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다. 그는 슬픈 눈을 가졌다. 차갑고 쓸쓸한 색깔이 수차례 덧칠 된 캔버스의 유화처럼 분명히 드러난 표상. 그 애달픈 구슬에 처음엔 누구라도 흥미를 갖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관찰자의 발목부터 천천히 차오르는 미지근하고 짠 액체가 스멀스멀 자신을 잠식한다는 걸 아는 순간 누구든 도망치고 싶을 따름이다. 남자도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평소 그는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보단 상대의 울대 부근을 응시하길 원한다. 하지만 대화란 상대와의 교감이 필수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간간히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 그때마다 슬픔을 들키기 싫어 눈에 분노를 담아낸다. 미간에 처음으로 잡혔던 거짓 주름은 나중엔 진짜가 되어 버린다. 어쩔 수 없다.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선 타고난 슬픔을 숨기는 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나름대로 스스로를 통제하던 그의 삶이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어긋난다. 미간의 왼쪽 깊게 파인 일자 구김이 그 신호가 되었다. 서쪽 목적지에 도착한 막시마에게 자리를 옮길 채비를 하는 한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막시마를 보곤 묘한 웃음을 지어대곤 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에게 다가간 그는 한 사내의 손에 들린 도끼를 우격다짐으로 뺏았다. 저항하려는 이의 멱살을 움켜쥐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 손에 날 서린 도끼를 들고 있었기 때문일까. 확실한 건 자신이 타인을 위해 무한한 배려를 베풀기엔 그릇이 굉장히 작았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순순히 물러났다. 홀로 남은 남자는 그제야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곤 사정없이 도끼를 내려찍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한 번,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한 번, 그렇게 그는 뭔가를 끊어내기 위해 집착했다. 부엉부엉 구슬피 들려오던 울음은 지쳤는지 뻐꾹뻐꾹 대며 지저귀었다.
“위대한 인간은 모든 걸 움켜쥐는 사람이 아니라, 버려야 할 건 과감히 놓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간밤에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으셨는지는 도련님의 살갗 벗겨진 손바닥으로 미루어 짐작됩니다. 그러나 뜨겁기만 한 건 결코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지요.”
“난 내가 잘못 행동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턴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단 걸 알겠습니다. 부디 제 조력자가 되어 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제게는 이뤄야 할 일은 너무 많은데 함께 할 이가 곁에 없습니다.”
“도련님, 고독함과 외로움은 다른 이보다 앞서가는 이에게 그림자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건 자신이 죽음을 불사해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신념을 손바닥 뒤집듯 과감히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스스로를 미워해서도, 자신에게 의심을 품어서도, 남을 속이며 지킨 속마음을 부끄러워해서도 안 됩니다. 어제 했던 말과 품은 마음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알고도 떳떳해야 할 것입니다. 도련님은 위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마을의 더 많은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입게 만드는 게 목표일 테지요. 그렇다면 수단이고 방법이 중요한 것일까요? 선하고, 도덕적이고, 인자하고, 모두를 아우르는 그릇 따윈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는 법입니다. 질그릇에 부정한 것을 담는다면 그 냄새가 밸 것이며 그건 깨뜨려야만 합니다.”
“네, 종지만 한 제 그릇을 너무 과신했나 봅니다. 지금부터 어떻게 행동하는 게 가장 현명하겠습니까?”
“우선, 도련님의 편을 만들어야겠지요. 믿을 만한 사람, 어떤 불의도 함께 할 수 있으며, 몰염치함을 감싸 주며, 상대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아줄 사람. 애써 늘어놓는 변명이나 해명에 오히려 불쾌할 사람. 그런 이를 얻으셔야 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전 도련님의 친구이기에 앞서 스승이기에 그런 사람이 되어드리진 못합니다.”
“네, 그 정도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온전한 제 편이 아니여야지만 더 냉철한 조언을 해주실 수 있다는 것도. 스승님이 판단컨대 그럴 기미가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도련님의 성실함과 앞장서려는 태도, 모두에게 똑같이 대하려는 공명정대함, 적지 않은 이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는 건 부인 못할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건 물거품처럼 허무하게 흩어져 버리기 십상이지요. 힘찬 바람이 되고, 무거운 바닷물이 되어줄 그런 사람이 아직 도련님께 자리를 내어주긴 어렵지요. 왜냐하면 아직 도련님이 진짜 권력을 열망하는 사람인지, 그것을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을지, 어디까지 도덕적 신념을 버릴 수 있을지, 얼마나 무섭고 잔인하게 굴 수 있을지,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그런 모습을 보이시고 사람들이 몸서리치고, 혀를 내두를 정도의 잔혹함을 내비치셔야 합니다. 세상엔 검은색을 추종하는 사람은 있어도 무색을 쫓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당신의 말이 제 뼛속 구석구석을 파고듭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두운 제 앞길에 달빛이 되어 주셔서.”
