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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어리석은 착각, 그리고 놓친 기회

by 고전을 마시다

문이 열리자 빛이 있었다.

백작 아들은 지난 시절을 회상했다. 사람들이 모인 그곳은 늘 힘이 넘치고 생기가 가득했다. 반가운 인사와 유쾌한 웃음소리가 넘실거렸다. 여기저기서 호졸근하고 궁상스러우면서도 듣는 이를 화하게 만드는 순박한 소망이 실실 흘러나오면, 진심 어린 격려와 값진 보탬이 흔쾌히 전해졌다. 남자는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 그 장면을 떠올렸다. 행복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봄기운이 뒤에서 밀려들었다. 발걸음이 경쾌했다.


이미 다수의 사람들이 한 데 모여있었다. 막시마를 막아선 막연한 두려움을 헤치고, 사람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발랄하게 인사를 건넸다. 못 본 체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억지 인사도 더러 있었다. 괜스레 바닥에 침을 뱉거나 상스러운 말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남자도 함께 했다. 막시마는 그간 바깥에서 비슷한 경험을 겪은 적이 있는지 잠잠히 기억을 더듬었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길게 내뿜었다. 지금부턴 매사의 말과 행동을 신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정면을 바라봤다. 늙은 행정관과 젊은 행정관이 좁은 단상으로 올라와 나란히 서있었다. 네 개의 발이 동시에 머물기엔 면적이 모자라 보였다. 노인이 말을 꺼냈고, 젊은이가 말을 마쳤다.


"성실히 떠오른 태양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토록 합시다. 저기 뒤쪽 백작의 아들이 오늘부터 우리의 일원으로 함께 할 것입니다. 막시마여, 마을에 희망의 불씨를 제공한 자의 의지를 잇는 자는 대체 어떤 모습일지 내 눈여겨보겠소."


"이 마을을 이끌었던 남자의 후손이 그리 느긋하게 나타나서야 되겠소? 클레 행정관님의 말씀대로 이 마을로 들어온 만큼 각오를 단단히 가져야 할 거요. 자 다들 평소대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 주시길."


오르 행정관의 핀잔에 막시마는 멋쩍었다. 자리에 모인 전부는 뿔뿔이 흩어졌다. 어디로 가야 할까, 그는 가야 할 길을 잃었다. 아무 데나 쫓아가야 하나 싶은 와중에 비대한 남자가 다가와 넉살을 떨었다.


"많이 생소하신가 봅니다. 하긴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저는 클레가 의 행정관님 밑에서 일하는 흄이라 합니다. 대단한 인물은 아니지요. 행정관님이 당신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저기 저쪽으로 이 천 걸음 정도 걷다 보면 이끼 덮인 돌무더기 땅이 나옵니다. 거기를 개간하라 하십니다."


남자가 뚱뚱한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자마자 그 자는 냉큼 자리를 뜨려 했다.


"어느 정도 크기의 돌덩이들이 있소? 혼자 치울만한 것이요? 기구는 누구에게 빌려야 하며, 힘센 짐승을 데려가려면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오?"


남자는 이거 저거 상세히 물어봤다.


"아니 행정관님이 하라면 군말 없이 할 것이지, 뭘 그리 따지는 게 많습니까? 행정관님이 내게 전하라고 한 건 그뿐이니까 알아서 하시요. 나 원 참. 시키는 건 한 가지인데, 질문은 여러 가지라니 영 미덥지 못한 자가 들어왔군."


