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일을 완수하고 싶은 자가 몸을 움직인다.
일장 연설을 마친 막시마는 가장 먼저 돼지우리로 갔다. 이고르와 흄에게 함께 가자고 했으나, 돌아온 건 매몰찬 거절이었다. 일의 진척을 눈으로 볼 수 있어야 사람들은 움직일 것이었다. 사실 막시마는 바깥세상에서 닥치는 대로 일하며 먹고살았다. 새로운 일에 두려움 따윈 일지 않았다. 늘 부딪쳐가며 배웠다. 빵 한 덩어리를 살 동전보다 경험을 귀중히 여겼다. 여러 재주가 몸과 머리에 배여 들었다. 고된 일로 맹렬히 차일수록 기억은 더욱 깊이 스며들었다. 이 산전수전 겪은 남자는 다행히 우물을 판 경험이 있었다. 물론, 허드렛일을 하는 잡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숙련된 인부들의 생생한 과정에 항상 곁에 있었다. 가장 보잘것없는 품삯을 얻어가면서도, 가장 오랫동안 일터에 머물렀다. 성실함에 인이 박인 이유도 있었지만, 막시마를 붙잡아 둔 건 흥미로움이었다. 어쨌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새록새록 기억났다. 현재의 일과 과거의 일이 우연히 엮인 행운처럼 불쑥 튀어나온 것 같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인과관계가 있는 선후였다. 사람 사는 모습이 다 거기서 거기일진대, 아무래도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 살았던 방랑자의 경험이 숲 속에 숨어 있는 작은 마을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마을에 머무는 동안 요령이 생긴 막시마는 곧장 늙은 행정관에게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노인은 아주 재밌는 얘기라는 듯 직접 몸을 움직였다. 그들이 간 곳은 돼지우리였다. 거기서 막시마는 가장 까불어대는 놈을 가리켰고, 그 돼지는 이내 밖으로 끌려 나왔다. 길고 가느다란 회초리가 펑퍼짐한 엉덩이에 찰싹찰싹 찰지게 들러붙었다. 그 덕에 이 땅딸보는 갈지자로 어지러이 움직이면서도 의도한 방향으로 엉금엉금 이동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너른 공터에 뚱뚱보를 내버려 뒀다. 그리곤 다들 멀찍이 물러나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봤다. 어느새 이고르와 흄, 농땡이꾼 몇몇이 막시마와 노인 근처로 와 그 영문 모를 광경을 함께 마주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게으름뱅이는 한동안 아무 데서나 퍼질러 누워있더니 따가운 햇살을 못 참겠는지, 행동을 개시했다. 코를 킁킁 거리며 여기저기를 탐색했다. 그러다 한 곳에 머물러 다부진 앞발로 연신 땅을 헤쳐댔다. 부지런한 농부처럼 그 녀석은 동작을 반복했다. 이젠 발이 아닌 코를 사용할 정도로 부드러운 흙을 찾아냈다. 생물의 몸 보이지 않은 어딘가에는 수 만년, 어쩌면 그 보다 더한 장구한 세월을 거치며 터득한 지식이 새겨져 있다. 어마어마한 시행착오를 통해 셀 수 없는 죽음을 대가로 치르며 얻은 생존 본능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도록 핏속 깊이 숨겨져 있다. 오직 그들의 후손에게만 대대로 전해지는 그 방법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몸속에 각인된 본능은 그 어떤 천재적인 학자의 지식보다 더 탁월하다. 여태껏 종이에 이름 적힌 인간들의 모든 삶을 다 더한 것보다 긴 시간이 시시각각 내려온 죽음, 도태, 멸종이라는 가혹한 시험을 통과한 답이니 그럴만하다. 생물은 시련의 자식이다. 인간은 그 시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지독한 생명이며, 막시마는 이 순간 그것을 기꺼이 증명한 셈이다. 도저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고집스러운 문에 서서히 틈이 생기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들은 감탄스러움을 기꺼이 토해냈다. 늙은 행정관은 비밀이 눈으로 확인되자마자 흥미가 다 해버렸는지 조용히 떠났다. 막시마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가장 어려운 일이 끝났습니다. 뭘 망설이십니까? 무명의 농부가 아닌 우물을 파 낸 한 사람으로서 주춧돌에 이름을 새겨야 할 것 아닙니까?"