스승은 제자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태양이 고요히 하늘의 중심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시간은 지상 모든 생물의 남은 삶을 야금야금 빼앗는 절대적인 폭군이다. 그 누구도 거스르지 못할 힘을 지닌 그 무형의 존재는 인간의 심장과 보이지 않는 톱니로 맞물려있다. 따라서 심장 속 톱니바퀴가 빠르게 돌아가면 주변의 시간도 쉬이 흘러가지만, 느리게 움직인다면 시간도 더디게 흘러가도록 설계되었다. 막시마의 심장은 쥐 죽은 듯 숨 죽이고 있었기에 그만큼 시간은 천천히 지나갔고, 그만큼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처절히 음미할 수 있었다. 깊고, 진하고, 세세하고, 지루하고, 반복되는 괴로움과 아픔의 지속. 술의 도움이라도 받았다면 견디기 쉬웠을까? 아니 어차피 막시마는 술을 마실줄도 즐길지도 험한 기억을 잠시 놓지도 못한다. 몸속에 퍼지는 술은 금세 핏속에 섞여 뾰족한 결정을 만들어 내 신경 곳곳의 자극을 배가 시킨다. 뇌 주름 구석구석 자리 잡은 세포들도 예외는 아니다. 신체가 느낄 수 있는 최대치의 쓴맛에 허덕이던 고뇌는 살갗을 뚫고 들락거리길 되풀이하다 결국 후회에 다다른다. 삶을 비참하고 참혹하게 만드는 이것이야 말로, 인간에게 평생 삶의 의미만 따지게 만들다가 돌아가지 못할 강을 건너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허무와 허탈로 점철 지을 아주 악독한 씨앗이다. 그것은 인간의 귀에서 자라나는데 주둥이 밖에 없는 주제에 사리에 밝은 것 마냥 똑같은 말을 지껄여댄다. 인생은 참으로 무상한 것이라고. 무의미한 삶을 부여잡고 있는 건 상당히 어리석은 일일 뿐이라고. 지혜로운 자야말로 이런 덧없음을 일찍이 깨닫고 옳은 결단을 내려 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패배적이고, 기만적이고, 유치한 생각들이 멋대로 뒤엉키도록 방치하다 보면 아니, 꾸역꾸역 견뎌내기만 한다면, 시간은 어느새 흘러가 있고 부정적 환상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단 며칠이었을 뿐이지만, 막시마에게만은 수 십일, 수 백일처럼 느껴진 그 무지막지한 괴물에 어찌어찌 용케 버텨냈다. 하지만 그 창살 없는 감옥에서의 수감생활은 주변인들을 상처 입히기 마련이다. 어린 천사들에게 무한히 쏟아지던 막시마의 돌봄이나 애정은 단절되었다.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그들에겐 그보다 더한 불행은 없었다. 아이들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 갔고, 토실토실했던 두 볼은 야위어만 갔다. 그의 스승이 힘껏 그들을 돌봤으나,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쌍둥이에겐 그 어떤 영양도 전달되지 않았다. 막시마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완수해내야지만 마을에서 자리 잡을 수 있으며, 그래야 아버지로서 그들을 끝까지 부양할 수 있다 믿었고, 또 하나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시련을 극복하는 게 참된 본성이라 믿었던 것이다. 즉 스스로 떳떳할 수 있는 존재로서 우뚝 서 보고 싶었던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고 강직한 무언가였다. 그렇게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스승의 말에 철썩 같이 동조해 놓고도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오는 미련한 자에게는 좋은 결말이 펼쳐질 리 없다.
“도련님, 점심 식사는 하셨는지요. 참으로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뱀의 두상처럼 세모진 꼴에 사악한 눈, 간사한 혀를 가진 게라드가 손바닥을 비비며 자신에게 찾아왔다. 막시마는 무시하고 싶어 잠시 망설였지만 그냥 무뚝뚝하게 답했다.
“자네가 날 찾아올 때마다 불운도 동행했지. 오늘은 어떤 음습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줄 텐가?”
남자는 고까운 표정으로 머뭇거리더니, 이내 표정을 다시 비굴하게 지으며 붙임성 있게 말을 이었다.
