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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볼라레 칸타레

by 고전을 마시다

인간은 성장한다. 육체적인 성장은 일찍 멈추지만, 정신적인 성숙은 죽을 때까지 이룰 수 있다. 단, 그러고자 하는 사람에 한하여.

막시마는 들짐승이 지나다니는 통로 외엔 쓸모없던 터에 의미를 부여했다. 사람들은 아슬아슬 파종 시기를 맞췄다. 경작해야 할 땅이 늘어났다는 사실에 불평불만은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 저마다 다른 꿈이 뭉게뭉게 뭉쳐 사람들의 입꼬리에 걸렸다. 쟈빈은 희망을 심는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적잖은 힘을 보탰음을 공공연히 자랑했다.


막시마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일단 손아귀에 힘에 붙었. 이젠 웬만한 망아지도 단박에 끌어채지 싶었다. 누군가 새로운 땅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당장 달려가 지난번 보다 더 빠르게, 쓸모 있게 개척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마을로 통하는 방향을 정하고 모양, 넓이를 가늠한다. 토질을 만져보고 흙의 깊이를 다. 우선 갈퀴와 손으로 잔돌을 골라낸다. 사방으로 뻗은 길을 트고, 단단히 다진다. 큰 바위는 땅 위로 더 솟아난 부분의 밑을 파내어 가죽을 댄 끈을 망아지와 사들이 끌게 하거나, 뾰족한 통나무를 찔러 넣어 지렛대 삼아 들어 올리면 될 것이다. 뽑힌 덩어리는 바닥에 균일한 나무를 깔고 굴리면 편리할 것이다. 모든 일을 시행하기에 앞서 필요한 준비물과 기구를 마련하고, 일정을 완벽히 짤 수 있었다. 어떤 일이라도 가능리란 믿음이 생겼다. 자신의 일이 사람들과 마을에 약소하나마 보탬이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이보다 값진 일이 또 있을까? 아무리 하찮은 무엇이 됐든 간에, 세상에 뭔가를 더한다면 자신의 희생이 아깝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으로 인해 다른 이가 짓는 미소가 자신의 생애에 걸친 비애와 고독감을 잊게 했다. 이러한 감정이 단단해질수록 타인을 해치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간의 본성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세상의 모든 물줄기 가 발원지와 상관없이 바다로 흐르는 것과 같이, 인간 또한 착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순행의 도리라 생각했다. 가엽고 어리석은 막시마, 그는 땅의 저편 어딘가에는 썩어버릴지언정 절대 변화하지 않는 물도 있음을 몰랐다. 불행은 무지라는 출발선을 밟으며 뛰쳐나갔다.


막시마는 아무것도 모른 채 몇 주간 땀 흘려 일군 성과를 바라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희망을 노래했다. 집에 와선 아이들을 들어 안고, 날아오르듯 흥에 겨운 몸짓을 해댔다. 앞으로 자신의 삶에 무엇이 펼쳐지든 수월히 헤쳐나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감과 용기가 몸 안에 그득그득 들어찼다. 그의 주변에서 새로운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대고, 달콤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간사한 인간들은 흡사 벌과 나비처럼 막시마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그는 도취됐다. 자신이 이룬 업적이나 공적의 위대함에 취한 것은 아니었다. 한 인간이 선한 마음과 굳은 의지를 가지면, 그 어떤 어려운 일이든 능히 해낼 수 있다는 확신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세상은 분명 눈에 띄게 변화할 수 있다는 광경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러자 그는 죽지 못해 살아간다는 듯 표정 짓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뺏겼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긋지긋하게 여길까, 다가오는 내일에 대한 꿈을 품는다면 매우 행복하련만, 자신이 그들의 삶에 활력을 제공할 방법을 고민했다. 고난 뒤에 찾아오는 웃음이 선물하는 격정적인 감동에 막시마는 심취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시선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어느덧 그 남자의 지상과제는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사람에게 행복을 뿌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막시마는 마을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일어나고, 누구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현명한 조력자 덕분에 집안의 보물들은 날이 갈수록 가치를 더했다. 부엉이마저 울다 지친 밤, 냉정한 조언가가 집에 들어선 막시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혜로운 헤로도여, 오늘도 그대 덕분에 내 온 힘을 마을을 위해 쏟을 수 있었구려. 나의 보물들은 잘 지냈습니까? 요즘은 도통 깨어있는 녀석들을 마주하지 못했군요. 얼른 가서 얼마나 자랐는지 재봐야겠어요. 피곤하실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시지요.”