사내는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내뱉으며 떠났다. 그에 대한 기억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용모의 집안도 연상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 자는 남자가 떠나 있는 동안 새롭게 유입된 외지인일지 싶었다. 막시마는 목적지로 발을 옮겼다. 직접 확인해 보고 부딪칠 요량이었다. 별거 아니라고 마음먹으면 세상 일은 정말 별게 아녔다. 목적지에 도착해 보니 몇 군데 파헤치다 만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나마 어디를 작업하면 될지 헷갈리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두껍고 커다란 편마암들이 세월에 맞서며 여기저기 쪼개져 있었다. 맨손으로 작업하기엔 매우 위험했다. 더군다나, 겉으로 드러난 바위덩어리의 크기도 엄두가 안 날 지경인데 땅속에 묻힌 것들은 대체 얼마나 클지 가늠이 안 됐다. 그러나 막시마는 마음에 절망을 허락지 않았다. 머릿속에 이 일을 끝내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과 기한에만 온 힘을 쏟기로 했다. 흙의 단단함과 종류를 파악하려 손으로 파내기도 해 보고, 면적은 얼마나 될지, 이 땅에 뭘 심으면 적합할지, 어떤 모양으로 다듬어야 자투리땅이 남지 않을지 별생각에 한참을 골몰했다. 두 손으로 이것저것 시도도 해봤다. 역시나 될 일이 아니었다. 백작의 아들은 흙투성이가 되어 마을로 돌아갔다. 정오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이미 사람들은 회관에 모여 시끌벅적했다. 막시마는 오전 내내 이렇다 할 일을 하지 못해, 수프 한 그릇을 선뜻 청하기 민망했다.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목수의 가족들을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그들은 비슷한 생김새에 다 같이 모여 있었으므로, 그들을 발견하는데 어렵진 않았다. 막시마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식사를 마치시면, 땅 속 바위를 꺼내 옮길 기구를 빌렸으면 합니다."


"우리가 당신이 빌려달라면 냉큼 갖다 바쳐야 합니까? 거기다 입에 뭘 넣는 시간만큼은 우릴 좀 내버려 두시오."


"제가 경솔했습니다. 이따가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아직 수프가 남았을 텐데 얻어보지 그래요."


자리를 뜨려는데 무리 내 한 부인이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전…."


"집에 먹을 거라도 따로 쟁여놓은 건가? 그러지 않고서야 저럴 순 없지. 평등은 무슨 놈의 평등. 역시 우릴 착취할 인간이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이네."


막시마는 씩 웃곤, 커다란 솥단지 쪽으로 나아갔다.


"안녕하세요. 부인, 남는 수프가 있을까요?"


"아니, 미리 말도 안 해놓고 달라면 어쩌란 말인지. 매사가 이런 식이야. 일 벌이는 사람 따로 있고, 온갖 허드렛일은 아랫것끼리 알아서 처리하라고? 더러운 놈의 집구석들."


나이 든 여인은 몸속에 묵힌 온갖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옆에 막그릇을 하나 집어 들어 수프를 듬뿍 담아 건넸다. 비록 그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줬지만 막시마는 고개 숙여 감사했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르니, 양 쪽 볼 아래턱이 뒤틀리는 듯 고통스러웠다. 막시마는 신나게 달렸다. 자신의 보물이 있는 곳으로.


"까꿍! 이 천사들 어디 있지?"


강아지들처럼 아이들이 달려왔다. 이 순둥순둥한 것들이 외로움과 무서움을 견뎠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안아주지 않곤 못 배길 녀석들이었다. 짠 하며, 수프그릇을 내밀었다. 눈이 휘둥그레 진 아이들은 그릇을 부여잡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나 평소 같았으면 더 달라고 생떼를 부리고도 남았을 텐데, 웬일로 적당히 먹고 뒤돌아서는 것이었다. 더 안 먹어도 되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이내 천사들은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가버렸다. 막시마는 다시 목이 매였다. 저 어린것들이 자신을 위해 양보라는 미덕을 깨우치고 실천했음에 감동했다. 남자는 남은 수프를 말끔히 비웠다. 세상이 다 내 편 같았다. 그는 성큼성큼 바깥으로 나아갔다.


막시마는 목수집안을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당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가 이유였다. 막시마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저 멀리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이고르가 마을 회관에서 잡일을 돕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지난번 비시 행정관과 함께 방문했을 때 뵀지요. 혹시, 목수네 말고 기구를 빌릴만한 데를 아십니까?"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런 걸 요구한 사람은 보질 못했습니다."


"그런가요. 오늘 행정관님이 불모지 개간을 명령했는데, 맨 손으론 도저히 할만한 것이 아니라서 말이죠. 조금 난감합니다. 이 어려움을 행정관님과 상담하고 싶은데 지금 집에 계십니까."