“도련님, 저는 정말 구제불능한 멍청이지 뭡니까. 자신을 진정으로 위하고 인간답게 대해주는 사람은 우습게 알고, 무시하고 겁주고 개처럼 대하는 사람에게는 있는 힘껏 깨갱거리는 정말이지 한심한 종자란 걸 이제야 알아버린 겁니다. 정말이지 제 몸속 피가 조금이라도 당신이란 인간의 것과 비슷하다면 어찌 이렇게 비굴하게 살아가는지 의문입니다. 저는 제 부모 얼굴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릴 적부터 비럭질로 근근이 먹고살다가 겨우 열 살이 지나자마자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하찮고 꼴 보기 싫은 벌레취급이나 받으니 제가 사람이 맞긴 한 겁니까? 제 부모는 대체 어떤 인간들이었을까요? 그들은 입에 담지도 못할 죄를 짓기라도 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저는 왜 이런 비참한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납득가지 않습니다. 저의 삶의 원동력은 분노이지요. 그런데 비겁한 노여움입니다. 자신을 깔보고 업신여기는 자들에게는 더 바짝 엎드리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감싸주는 사람은 만만히 본답 말입니다. 정말 스스로 말하면서도 낯 뜨겁기만 합니다만, 도련님은 유일하게 절 사람답게 대해주고 인정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물론 제게만 그러신 게 아니라 선함을 타고나시어 마주하는 모두에게 그리하신 점도 잘 압니다. 저는 천덕꾸러기로 태어나 남에게 고마워하는 법이나 은혜를 갚는 걸 배운 적이 없습니다. 시기하고, 탐하고, 얻어먹고, 못되게 구는 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몸에 베인 놈이죠. 그런데 도련님은 절 존중하고, 배려하고, 챙겨주셨으니 제가 도련님을 어찌 참된 인간의 도리로 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냥 상스럽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 표현할 수밖에요. 제가 봐도 전 구역질 일으키는 배설물입니다. 그걸 이제야 정확히 알게 되다니 참담하다는 표현이 적당할지 않을까요?”
막시마는 그가 말하는 내내 도끼질을 멈추지 않았다가, 이내 자루의 끝에 양 손바닥을 두어 도끼머리를 바닥에 대고 지그시 눌렀다. 그의 시선은 땅에 가 있었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제 와서 그 얘기를 내게 꺼내는 연유가 뭔가. 자네의 괴로움을 알아주기라도 바란 거라면 잘못 찾아왔네. 난 남의 고통을 기꺼이 받을 여유도 여력도 없으니, 이만 돌아가게.”
“도련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저의 행동이 옳지 않았음을 이제라도 알았기에 죄송하다는 사죄의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많이 힘드신 거 잘 압니다. 어찌 보면 지금 도련님이 겪으시는 수난이 저로 인해 벌어질 것일지도 모릅니다. 뚫린 입이라고 이런 말을 지껄여대는 것이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막시마는 속으로 이 작자가 또 무슨 허튼수작을 부리려 하는 것인가란 의심이 들었지만 그런 걸 따질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내 자네의 말을 알아들었네. 할 말이 끝났다면 이제 돌아가게.”
막시마는 이번에는 잘린 나무의 밑동 주변 흙을 쪼개듯이 찔러댔다. 빙 둘러 한참을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땅만 쳐다보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자네, 이 마을에서 일하지 않으면 어찌 되는지 모르는가? 내가 알아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왜 거기 그러고 서 있는 겐가.”
“더 이상 저를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자들에게 굽실거리며 살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마을 사람들 중 저에게 그러지 않는 이가 오직 여기에만 계시니 제가 어디 달리 갈 곳이 있겠습니까?”
“허튼소리를 하는 군. 인간은 누구나 같아. 살과 뼈, 피로 이루어져 있어. 다를 바가 전혀 없단 말이야. 타고난 운에 따라 자라는 환경이 다르기에 어릴 적 먹는 것과 입는 것, 자는 게 다른 건 세상의 잔인한 이치일세.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건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에게 부족한 걸 충분히 메울 힘을 갖는다는 것이지. 자네의 말이 진심이라면 부모에게 배우지 못한 도덕적 의리를 이제 와서라도 배운 게 아닌가. 인간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그러나 난 자네가 내뱉은 말 모두를 신용할 순 없고, 그것에 정신을 쏟을 기분도 아니네. 이제 그만 자네가 속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게.”
“도련님, 이제 곧 정오가 다가옵니다. 그 시간만큼은 마을사람 전부가 평등한 자리 아니겠습니까. 부디 저와 나란히 그곳에 나아가 한때 마을을 위대하게 만든 분의 자제와 제가 함께 앉아 식사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 주실 순 없으시겠습니까? 불쌍한 저를 봐서라도 간곡한 청을 거절하진 말아 주시길.”