영악한 막시마는 한 남자를 정확히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남자는 엉겁결에 너른 나무 널빤지로 된 삽을 들고 나섰다. 서걱서걱, 땅은 무 썰리듯 퍼올려졌다. 한동안 두 사람이 힘겨운 몸짓을 보이자, 이고르와 흄을 제외한 나머지들도 부리나케 달려들었다. 막시마는 나중 작업 수월하도록 되도록 넓게 파내려 가되, 접전 좁은 곳으로 집중되도록 반경을 다듬었다.
"이보게, 흄. 자넨 똑똑하니 땅에 물이 고이면 필요할 게 먼지 이미 눈치챘을게 아닌가? 마을 주변에 돌무더기가 있다면 있는 대로 가져다 날라주게. 이고르가 수레를 빌려 함께 한다면 손쉽게 해내겠지. 아무리 서로의 목적이 다르더라도 일단 내기는 이기고 봐야 할게 아닌가?"
두 사람의 눈이 번뜩였다. 못마땅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으나, 몸뚱이들은 이미 방향을 돌렸다. 말을 더 섞어봐야 멋쩍은 상황만 연출될게 뻔할 것이므로 신속히 자리를 뜨는 게 그나마 더 똑똑한 것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막시마는 바른 마음이야 말로 완고한 세상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방법이 맞음을 재확인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생성되는 빛들로 인해 몸에 쌓이던 어둠들이 말끔히 가셨다. 정오의 식사를 두 번 마쳤다. 그들은 신화 속 무생물이나 돌의 정령처럼 단순한 일을 지치지도 않고 반복했다. 이젠 더 이상 삽만으로 흙을 퍼내기엔 한계에 다다랐다. 막시마는 그만 멈추라 일렀다. 그리고 혹여 토사가 무너지지 않도록 가장자리들을 두들겨 견고히 하라 지시했다. 자신은 목수에게 찾아갔다. 거기서 사다리와, 줄 달린 나무양동이를 두 개씩 빌려 나섰다. 돌아가는 길에 자신이 향하는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불길함이 막시마의 심장을 마구 움켜쥐었다. 그는 마구잡이로 달려갔다. 이미 그곳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야단법석 소리를 질러댔다. 몇몇은 질척거리는 주변을 파내려 난리였다. 상황을 파악한 막시마는 극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책임자가 자리를 비운 탓에 닥친 사태였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스스로를 원망하는 감정에 다리가 조금씩 주저앉았다. 천만다행으로 묻힌 사람의 손마디가 보였다. 아무래도 한쪽에서 무너진 진흙이 아래부터 채워졌기에 사람이 아래에서 위로 밀려 올려진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꺼내기엔 흙은 무겁고 제멋대로였다. 막시마는 일단 자신을 휘감은 부정적인 것들을 떨쳐냈다. 기적을 흘려보내선 안 된다. 그는 양동이의 끈을 부여잡고 미끄러지듯 간절함 곁으로 갔다. 양쪽 팔목에 줄을 단단히 동여맸다. 그리곤 사람들에게 뒤편으로 가 있는 힘껏 끈을 당기라고 했다. 자신과 또 다른 한 명은 약간의 공간이라도 확보하려 닥치는 대로 손을 놀렸다. 처음에는 희망의 불씨가 꺼져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전부가 아직 콧구멍이 벌렁 거리는 채로 흙 속에 갇혀버린, 가련한 한 인간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뭉치자, 암소의 미끈한 자궁에서 하나의 생명이 출산하듯 남자가 빠져나왔다. 진흙 양수로 뒤덮인 흙덩이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막시마는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그의 입을 벌려 진흙을 퍼냈다. 그리고 자신의 남은 생명을 나누듯 그의 입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얼마만큼의 수명이 그 자에게 흘러가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제발, 살아나기만을 바랐다. 모두가 눈물로써 기도했다. 그들의 순수한 진심이 누구에게 전해졌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분명한 건 그가 죽음으로부터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몸을 침범하던 죽음을 몰아내듯 그는 상체를 벌떡 세우며 숨을 내뱉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그 놀라운 광경을 직접 보곤 더욱 울부짖기 시작했다. 막시마 또한 그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고맙다고 연신 말했다. 사태가 수습되니 그 남자가 살아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마친 정오의 수프를 찾아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뒤늦게 쫓아온 행정관들은 자초지종을 듣곤 불같이 화를 냈다. 특히나 젊은 행정관은 욕지거리를 해댔다.
