고 그곳으로 세상은 빨려 들어갔다. 나와 그녀의 감정, 그녀의 기억, 그리움, 나의 시각과 청각, 사고가 앞장섰다. 뒤이어 그 공간에 자리 잡은 것들이 모조리 휘말렸다. 아득히 몽환적인 그곳에서 우린 붕괴됐다가 길쭉해지고 분열됐으며, 다시 꼬이고 섞이고 융화하고 화합했다.


남자는 어디엔가 엉덩이를 반쯤 걸쳐있다. 과거의 굴레에 다시는 짓눌리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같은 하늘 아래 피의 인연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싶었다. 천체를 떠받치는 죄인의 어깨가 감당할 무게는 어느덧 신체의 일부가 되었다. 십오 년 세월을 보내며 그에게 지워진 과업이 어떤 형체를 이루고 있는지 그래서 어느 부분을 움켜쥐어야 할지, 하루 중 어떤 순간이 가장 힘겨운지 그렇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요령을 터득했다. 여전히 불편하고 갑갑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다소 익숙해졌다. 그런데 지금 그 지독한 업보가 쪼개지고 제멋대로 내려앉는다. 두 손뿐인 인간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남자는 꺾인 다리 무릎 아래로 손깍지를 꼈다. 차라리 전신을 아예 납작하게 만들어 주길 바랐다. 기다리기로 했다. 눈의 시선은 바닥으로 향했다. 악다문 입의 압력이 고통스러워 입술 오른쪽 구석으로 새어 나온다. 그를 억압하는 압박의 크기는 타인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였다. 땅바닥에 박힌 자신의 그림자가 무척 진했다. 굳이 올려다보지 않아도 오늘따라 하늘이 유독 맑고 푸르름을 알아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맞은편 사내는 그런 그의 모습이 불편했다. 불길함과 우울함이 자신의 발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거 같아 피하고 싶었다. 아무리 세상이 무찔러야 할 짐승에 지나지 아니하더라도, 그는 너무 유별난 것 같았다. 눈살을 몹시 찡그렸다. 어릴 적 그를 바라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도 늘 울적한 그였다. 사내의 눈에 그는 사방에 진물을 남기며 기어 다니는 털 투성이 애벌레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마찬가지로 어렸던 사내는 그것의 뒤치다꺼리나 해야 했다. 너무나도 그가 미웠다. 그렇지만 감히 그런 감정을 드러낸다는 건 상상조차 못 했다. 그와 남자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신분 차이가 있었다. 눈엣 가시인 그가 사라진 후, 맘속 추악한 감정 중 적어도 한 가지는 잊고 지냈다. 다시는 마주하기 싫었다. 하지만 자신에겐 이 전염병 같은 남자를 데려가야 할 임무가 주어졌다. 인정받고 싶은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도 웃으면서 해내야 한다. 남자는 입으로 올라오는 신물을 연신 삼키며 되뇌었다. 그를 설득할 어떤 말이라도 내뱉어야 할 텐데, 아니 그의 기분을 맞추려면 알랑거리기라도 해야 하는데 어째서 이자에게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계속 입을 앙다물고 그를 내려다보기로 했다.


"이거 내 정신 좀 보게, 멀리서 온 손님을 이리 서있게 했다니. 허기졌을 텐데, 오랜만에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을 텐가? 집으로 가세나. 어린 시절부터 우린 수프를 한데 모아 빵에 싹싹 긁어먹었지. 그땐 늘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오늘 밤 옛 기억을 한 번 떠올려 봄 세나."


남자는 금세 얼굴을 환하게 풀었다. 아무리 기다려봐도 육체는 바라는 것처럼 쉽사리 망가지지 않을 듯했다. 시간을 좀 더 벌고 싶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찾아온 이 반가운 사내를 민망하게 만드는 건 무례한 짓이었다. 무릎에 양손을 딛고 힘겹게 일어섰다. 백작의 아들은 게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대는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지만 마주 잡은 손은 헐겁기만 했다.


"강인한 아버님이 그리 되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세.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늙으면 쇠약해지기 마련이네. 이변은 아니야. 그러고 말고."