사내는 불쌍한 눈을 하고 두 손을 모은 다음 무릎까지 꿇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군. 자네의 그간 태도와 행동은 간악하고 상종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한 끼를 마주하여 때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 어서 가세나.”
그들은 아직 거리를 둔 채 이동했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말소리는 서로를 가로막던 마음의 벽이 아주 조금은 얇아졌음을 의미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결과의 원인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인지, 언제부터가 결말을 달리 할 분기점이었는지, 후회보다 환희의 삶을 맞이할 영광은 어떤 복된 자에게 내려지는지, 인간은 알 도리가 없다. 결국 후회는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닌 이상 무의미한 것이다. 어쨌든 그날 이후 게라드는 막시마의 작업장에서 함께 일했다. 둘은 셋이 되더니 넷이 됐으며 어느덧 여섯 명으로 거듭났다. 이들은 힘이 합하여 공동의 목표로 나아갔다. 그들이 하는 일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들이 상대는 수십 아니 수백 년 동안 억세게 자리 잡은 생명들이었다. 그 억척스러운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지독히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단연코 가장 이겨내기 힘든 건 자기 자신들이었다. 특히 게라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말썽이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무수히 많은 감정들이 뒤틀리고 꼬여있어 파고들 틈이 좀처럼 없었다. 수십 년간 바람이 통하지 않은 어두컴컴하고 습한 그 공간은 힘겹게 파고든 산들바람조차도 악취로 만들었다. 가장 골치 아픈 건 그의 지나친 인정욕구였다. 어떤 근거에서 비롯된 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자주 다른 인부들에게 지시를 내리다가 불화를 일으켰는데, 막시마는 딱히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럴만한 명분이 없었다. 표면적으로 이 무리의 우두머리에 임명된 것은 막시마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권위를 내던지고 가장 몸을 함부로 굴려댔다.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있어도 강압적인 명령을 제대로 내린 적이 드물었다. 자신의 솔선이 곧 타인의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작은 원칙들만은 지켜달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평등과 책임, 그리고 일을 열심히 한 사람이 더 인정받을 수 있게 하여 무리의 건전한 사고방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게라드는 계속 어떤 근거에서인지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존엄을 내세우려고 했다. 그를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는 늘 제 분을 못 이겨,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막시마는 산적한 일만으로도 골머리가 썩었으나, 자신을 의지해 찾아온 이를 더 잘 감싸지 못하는 것 또한 인간답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고성이 터져 나왔다. 며칠간 고열 때문에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던 게라드가 뜬금없이 여럿이 자신을 따돌리고 그 주동자가 막시마라 고함쳐댄 것이다.
“자네 몸은 괜찮은가? 사람이 어딘가 아프면 인내심이 바닥나는 법이지. 오늘은 그만 쉬는 게 어떤가.”
막시마는 침착히 사내를 배려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려있었는데, 몇 날 며칠을 자꾸만 커져가는 망상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한 모습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 해는 사람들의 정수리 위로 올라가 있었기에 다들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막시마는 게라드에게 함께 걷자고 권했다.
“자네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는 건 대체 뭔가. 어떤 게 자넬 좀먹는 게야?”
“도련님이 절 제대로 대우해주시지 않으니, 사람들이 절 우습게 보는 게 아닙니까?”
“자네가 말하는 그 대우라는 게 대체 뭔지 잘 모르겠네, 그러나 우린 하나같이 같은 처지에 놓여있고, 공통의 목표를 향해 나가는 동지야. 위아래 구분이 없단 말일세.”
“당신은 지위가 있으니 그런 말을 하시는 게지요.”
“자네들보다 일찍 나와서 가장 늦게 들어가는데 내 모습 어디에 그런 위치가 보인단 말인가? 알량한 내 직분에 허용된 건 이 일이 제대로 완수되지 못했을 때 짊어질 책임뿐이라네. 물론 그로 인해 내려질 벌도 두렵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맡은 일을 해내지 못한 것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야. 자네는 지금 자유로운 신분이야. 자신이 맡은 일 만으로 평가받고 얼마나 인내심을 발휘했는지 증명하면 된다네. 다른 이의 부족을 메울 필요도, 잘못을 대신 뒤집어쓸 이유도 없어.”
“도련님은 다른 이에게 업무를 지시하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판단을 내리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근데 저는 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까?”
“자네는 남들에게 위세를 부리고 싶은 겐가, 일을 잘 해내고 싶은 겐가?”
“당연히 우리의 일을 얼른 끝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지요.”