"거참, 희한한 사람이네. 손으로 못하는 거면 안 하면 될 것이지. 아니면 손으로 할 수 있는 정도로만 하던가, 행정관에게 얼마나 잘 보이고 싶어 그러는지. 아휴 지겨워. 누군가 유난을 떨면 꼭 선량한 우리까지 피해를 입던데. 그러고 보니 벌써 난 여분의 수프를 저 사람에게 뺏겼지."


막시마에게 수프 그릇을 건넨 부인이 소리쳤다.


"그러게요. 이 사람이 오기 전까지 마을에 이런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참 기막힐 노릇입니다."


이고르는 우려스럽다는 얼굴을 바탕으로, 미묘하게 통쾌하다는 듯 또는 고소하다는 듯한 표정을 가미했다. 막시마는 웃어넘겼다.


"알겠습니다. 내 직접 행정관님을 찾아뵙도록 하지요."


"알아서 하시지요."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농사꾼 쟈빈입니다. 절 기억하실지요. 저희 집에 낡은 괭이가 한 자루 있으니, 괜찮으시다면 그거라도 가져다 드리지요."


아까부터 백작 아들의 딱한 사정을 유심히 지켜보던 착한 농사꾼 쟈빈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남자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한 편 그걸 지켜보는 자는 둘 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어찌 당신의 인자한 미소를 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큰 도움입니다."


쟈빈의 작은 도움으로 백작은 활력을 되찾았다. 딱딱하고 알맞게 구부러진 은총의 손길로 작은 돌부터 골라내니 떨어지는지도 몰랐다. 마음이 뿌듯했다. 쟈빈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빈손으로 찾아가기 민망하여 다음에 가기로 했다. 쟈빈은 어차피 지금 괭이를 쓸 일이 없으니, 맘껏 사용하라고 했다. 그는 바로 보물 창고로 돌아갔다. 하루가 밝게 저물었다.


막시마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혹시나 너무 깊게 잠들어 종소리를 잘 듣지 못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피로 때문에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의 오른팔에는 든든한 버팀목이 들려있었다. 아이들이 정오까지 깨지 않길 바라며, 종소리가 울리기 훨씬 전, 일찍 회관으로 나섰다.


시간이 흘러 첫 번째 종소리가 들리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막시마는 맨 앞에는 서지 않고 적당한 자리를 잡아 섰다.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냉대했지만, 반기는 이가 생겼다. 어떤 이는 누가 아이들을 돌보는지 궁금해했고, 저녁엔 뭐라도 먹었는지 염려해 줬다. 막시마의 마음에 조금씩 뭔가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어느덧 단상에 두 행정관이 올라갔다. 어제와 비슷한 인사말 뒤에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막시마는 얼른 일터로 가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떠났다.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막시마는 소중한 괭이를 어깨에 둘러메고 늦지 않으려 부리나케 달려왔다. 끄트머리 긴 했지만 다행히 수프를 받는 줄에 매달렸고, 아주 조금의 눈치를 받긴 했지만 한 그릇의 행복을 얻었다. 뿐만 아니었다. 아침에 어젯밤 저녁식사를 물어본 남자가 굳이 막시마에게 찾아와 주머니에서 소중한 달걀 하나를 꺼내주었다. 배식과정에서 깜빡했다며 부인이 빵도 가져다줬다. 남자는 자신을 잊지 않고 챙겨주는 이들이 고마웠다. 감상에 젖을 때가 아녔다.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강아지들은 역시나 적당히만 먹고 달아났다. 빵은 쪼개어 자그마한 손이 닿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달걀은 찬장에 넣었다. 막시마는 남은 수프를 말끔히 비우고 새로운 땅으로 갔다.


오후의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막시마는 자신에게 걸어오는 흰 수염의 고집스럽게 생긴 노인을 발견했다. 그 남자의 미간에는 여전히 뚜렷한 주름이 있었다. 막시마는 너무 기쁜 나머지 괭이를 내팽개쳤다.