막시마의 얼굴은 피로에 짓눌려 있었으나, 목소리는 매우 들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헤로도의 표정엔 말을 시작하기 전부터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어깨는 축 늘어지고, 다리는 후들거리는데 뭐가 그리 즐거우신지요?"


"즐겁다마다요, 이리 유쾌한 나날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기껏 불행을 피해 도망친 곳에선 보이지 않은 불안의 손길이 눈만 감으면 앞에서 아른거리고, 그 무거운 엉덩이로 내 심장을 짓눌렀습니다. 하지만, 불안을 품고 돌아온 이곳에서 내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됐습니다. 겉보기에는 말씀대로 팔은 지하의 왕이 끌어당기는 것 같고, 장딴지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을로 돌아오기로 한 선택은 잘한 것입니다. 일찍이 내 나름의 행복의 정의를 내린 적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천성을 거스르지도 않고, 누군가의 가치와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도 않고,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오롯이 빛나는 새벽하늘의 작은 별처럼, 그대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저의 행복인 겁니다. 요즘 난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입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값진 변화를 이룩하고, 그게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이 땅에서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라 확신합니다. 난 매일을 내 행복의 관점과 일치시켜 보냅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요."


막시마는 모든 사람에게 진심으로 대했다. 땅에게도, 풀에게도, 벌레에게도, 돼지에게도, 망아지에게도, 꼬꼬닭에게도, 그러나 사방으로 뻗은 진정성은 배의 닻이나 건물의 기둥 따위가 아녔다. 그냥 난잡하게 펼쳐진 돛에 지나지 않았다. 삶의 목표가 자신의 아래에 내려진 뿌리 따위가 아닌, 주변의 변화인 자는 요동치며 흔들리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점점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기 시작했다.


“도련님의 목표가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삶의 방식이 그르다는 것도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할 태도와 본받을 만한 행동이지요. 누구도 감히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바보처럼 굴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지금 타인을 위하며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자신을 스스로 학대하며 망가뜨리는 것일 뿐입니다. 도련님이 지금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추구하는 것 중에 스스로를 위한 것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난 이렇게 걱정하지도 않을 겁니다. 대체 누굴 위해 이렇게 자신을 망치는 겁니까? 소중한 인생을 이리도 허망하게 막살면 안 됩니다.”


헤로도는 걱정 어린 말투로 시작하더니 마지막엔 차가운 물이 담긴 바가지에 한심함이란 가루를 풀어 끼얹듯 일갈했다. 막시마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인간 중에 가장 슬기롭고 박학다식했다. 그의 매몰찬 세례에 막시마는 정신이 바짝 들었고, 그 김에 기울여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진심이 통한 걸까? 헤로도의 태도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갓난아기 때부터 도련님을 지켜봤습니다. 제 무릎에 와닿을 정도의 크기부터 저의 코 언저리까지 자라날 동안 우린 참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했지요. 시간을 함께 하면 원하던 원치 않던 상대에 대해 깊이 알게 되는 법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지녔습니다. 타고나길 그래요. 지나가는 길에 놓인 작은 벌레조차 피해 가며, 심지어 뒤 돌아보기까지 했으니까요. 투명한 마음을 사람들에게 숨기려 들지도 않았기에 사람들은 그 속에 담긴 말랑말랑하고 포근함 덩어리를 똑똑히 볼 수 있었어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며, 선한 마음에는 반드시 선함 마음으로 보답하려는 아이였습니다. 스승인 제가 공인하는 바른 제자입니다. 거기다 똑똑하기보다 어려운 옳고 그름을 판별할 줄 아는 친구였지요. 당신을 보면 늘 자랑스러웠습니다. 지도자란 내일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후손의 번영까지 염두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앞날을 어찌 정확히 알겠습니까? 그래서 바른 방향을 세우고, 당장 변화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목표에 걸맞게 꾸준히 나아가고 준비하는 힘을 기르는 게 중요하지요. 그러려면 자신을 믿고, 타인을 의심치 않으며, 세상은 더 나은 모습으로 바뀌리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도련님은 진정한 지도자로 자라날 자질이 충분했어요. 벅찬 감격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경우가 많았지요. 제가 갓 열두 살을 넘긴 도련님께 행복의 의미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네, 기억하다 마다요. 내게 있어 행복이란, 타인이나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본연의 마음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라 답했지요."


"그래서 제가 도련님께 최근에는 언제 가장 행복했냐고 했더니, 자신은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한 것이며 매일을 그렇게 살고 있으니 늘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막시마는 즐거웠던 한 때를 떠올리며 미소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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