“자네의 마음이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네의 심정일뿐 타인이 그렇게 느껴야 하지 않겠나? 자네가 이곳에서 특별히 성실하다고 자부할 수 있겠나? 가장 늦게 일터에 나타나고, 가장 일찍 사라지며, 휴식은 오래 취하니 남들이 어찌 보겠나. 먼저 자신의 행동부터 바꾸도록 하게.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결국 진심을 통하기 마련이니 먼저 변화해 보게나.”
“도련님은 스스로가 인정받고 계신다고 느끼십니까?”
“글쎄, 확신할 수 없지. 그렇기에 늘 더 노력할 뿐이지.”
막시마는 말 그대로 타인에 의한 평가에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늘 노력하는 자신이 조금은 자랑스러워 입안에 미소 지으며 답했다.
“도련님의 노고가 타인의 존경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어딨단 말입니까? 아침에만 슬며시 단상 위에 올라 삿대질에 고레고레 소리 지르는 늙은 놈이나 젊은 놈은 어디 뙤약볕의 뜨거움을 알기나 한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갖은 혜택을 다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람직한 걸로 보이나? 내 눈에는 그렇지 않네. 그것은 남을 기망하고 자신을 속이는 행위야.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니까 남을 억눌러 자신의 부끄러운 면을 못 보게 하려는 것이지. 그건 바보 같은 행위야. 우리가 남 위에서 군림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인가? 함께 살려고 태어난 것인가? 잘못된 것은 언젠가 드러나고, 바름이 그 자리를 되찾게 될 걸세.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더 앞장서야 하는 게 아니겠나.”
“도련님은 참 한결같으십니다. 알아들을 것 같으면서도 도통 모를 소리 같기도 합니다. 어찌 됐든 저는 도련님과 함께 하기로 했으니, 절 잘 이끌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는 더 인정받아 마땅하다 확신합니다.”
“거사람 참. 자네야 말로 한결같이 고집불통일세.”
그들은 티격태격하면서도 나란히 걸어갔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어찌어찌 넘어가니 나머지는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말은 못 해도 영험함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를 뿌리들에 대한 경외감이 일의 시작에 거부감을 일으켰을지 몰라도, 그걸 제외하고 나니 정작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또한 그것들은 생명을 잃자마자 목재로 탈바꿈되어 인간들이 이루려 하고 하는 것에 도움을 주니 참으로 아귀가 들어맞는 것이다. 막시마를 필두로 이들은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는 그들의 성과에 더 열을 올렸다. 대충 평평하게 만든 땅에 사람들이 쪼그려 앉기 편하도록 대충 고랑을 파내고 각 사각의 끝에 하나씩, 가운데에 일정한 거리를 벌려 세 개의 기둥을 세웠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이 내기의 또 다른 한편은 어찌 되고 있었을까? 그들은 도무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물이 고이는 곳까지는 찾아냈기에 승부는 이미 난 것이라 확신했건만, 질고, 흐물거리는 문제에 봉착했다. 그 난관에 대한 위험성은 간접적으로나마 톡톡히 맛봤기에 조심하면서 헤쳐나가면 되리라 여겼건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녔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태에 대한 심각성은 커져갔고, 상대측의 기둥이 세워지는 것을 밤마다 몰래 훔쳐보니 조바심은 늘어났다. 그들은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고, 그렇게 됐을 때 마주할 상실감과 허무, 시기심은 마치 까슬까슬한 털을 두른 송충이가 맨 몸뚱이를 기어 다니는 듯 한 괴로움을 일으킬만했다. 사내들은 반목하고 손가락질 해댔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해답을 요구하는 물음에는 답하지 못했다 이 무리의 수장인 알레르 메로빙이 가만히 있어선 안 됐다. 송충이가 찢어진 살갗을 기어이 찾아내 알이라도 낳기 전에 털어내야만 했다.
어느 늦은 밤, 막시마의 집 문을 남자 둘이 소란스럽지 않게 두드렸다. 막시마는 그들을 조용히 안으로 맞이했다. 남자들은 막시마가 권한 자리에 우두커니 앉았다.
“자네가 하는 일은 잘 되고 있는 것 같더군. 우리도 그럭저럭 잘 흘러가고 있네. 뭔가 도울 일은 없는가? 아무리 우리가 승부를 겨루고 있다고 해도 결국엔 둘 다 마을과 주민들을 위한 일이 아니겠는가? 다 잘 돼서 누군가에게 보탬이 된다면 그것보다 보람찬 일이 또 있겠는가? 내가 요즘 하는 고민이 그런 것이라네. 굳이 앞섬과 뒤쳐짐을 구분 지을 필요가 있는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함께 승리자가 될 길은 정녕 없을지 말일세.”