남자는 머릿속을 맴도는 전언을 심각히 받아들이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그들은 외곽 낡은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강아지들 같은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면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남자는 무릎을 굽히고, 양팔을 벌려 두 아이를 끌어안았다. 갓 짜낸 우유의 고소한 냄새가 폴폴 났다. 뭘 품고 있는지 따끈따끈 한 그들의 체온이 남자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직 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들을 자리에 앉혔다.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들이 바둥거렸다. 남자는 빈약한 찬장에서 부리나케 나무 그릇을 내왔다. 짐승의 사료로 쓰일 곡식을 가루로 빻아 쑨 죽이었다. 흔한 빵조차 곁들이지 않았다. 손님에게 큰 덩이를 덜어주곤 자신은 아이들의 입에 숟가락을 번갈아 갖다 댄다. 남자아이 한 번, 여자아이 한 번, 여자아이 한 번, 남자아이 한 번, 자신 한 입, 맞은편 사내는 그가 이런 미소를 지으며 살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사내는 똑똑히 기억했다. 어린 시절 백작의 아들은 위선덩어리였다. 그의 태생 앞에 수프를 덜어주는 국자마저 설설 기었다. 어린 사내의 그릇에 담긴 것은 남자의 것에 삼분의 일도 안 됐다. 그 불평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윽고 도련님은 사내의 그릇을 뺏어다 자신의 것에 뒤엎었다. 그러고는 사내 쪽으로 조금 더 천진난만하게 내밀었다. 어린 사내는 입안에서 모욕을 씹었다. 기껏 한 두 살 정도 더 먹은 인간의 같잖은 행태, 그것으로 그가 마음의 양식을 얻을지도 모른다니 눈깔이 뒤집혔다. '왜 너는 자발적인 선량함을 택하고 난 원치 않는 동정을 받아야 하냔 말이다.' 그런 역겨운 기분이 들 때마다 어린 사내는 악을 쓰고 수프를 더 들이마셨다. 그 가식이 다시 눈앞에 알짱거리니 어른이 된 사내는 어쩔 줄 몰랐다.


"왜 그러고 있나. 미안하네. 좀 더 나을걸 대접해 주지 못해서.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네. 이 작은 것들이 여간 많이 먹는 게 아니니, 되도록 양을 늘릴 방법을 찾는 수밖에."


남자는 연신 손을 놀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흐뭇한 미소는 여전했다. 사내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 한가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떠나야 합니다. 당신이 자리를 비운 탓에 마을은 엉망진창이 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기적…, "


"그만하게. 이 아이들, 내가 함께 하지 못해 말을 못 할 뿐이지, 타인의 감정을 눈치챌 순 있다네. 거기다 아이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는데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자네의 절박함은 이해하네만, 감정을 너무 앞세우진 말게나. 지금 우리가 마쳐야 할 건 눈앞에 놓인 식사뿐일세."


사내는 할 말을 잃었다. 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자신의 다음 말은 누가 들어도 궤변이었을게 뻔했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이고 죽을 퍼올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따스한 양초가 방 안 두 군데서 타올랐다. 남자는 아이들을 눕히고 잠시동안 손바닥으로 배를 토닥여줬다. 이번에는 죽을 입에 넣어주던 순서와 반대였다. 이마, 양 볼, 입술에 뽀뽀를 했다. 남자는 따스한 온기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사내는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며 싸늘함을 몰고 오는 걸 느꼈다. 반사적으로 위축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입은 우물쭈물 해댔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이가 맞은편에 앉았다. 어쩔 줄 몰라하는 사내에게 남자가 다시금 온기를 건넸다.


"자네의 말을 정리하자면, 아버님이 쓰러지신 뒤 사람들은 구심점을 잃어 혼란에 휩싸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마을의 몇몇이 중요한 일들을 맡고 있단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결코 그들이 원해서 떠안은 역할이 아니지만요. 역시 탁월한 분 들 이어서 그런지, 수완이 남달랐습니다. 놀라울 따름이었지요. 마을의 모든 게 순조로이 잘 흘러가고 있습니다. 다 그분들 덕분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자네가 날 찾아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버님 때문이라면 관두게, 우리 부자에게는 각자가 짊어질 짐이 있다네. 아무리 육체가 구부러질지언정. 그분의 정신은 그걸 부여잡고 있을 것이네. 날 원망하시거나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을 걸세, 누군가에게 기대길 원하시지도 않을 테고. 난 강한 믿음을 갖고 있어. 자신이 죽는 날까지 아들인 내가 그렇게 바라봐 주길 소망한다고. 그래도 자네의 방문은 반갑네, 추억을 한아름 들고 온 자네에게 내 뭐라 감사함을 전해야 할지. 이 밤을 넘기기 한결 수월해 질듯 싶군."