"혹여 날 데리러 저승에서 찾아오신 건 아니겠지요?


"지금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꼭 그러도록 하지요. 잘 돌아오셨습니다. 도련님."


"헤로도 여, 오직 그대만이 나의 복귀를 진정으로 반기는 구려."


그들은 뜨겁게 껴안았다. 서로의 심장이 맞닿다.


"아버님의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으시기에 큰 변고라도 있는 줄 알았습니다."


"마을 바깥에서 마무리 지을 일이 있었습니다. 백작님의 장례식 다음 날 도착했는데, 도련님을 찾아오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이 있더군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간 내 마음이 얼마나 움츠러들었는지, 당신을 만나 이제야 안정이 됩니다."


"그리 영민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데려오시다니, 마을에 축복을 가져오신 겁니다."


"아이들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럼, 대체 그 어린것들 단 둘이 어찌 그 큰집에서 지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른 아침에 눈뜨는 녀석들을 찾아가 죽도 먹이고 말도 걸어주었지요. 이틀 동안 알아채지 못하셨단 말입니까?"


막시마는 그 강아지들이 왜 자신에게 수프를 남겨줬는지 이해하곤 웃음을 터뜨렸다.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에서 내면의 갈증을 해갈해 주는 건 역시 작은 천사들 뿐이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막시마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마을에서 으뜸가는 문장가이자 학식자가 자신의 왼편에 걷고 있다. 완벽한 암실에 참새부리가 뚫은 정도의 광명이 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집회에서 불길한 소란이 일었다. 비시 행정관은 쟈빈이 일부러 일을 열심히 하지 않기 위해 유일한 괭이를 막시마에게 빌려줬다며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작의 아들은 쟈빈에게 폐를 끼쳐 몸 둘 바를 몰랐다. 혼신을 다해 이 괭이는 자신이 애걸복걸하여 뺏다시피 얻은 것이기에 그는 선량한 피해자일 뿐이라 적극 변호했다. 소용없었다. 젊은 행정관은 즉각 쟈빈을 게으른 자로 판결 내려 가족에게 일주일간 빵 하나로 버티게 할 것을 명령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막시마에게 스스로 굶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자신 때문에 른 사람이 피해 보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었다. 웅성대던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이 속해야 할 곳으로 향했다. 막시마는 쟈빈에게 달려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 일을 어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괭이는 당장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만 두시지요. 도련님의 마음은 잘 압니다. 그러나 지금은 침묵해야 할 때입니다."


단호한 그의 말에 막시마는 말을 멈췄다. 그는 괭이마저 돌려받지 않았다. 저 착한 사람이 큰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짐작했다. 시마는 일하는 전 내내 땅을 고르면서도 온통 정신은 딴 데 가 있었다. 마을 유일한 기록관 헤로도 가 어제보다 일찍 그에게 나타났다. 막시마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행정관에게 찾아가 다시 한번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할까요? 아무리 제가 긴 시간 자리를 비웠다지만 이리 야박한 판결이 내려지리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가비뇽은 조금 특별한 마을이지요. 누구도 쉽사리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도련님이 어떤 배경으로 그 괭이를 얻었고 지금 심정이 어떤지 어른이라면 누구나 정확히 압니다. 다만 같은 걸 전달하여도 사람마다 반응은 다릅니다. 그건 세상의 이치입니다. 바깥에서 잘 깨우치셨지 않습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쟈빈의 선행이 잘못이라면 그걸 받은 제게 벌이 내려져야 마땅합니다. 그른 것을 어찌 두고 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 도련님의 저 어린것들이 일주일간 빵 하나에 배곯도록 벌을 대신 청하실 겁니까?"


"그럴 수야 없지요. 제가 이 주, 아니 삼 주 동안 굶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만입니다. 도련님 스스로 법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전횡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마을의 기록관께선 이런 일을 당한다면 어찌하실 거란 말입니까?"