“형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시는 일이 잘 되고 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이기고 지는 건 개의치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진정으로 가치가 있었으면 하고,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했으면 합니다. 늦더라도 잘 해내고 싶습니다. 형님이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그리 되길 바랍니다.”
막시마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순수를 표했다. 반면 그의 답을 들은 둘은 마뜩지 않다는 표정으로 찡그렸다. 동행한 남자 하나가 눈알이 튀어나올 듯 과격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아니 말귀가 정말 어둡군. 아님 우릴 골탕 먹이려 모른 척하는 거야? 지금 메로빙 형님이 말하려 하는 건······.”
“어허, 성급하게 왜 이러나. 지금 자네야말로 내 의도를 왜곡하는 것임을 어찌 모르나. 난 진심으로 막시마 쪽과 우리가 마을에 의미 있는 일을 완수하고, 다 같이 축복받았으면 하네.”
사내는 짐짓 점잔을 빼며, 칼 레도를 나무랐다. 막시마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피로한 육체에 비례하여 타인에 대한 관대함은 쭉쭉 줄어들었고, 곧 짜증이 밀려왔다. 전에 받은 밀가루 한 줌만 아니었다면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거면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형님들 제가 고단한 탓인지 말뜻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내일 다시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요?”
그들의 표정은 노골적으로 막시마의 말에 불만을 표했다.
“아무래도 미룰 대화는 아닌 듯하군요. 그렇다면 이 어리석은 동생이 알아들을 수 있게 제가 무얼 해드리면 될지 제대로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건방진 놈 같으니, 네놈 따위가 우리에게 뭘 해줄 수 있길래. 그런 말을 지껄인단 말이냐.”
“가만히 있으라 하지 않나! 자넨 차라리 나가 있던지 하게. 쉽게 할 말을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네.”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으나, 받아들이는 쪽에서 그랬다면 제 잘못인 거지요. 이대로 이야기를 이어가시지요.”
한 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침묵했고, 가식적인 자는 미소를 띠었다.
“우물 파내는 일은 막바지에 접어들었어. 그런데 도통 틀이 만들어지지 않는단 말이야. 그래서 나뉜 두 패를 잠시 하나로 합쳐 힘을 모으는 게 어떤가? 틀만 만들고 나면 곧바로 자네들이 하는 일을 도와주겠네.”
“흙이 질어지면 우물을 쉽사리 쌓기 어렵지요. 저희가 베어낸 크고 굳은 나무가 여럿 있습니다. 그걸 잘 다듬어서 두터운 널빤지로 만들고, 그걸 팔각을 이루도록 박아 넣은 다음 안쪽부터 돌을 쌓아 올리는 겁니다. 그러려면 만들려는 우물보다 땅을 더 넓게 파내야 하겠지요.”
“그렇지, 내 말이 그 말일세. 그럼 내일 우리가 자네 쪽으로 가서 목재를 다듬는 걸 도와줄 테니, 옮기는 걸 함께 하세나.”
“아닙니다. 형님네는 땅을 미리 넓혀 놓으셔야 합니다. 저희가 널빤지를 마련해서 넘어 가지요.”
“그게 훨씬 시간을 절약할 방법이겠군. 우리 끼리니 하는 말이지만 늙은이의 철없고 유치한 장난에 놀아날 이유가 있단 말인가?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는 나와 바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자네가 힘을 합하면 무엇인들 못해낸단 말인가? 내 솔직히 털어놓지만 언제부터 그들이 이 마을의 대소사를 이러쿵저러쿵할 권한을 가졌단 말인가? 자네 아버지와 우리 아버님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저들은 황무지에서 비명횡사했거나 평생을 비렁뱅이로 살았을지 모를 일 아닌가? 우리가 똘똘 뭉쳐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단 말이지. 아니 그러한가?”
“형님 말씀대로 저희 아버님들이 아니었다면 이 마을이 존속하지 못했겠지요. 그분들의 헌신은 분명 기릴 만한 것이지요. 누구도 부정할 수도 부정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또한 형님은 이 마을을 계속 지켰으며 인자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계시니 분명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앞으로 큰 일을 해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전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가진 경험은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고 내세울만한 것도 아니지요. 저는 그냥 제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 자네가 머무르는 이 집과, 한 뼘의 땅 위에서 바들바들 떨어대는 여름지기로 살아가지 않는 것 자체가 특혜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가진걸 당연하게 여긴다면 언젠간 잃기 마련이지. 지금 자네가 당장 손에 쥐고 있다 할지라도 누군가는 그 손아귀에 있는 걸 빼앗아가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말게나.”