아뿔싸! 사내는 말의 실수를 깨달았다. 의도치 않게 흘러가는 결론의 방향을 억지로라도 꺾어야 했다. 거짓말을 쥐어짜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행정관과의 약속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백작님, 도련님의 아버님께서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아드님의 모습을 보고 싶다 애원하셨습니다. 두 손을 붙잡고 최후를 맞이하고 싶다며, 그렇지 않으면 영혼이 결코 안식을 취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자네는 내 아버지가 입도 벙긋 못한다 하지 않았나. 아버님의 간절한 소망을 직접 들었나?"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았다. 사내는 스스로 상대를 능숙하게 속이고 있다고 믿어버렸다.


"아닙니다. 늦은 밤 잠자리를 봐드리러 간 늙은 행정관 클레께서 직접 들으셨지요. 도련님께 한 사람의 아들로서가 아닌 마을의 책임감 있는 일원으로서 돌아와 주길 바란다며, 이 말은 최후까지 아껴달라 당부하셨죠."


"아까도 말했지 않나, 아버님은 땅 속에서 흙이 되실 때까지 굳센 분으로 남고 싶을 걸세. 설령, 자네가 한 말이 사실이라 해도 그건 찬바람이 순간 귓속으로 들어가 그가 원치 않는 말을 내뱉은 것뿐이야. 더군다나 나는 그 약해진 아버님을 마주할 정도로 모질지 못하네. 난 그의 반의 반도 닮질 못했어. 강인하지도 굳세지도 않지. 내겐 저 두 아이를 지키고 그들에게 세상에 희망이 있음을 일깨워줘야 하네. 내 오늘 자네와의 만남은 기억하겠네. 그러나 나머지는 아침이 되자마자 전부 잊을 걸세."


"희망이라고 하셨습니까? 당신의 몸엔 저 위대한 거인의 피가 흐릅니다. 어찌 희망을 이 방안에만 내리려 하십니까. 수백 명의 사람들이 희망에 목말라 있습니다. 벌써 잊으셨습니까. 왜 우리가 그 어두운 숲 속에서 숨어 지내는지, 아직은 모자랍니다. 우리 스스로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와 참된 인간으로서 자긍심을 샘솟게 할 여력이 부족합니다. 당신의 아버님이 우리에게 희망의 불씨를 나눠줬는데 그게 꺼지려 합니다. 어찌 그걸 모른 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아까 마을에 남은 몇몇이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하였습니다. 진실이 아닙니다. 그들의 모습은 아등바등 겨우 하루의 빈자리를 때우는 것일 뿐, 내일을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그들의 노력을 함부로 폄하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마을의 노인, 청년, 어린아이 모두가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만이 당신이 평생 간직해야 할 진실입니다."


남자를 속이는 게 목적이 되자, 사내의 입에서 거짓은 술술 나왔다. 남자는 그의 눈과 입을 번갈아 쳐다봤다. 십오 년의 바깥세상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은 '인간, 바로 인간의 진심이었다.' 남자는 사내를 빤히 쳐다보기 어려웠다. 남자의 눈은 슬퍼졌다.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몰랐다. 타인에 대한 판단에 앞서 자신을 되돌아봐야 했다.