"저 망할 놈이 마을을 망치려 작정을 했구나. 공명심에 눈이 멀어 타인을 위험에 빠뜨리는 썩어빠진 놈. 일찍이 너로 인해 재앙이 닥칠 줄 진즉 알고 있었다. 당장 몰매를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이 개만도 못한 자식 같으니라고."
막시마의 입에서는 일언반구 변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의 말이 하나 틀린 게 없다 생각했다.
"당장 저놈을 가두고, 물 한 방울, 빵 한 조각도 내주지 말라. 줄로 목을 졸라 혓바닥을 길게 늘어뜨리게 하고 싶다만 이 마을의 법에 따라 처분하겠다. 이자는 남을 다치게 했습니다. 여기에 이의는 없으시겠지요? 행정관님?"
비시는 거친 태도와 매서운 눈빛으로 헨데를 쏘아붙였다. 늙은이는 일단 침묵했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어느새 이고르가 나타나 막시마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막시마는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의 죗값은 마땅히 자신이 치러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변명은 자신을 비굴한 인간으로 만드는 분칠이고, 책임을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지구상 생물의 맨 밑바닥으로 전락하는 지름길이었다. 양심을 속이거나 자신이 평소 옳다고 여긴 것을 거스른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가비뇽의 법을 머릿속으로 찬찬히 되새겼다. 천만다행으로 다섯 번째 죄는 피했다. 네 번째 법의 적용은 누가 뭐래도 확실했다. 다친 자의 몫까지 일을 하면 되긴 할 텐데 그가 평소에 마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배상의 차원에서 끝낼 문제가 아녔다. 좀 더 중한 벌을 받아야 속죄가 될 것만 같았다. '그는 날 믿었기에 기꺼이 그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난 그를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낼 의무가 있었다. 난 그의 신뢰를 저버리고, 책임을 다하지 아니한 것이므로 두 번째 죄에 해당한다 하여도 어찌 반박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스러운 강아지들이 배곯는 것을 어찌 보랴. 그러나 저 남자의 가족 또한 나의 가족이나 다름없을진대, 그들의 굶주림은 또 어찌 견딘단 말이냐.' 막시마의 마음은 바닥모를 진창으로 빠져들었다. 의식은 이미 육체를 떠나, 세상 저 너머까지 쫓겨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어느 어두컴컴한 창고에 버려져 있었다. 굳이 문이 바깥에서 잠겨 있는지는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판결 내려 가둔 것이었다. 공기 중에 부유하는 미세한 먼지로 인한 자극만이 그가 아직 살아 있는 육신으로 남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어차피 어두운데 굳이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안구에 와닿는 어둠은 무게를 가졌다. 콧볼은 양쪽에서 짓눌려 숨을 들이마시고, 내 쉴 때마다 불편한 소리가 났다. 몸 안으로 들어오는 산소가 부족하자, 신체를 지배하던 불안과 떨림이 잦아들었다. 위기감을 느꼈는지 정신은 말짱해졌다. 차분해진 기분으로 머릿속과 마음을 비워내는 상상을 했다. 처음에는 먼지뿐인 바지주머니를 뒤집어 꺼내 탈탈 털어냈다. 그리곤 가장 갑갑한 명치 부근에 가상의 문을 만들었다. 출입구를 열어 안에 꽉 막힌 무언가를 꺼낸다. 상당히 무거우면서 뜨겁다. 이번엔 머릿속에 끼어 있는 케케묵은 이끼 따위를 고운 솔로 쓸어냈다. 환상에 잠겨 있는 막시마에게 어느새 차분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그는 인간사야말로 온갖 모순과 부조리가 바탕이기에 드물게 찍힌 아름다움이 소중하고 값진 것임을 기억했다. 