잠자코 있던 사내가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네. 칼 형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집에 살고 있는 까닭은 하나뿐인 혈육과의 추억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고, 농부가 되지 않는 건 땅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분들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저야말로 뿌리내리지 못한 인간이죠. 자그마한 구실만으로도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 버릴 겁니다. 제 부족함과 한계를 절실히 알고 있기에 전 맡은 일을 그대로 해내고 싶을 따름입니다.”
막시마의 맞은편 사내 둘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 앞으로 우리가 함께 이야기 나눌 시간은 종종 있을 테니.”
그들은 다음날부터 온갖 열의를 발휘했다. 한쪽은 자신들만을 위하여, 한쪽은 공동을 위하여.
“게라드는 잘 적응하고 있는가?”
밤의 회합이 열린 지 닷새째 되는 날. 메로빙이 막시마에게 질문은 던졌다.
“그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막시마는 솔직한 심정으로 답했다.
“조심하게, 그자는 천성이 글러먹었어. 최초의 인간에게 죄악을 알려준 그릇된 동물과 같이 그는 타인에게 부정을 심어주는 자일세. 아무리 경계해도 지나치지 않을 걸세.”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쌓았어야 할걸 원치 않게 뒤늦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사람은 인간이란 이름이 붙기 전에, 짐승이라 불렸다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이의 생살을 찢으며 나온다는 걸 잊지 말게. 우리도 그자를 곱게 보려고 갖은 애를 썼지. 하지만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삐뚤어진 게야. 그건 불멸자가 아닌 이상 감쌀 수 없는 거지. 말 한마디를 재료 삼아 망상을 펼쳤고, 자격지심은 무한한 분노와 미움을 만들어내더군. 한마디로 구제불능인 자야.”
“좀 더 지켜봐야지요. 형님이 말씀하신 걸 아예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한때 그가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 일은 덮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형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우린 모두 부족한 죄인일 따름입니다. 우리끼리 서로를 감싸지 않는다면 어떤 존재가 우릴 이해하겠습니까.”
“우린 늘 더 나은 선택을 해야만 해. 앞서가는 자의 숙명 같은 거지. 따라서 쳐진 부분이나 해악이 될 부분은 과감히 쳐내야 하는 거야.”
“단순히 앞장서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다수를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종자의 부족함마저 감싸 안을 수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 돌출부가 나를 향한다 해도, 상처 입는 것을 범사로 여기어 굳어진 피딱지가 살이 될 때쯤이면 아무리 모진 일도 풀려있기 마련입니다. 마침내 그것을 이룩하여 얻는 환희의 축복은 오직 땀냄새로 찌든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동고동락한 자만 얻을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에 대해 그리고 타인에 대해 얼마나 이해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둘의 의미 있는 대화는 여기까지가 마지막이었다. 어느 날 막시마와 게라드는 어깨를 나란히 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게라드가 복잡한 속내를 털어놨다.
“도련님, 그자들에게 왜 놀아나십니까? 그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허울뿐인 자리의 높이에만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사람을 깔보는 자들에게는 바닥처럼 엎드리고, 사람을 위하는 자들은 우습게 여겨 언젠가는 짓밟을 궁리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예의, 보은, 감응이란 단어는 예진즉 지웠습니다. 그들은 남의 살을 뜯어 자기 뱃속을 채워야 하는 짐승의 논리로 살고 있습니다. 그자들에게 어떤 인간적인 모습을 바라는 순간 당신은 썩은 고기냄새가 나는 걸신 아가리의 송곳니에 잘근잘근 씹힐 겁니다.”
막시마는 섣불리 반박하지 않았다. 그의 귓속으로 전해지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단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타인을 헐뜯기만 하는 그의 부족함이 두드러져 보였다.
“자네 말은 알겠네. 지금 우리가 맡은 일이 마무리되는 것이 중요하지. 하지만 그들의 일 또한 마을 모두를 위해 큰 도움이 될 걸세. 어찌 보면 이 지붕을 올리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일지 몰라. 이와 이리된 거 힘을 합해 공동의 목표를 이루도록 하세나. 사람에 대한 감정은 잠시 뒤로 미뤄두는 게 나을 걸세.”
그는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사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닥친 일들을 해낼지에 몰입해 있었다.
“당신이 지금 해낸 일이 혼자만의 힘으로 해냈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단 한 번도 그리 생각한 적 없네. 자네와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여기까지 오는 건 꿈도 못 꿨을 테니.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아직은 내가 힘이 없지만 언젠가 자네들에게도 뭔가를 나눠줄 권한이 생긴다면 반드시 보답할 걸세. 부디 그런 오해는 말게나.”