'나는 소심한 겁쟁이로 태어났다. 말귀를 알아들을 무렵부터, 착하다는 평판은 나의 비겁함을 잘 숨겼다는 말로 들렸다. 아버지처럼 굳세게 살 자신이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잊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내 모습은 깜깜한 상상에서나 가능했다. 자신에 관한 나약함과 불신을 마을의 부조리로 포장하여 아버지를 괴롭혔다. 알고 있었다. 나는 억지를 부리고, 그는 내 상처를 가엽게 여기기만 했다는 것을. 마을에서 도망친건 답답해서가 아녔다. 앞으로 지워질 책임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아름답기만 한 낙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이 있는 곳은 어디든 줄기찬 좌절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세상이 내려준 쓴 맛이 날 괴롭히기만 한 것은 아녔다. 타인의 강요를 이겨내고 자신을 위한 선택을 거치며 난 겉으로나마 단단한 척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나의 내면은 여리기만 한 소년이었다. 아버지의 모습처럼 자라나고 싶었으나, 그 꿈은 어른이 되어서도 한결같이 공상이었다. 난 상상력이 풍부했다. 때론 마을로 돌아가면 어떨까 생각했다. 바깥에서 겪은 경험이 자신의 요람을 위해 도움이 되진 않을까, 아니 될 거라 믿었다. 그리고 아직은 날 반겨주는 이들이 있을 거라 여겼다. 오늘날 비록 자신을 맞이하러 온 이가 거짓된 자일 지라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함께 한 자신을 치욕스러운 구렁텅이로 빠뜨릴 것 같지는 않았다. 설령 그런 상황에 놓인다 한들,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숲 속 가비뇽에서의 악은 바깥에 비하면 애교스러운 수준일 것이며, 무엇보다 만일 내가 돌아가게 된다면, 난 마을과 사람들을 위해 온몸과 마음을 바칠 각오로 임할 것이니. 이러한 내 진심을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알아줄 것이다. 나를 낳은 땅과 사람들을 믿고 싶었다. 그들은 순수한 존재이다. 나로 인해 실오라기만큼의 희망이라도 마을에 뿌려진다면, 난 기꺼이 날 희생하리라.'


갈등하는 그에게 간사한 자가 더 파고들었다.


"도련님께서도 언젠가는 마을로 돌아오시리라 마음먹으셨을 겁니다. 자신이 태어난 곳을 그리워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순리지요. 당신이 필요한 지금이야 말로 귀향의 마땅한 때입니다. 거기다가 저 사랑스러운 어린것들을 보십시오. 저 천사들의 온기와 속삭임을 할아버지에게 선물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비극입니다. 마음이 동하실 때 얼른 출발하시지요. 한시가 급합니다."


남자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저 아이들의 삶에 희망과 사랑이 근간이 되도록 본을 보여야 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려고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내게, 만에 하나 불상사가 벌어지면, 저 연약한 것들은 유일하게 의지할 자를 잃는다. 그러나 마을로 돌아가 내가 사람들에게 헌신한다면 어린것들은 자연스레 인간의 선함을 배울 것이고, 시간이 흘러 내가 어찌 된다 하여도 내가 사랑받듯이 이 아이들 또한 사랑받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하루하루 연명하기에도 급급하니, 그러나 대체 무엇이 이리 나를 망설이게 한 단 말이냐. 마치 다른 세상의 무언가가 내 발목을 붙잡는 것 같구나. 날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구나. 아마도 나의 우유부단함과 여린 마음 탓일 것이다. 이겨내야 한다. 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난 운명에 맞서러 가야 한다.'


날름거리는 혀는 그칠 줄을 몰랐다.


"자 어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당신은 마을에 절실한 희망을 갖고 가는 것입니다. 당신뿐 아니라 저 천사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거기다 유일한 혈육을 기다리는 자에게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의 선택은 나중에 번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야 할 때입니다. 제가 얼른 수레를 구해오겠습니다. 저 소중한 보물들을 잘 태워가야지요."


남자의 발목에는 검푸른 아지랑이가 맴돌았다. 이것은 운명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자신이 빚어낸 환상이라 착각했다. 발을 들어 그것들을 힘차게 밟아댔다. 험악한 발구르기에 딸아이가 악몽이라도 꾼 것인지 서럽게 울어댔다. 남자는 얼른 아이를 소중히 안아 달래줬다.


뱀 같은 자가 벌컥 문을 열었다.


"제가 값을 치르고 수레를 사 왔습니다. 얼른 떠나시지요."


이미 어두워진 밤이 그가 거짓말쟁이라고 거듭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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