그렇게 따지고 들자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 별일 아닌 걸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처음에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무릎을 가슴팍으로 끌어와 양팔로 장딴지를 감싼 채 머리를 그 사이로 파묻어 자신을 보호했다. 그러자 창끝이 자신을 겨누는 듯한 예리함이 사방에서 시리도록 감돌았다. 깍지를 풀고 둥글게 말았던 몸을 곧게 펴고 괜스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고요한 주변이 그에게 무서워할 거 없다며 속삭였다. 찌르륵찌르륵 생물들의 울음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이 밤에 왕성하게 활동하는 저 작은 새와 곤충들이 막시마에게 안전을 확인시켜 줬다. 우리 따위가 어떻게 너에게 해를 끼치겠냐며 안심하라고 쉴 새 없이 소곤거렸다. 왼쪽 관자놀이에서 불뚝거리던 핏줄이 잠잠해지자 두통이 진정됐다. 바닷속에서 부유하는 원시 형태의 생물이 산소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만으로 삶의 소임을 다 하는 것처럼, 막시마도 호흡 외 신체 기능을 잊었다. 검은 형체가 시야에 어렴풋 들어왔다. 그것은 사람만 한 크기로 낡은 나무 문을 끼익 열고 서 있었다. 자신을 찾아온 누군가라고 생각했지만 그 정체 모를 방문자는 괜스레 문을 열어젖혔다가 확 닫았다가를 반복했다. 문과 자신을 가둔 어두운 구조물을 잇는 근원에선 이윽고 비명이 들려왔다. 들어주기엔 너무나 괴로운 소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막시마는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어댔다. 그 형체의 행동이 꼴사나워 바라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의 의지로 눈알을 굴릴 수 없었다. 입을 벌려 소리라도 지르려 했으나 역시나 윗니와 아랫니를 하나하나 철사로 묶어 붙여놓은 거 마냥 옴짝달싹 하지 않았다. 갑자기 꺼먼 물체는 막시마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꺄아악 하고 절규의 괴성을 아주 길게 뽑아냈다. 심장이 정확히 한가운데로 쪼개지는 감각을 실감 나게 체감한 신체는 벌떡 일어났다. 반쯤 접힌 채 막시마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순간 한 사람이 막시마가 갇혀 있던 오두막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헨데, 늙은 행정관은 측은한 눈빛으로 아직 정신 못 차린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꿈이라도 꿨나? 내 괜한 걱정을 했군. 숨도 제대로 못 쉬면 어쩌나 했는데.”
입이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그의 혓바닥은 입천장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죽지 않을 정도의 어둠을 겪고 나니 그는 이상한 사람으로 변한 것만 같았다. 왼손바닥으로 입 주변에 자란 수염을 여러 차례 아래에서 위 대각선으로 쓰다듬었다. 자칫 상대를 무시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었으나 역시 헨데는 노련한 사람이었다. 급이 낮은 상대의 직접적인 무례함에 바로 맞부딪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존귀한 자리를 보존했으며 언짢은 기분을 묻고 가는 당위성을 우선 떠올림으로써 감정보다 실리를 취했다.
“내 자네의 딱한 사정을 모르는바 아니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나, 그리고 그 사고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순리일 테지.”