"흠, 제가 답을 드린다 한들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실 겁니다. 도련님은 제가 아니니까요. 스스로 납득할 길을 찾아보시지요. 다만 저는 최악의 선택만은 피하도록 온 겁니다. 비시 행정관을 찾아가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클레 행정관을 찾아가서도 안 됩니다. 도련님은 맡은 일을 묵묵히 하고, 점심식사를 드셔야 합니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우선은 말입니다. 왠 줄 아십니까? 도련님은 아직 이방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명과 각오는 저들에게 알 바 아닙니다. 인간들은 오직 눈앞에 놓인 찌꺼기들에 정신 팔린 존재니까요. 그걸 뺏기기라도 하려면 게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겁니다. 인간다운 옳고 그름? 선한 의도? 책임과 존중? 도덕적 기준? 애석하게도 그들에겐 땅에 떨어진 새똥만도 못한 것이지요. 이 씁쓸한 사실을 인정하고 그들을 짐승처럼 부리던지, 아니면 모든 걸 다 깨부수고 바꾸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그때까지는 순응하는 법부터 배우셔야 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막시마는 남은 시간 구슬땀을 흘렸다. 기록관의 말대로 그는 배식을 받아 평소대로 해치웠다. 그리고 조용히 쟈빈의 근처로 가 기다렸다. 쟈빈은 웃고 있었고, 그의 아내에게서 근심걱정을 전혀 견하지 못했다.


"도련님, 자리를 비우신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저는 못 배워서 변화에 잘 적응하지도 못하고, 어떤 행동이 이로운지 어떤 행동이 자신에게 해로운지 분간 못 합니다. 하지만, 어려움에 처한 이를 못 본 체하는 게 옳지 않음은 똑똑히 압니다. 당신을 도운 대가가 이것이라면 저와 제 아내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별거 아니에요. 제가 떳떳하고 아내가 저를 칭찬하는데 무엇이 걸리신단 말입니까. 물론 당신의 가련하고 곧은 마음을 봤기에 더 뿌듯한 것도 있습니다만, 역시나 오늘의 결과는 저의 행동에 따른 책 임입니다. 그러니 겸허히 받아들이는 게 상책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다 하여 섣불리 이기지도 못할 상대와 맞부딪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지요. 그러니 도련님, 부디 이 일은 잊으시고 맡은 일에 전념하세요. 당신의 진심을 알아주는 이들이 분명 나타날 테니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막시마의 가슴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혹 걱정하실까 봐 드리는 말씀인데, 제가 하나뿐인 제 아내를 굶기기야 하겠습니까? 알아서 할 터이니 걱정 마세요."


막시마의 내면에서 강렬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가장 먼저 창피함이 출현하여 자신을 향한 동정을 말끔히 사멸시켰다. 자신도 모르게, 아니 자신을 비련의 주인공으로 상상하며 자기 연민을 어느 정도 허용해 왔음을 들켜버렸다. 말 그대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 자신의 알량한 판단에 따르면 쟈빈은 그저 안쓰러운 피해자였다. 하지만 그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수모와 부당한 처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정당했음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지키지 위해 치르는 값을 아까워하지도 않았다. 부드러운 미소와 의연함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에, 막시마는 너무나도 감명받아 그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다. 삶에 대한 의욕을 이글이글 불태웠다. 다만, 그 불길이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디를 향하는지는 모호했다. 물론 쟈빈이 보인 태도가 그의 여러 면 중 지극히 일부긴 할 테지만, 인간이 지향해야 할 것임에는 분명했다. 자신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었고, 그러한 행동이 타인에게 귀감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며 지켜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했다. 백작의 아들은 쟈빈의 두 손을 꼭 쥐더니 돌아섰다. 그는 며칠간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고 누구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숨은 조력자인 기록관이 그의 보물들을 대신하여 잘 보살폈다. 얼마 후 그는 늙은 행정관 클레를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여실히 설명한 뒤, 도움을 절실히 요청했다. 행정관은 못마땅해하면서도, 막시마에게 서너 명의 사람과 망아지 한 마리를 붙여주고, 필요한 기구를 딸려보네라며 한 남자에게 지시했다. 백작의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은 이 낯익은 자에게 기록관마찬가지로 반색을 표했다. 하지만 그 붉은 머리에 굳은 얼굴의 남자는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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