대체 무슨 결론을 던지려 이런 말을 앞세우는지 막시마는 갈피를 못 잡았다. 굳이 말이 향하는 끄트머리를 움켜쥐려고도 안 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심정이 가득했다. 그는 십수 년 전 마을을 떠났던 자신의 심정이 기억났다. 자신의 심장을 옥죄여 오는 압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지경에 다다르니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마음으로 그런 결론을 내렸던 자신, 그때의 막시마가 지금 시간을 뛰어넘어 현실의 몸을 차지했다. 그는 역시 과묵함을 제일의 미덕으로 내세웠다.
“내 직접 비시 드 오르 그자에게 제안을 했지. 내기는 시작된 이상 계속돼야 하니 그자가 바라는 조건을 수용하겠노라고. 생각보다 단순하더군, 아니 내 예상을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까. 그자는 두 집단이 맡은 일을 교체할 것을 요구하더군. 자네를 아무리 가혹히 처벌해 봤자 그건 화풀이일 뿐이지, 본래 자신이 원한 바를 관철시키긴 어렵다 판단한 거지. 거의 다 해냈다고 여겨지는 우물파기를 자신들이 가로챈다면 승리를 거머쥘테고 그러면 그 떨거지들에게 원하는 자리를 얻어줄 수 있겠지. 자네를 끝장내는 건 그 이후라도 언제든 가능할 테니 말이야. 뭐 특별히 범주를 벗어난 사고방식도 아니기에 받아들였지. 그렇지만 나도 한 가지의 조건을 붙였네. 자네에 대한 처분은 그들이 이뤄낸 성과를 면밀히 살펴보고 관대함을 적절히 발휘하는 걸 고려하기로.”
그가 빙빙 에둘러하는 말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치 않았다. 무엇보다 강렬히 다가오는 건 역겨움이었다. 이 와중에서도 자신들의 재미와 알력다툼을 위해 내기를 지속하겠다는 걸 뻔뻔스럽게 내뱉다니 인감에 대한 혐오감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분명 상대는 눈치를 챘을 것이다. 아니 눈치를 채라고 더욱 깊은 주름을 반복해서 만들었다. 이름 모를 숲을 걷다가 썩어가는 멧돼지 사체를 쥐새끼들이 마구잡이로 파먹는 광경을 마주한 듯 불쾌감을 드러냈다. 인간에 대한 그 환멸이 막시마의 눈동자에 선명한 눈부처로 자리 잡아 상대가 거울처럼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지켜봤으면 하는 바람을 간절히 담아냈다. 그게 어리석고도 무의미한 행위라는 걸 막시마는 몰랐다. 순간의 감정을 숨기기는커녕 과장해서 드러내니 그 어찌 멍청한 행위가 아니란 말인가. 더군다나 그가 어설프게 깨닫게 하려는 자는 이 마을의 제일의 막되 먹은 자이다. 아마 연단에 올라서서 사람들에게 오줌을 갈겨댄다 하더라도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맞을 이들이 수두룩 할 터였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럼 오늘부터 제가 변솟간을 짓는 일을 하면 되는 겁니까?”
눈도 마주치지 않으며 막시마는 퉁명스럽게 외쳤다.
“필요하다면 휴식을 취해도 좋다네. 모든 건 자네에게 달렸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네.”
평소 같으면 말을 마치자마자 뒤돌아섰을 노인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막시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고, 늙은이는 길을 비켜주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햇살에 잠시 비틀렸지만, 이내 구정물이 담긴 구유가 눈에 띄었다. 꾀죄죄한 물통으로 그 물을 퍼 정수리에 퍼부었다. 두 번째 의식을 치르려니 냄새나는 발라세가 성을 냈다.
“내가 당신 따위가 열이나 식히라고 어깨가 부러져라 물을 길어 나른 줄 알아!?”
막시마는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늙은 망아지는 씩씩거리며 당장이라도 거친 대거리를 불사하겠다는 듯 목을 쭈욱 내밀고 있었다. 막시마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