“도련님이 권한을 얻을 수 있다고 누가 그럽디까? 지금 당장 이 내기에서 이겨야지만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단 말입니다. 당신의 물렁한 마음가짐은 털나고 네 발 달린 것들의 한입거리 먹이가 되기 십상입니다. 난 결코 그런 운명을 함께 걷지 않겠습니다.”
“자네는 인간의 따스함을 쫓아 날 찾아온 게 아니었나? 그들의 비정함에 상처 입어 내게로 찾아온 게 아니냔 말일세. 그 벌어진 흔적 안에 썩은 응어리를 품고서는 절대 아물지 않는 법이야. 자신의 삶이 타인에게 휘둘려선 안 돼. 자네가 한 일은 남을 위해서 한 것도,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쓴 것도 아니야. 오로지 자신에게 떳떳해지고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어. 그 소중한 기억으로 자넨 뭐든지 할 수 있단 말일세. 그걸 당장의 하찮은 것들에게 뺏기지 말게나.”
“어째서 당신 말이 무조건 옳은 것이라 확신합니까? 당신이 갖고 있는 편협한 사고가 모든 걸 품을 수 있다는 역겨운 생각은 마시오.”
“그런 이야기가 아닐세.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남들에게 휘둘려선 안 된다는 거야. 진정으로 나만의 삶을 살려면 남의 추악함을 입증하려 들지 말고,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야 해. 존경은 받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것처럼, 타인과 상황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반성하고, 돌보고, 가꾸면 언젠가는 그 어떤 것에도 두려워할 필요도, 흔들릴 이유도 없지 않겠나?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인가. 나 자신 그 자체로 꾸미지 않고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저 나무를 봐. 세 아름드리나 되는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어떤 인내를 견뎠을지 상상해 봤나? 처음에는 자신의 연약하고 야들야들한 순살을 찢는 것부터 시작하지. 단단한 껍질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수문장이야. 원래는 외부에서 침범하려는 신물을 막아주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네. 그 임무를 마치면 그때부턴 가혹한 시험자로 돌변하는 거야. 내부에서 자라나는 힘이 바깥세상에서 통할지 아닐지를 판가름하는 거지. 야무진 그놈은 타협이란 걸 모르지. 어둡고 무거운 지하세계에서 적극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을지, 혹독한 칼바람과 작열하는 태양을 온종일 견딜 수 있음을 증명해 보라며 버티는 거야. 자신을 보호해 주던 자가 어느 날부턴 날 답답하게 옥죄는 존재로 변해버리니 속살은 분노와 오기를 양분 삼아 자라나는 거야. 자신을 향해 사무치는 미움에도 꿋꿋이 안을 감싸던 껍질은 어느 순간 몸이 뚫리고, 쪼개지지. 결국 몇 조각으로 갈라져 자신이 감싸던 부드러운 것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지. 부드러운 속살은 그때부터 잔인한 세상의 진실을 맞닥뜨리는 거야. 살아남기 위해선 더 이상 하늘의 변덕에만 의지 할 수 없다는 것. 야들야들한 뿌리로 단단한 걸 만나면 틈을 파고들고 무른 걸 만나면 활짝 펼쳐가며 갈증을 해결하지. 그뿐인가, 거대한 땅이 끄집어 내리는 힘을 이겨내고 하늘로 커가는 줄기는 때로는 몸뚱이의 일부를 다채롭게 피우다가도 과감히 떨어뜨린다네. 그 지루한 행위를 수백 년 동안 묵묵히 해내는 거야. 인간에게 그 정도의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단 말이지. 너무나 신비롭지 않은가? 단순함이 쌓여 위대함을 이루고, 부족함이 도리어 찬란함으로 변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느냔 말이야. 자네를 둘러싼 단단한 껍질은 이미 깨졌어. 돌무더기에서도 싹을 틔우는 저 생명보다 자넨 큰 힘을 갖고 있어. 우리 산 것의 위대함을 함께 이루세나.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인생의 황혼에 지나온 삶을 도란도란 추억으로 나누면 얼마나 뭉클하겠나. 부디 우리가 하는 일에 들러붙는 무가치한 것들은 털어내 버리고 진짜에 몰두하세나.”
“당신의 말을 잘 알아들었으니, 그만하시지요.”
떨리는 목소리는 뒤편에서 들려왔다. 막시마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앞선 자의 무릎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눈은 치켜뜨고 있었다. 흰색 눈알에 이글거리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오늘 고생 많았네. 시간은 많으니 앞으로 더 이야기하세나.”
“당신에게 맡긴 내 희망을 되찾아 가야겠습니다. 나는 내 권리를 찾아야 해. 나는 하루하루를 억압당했어. 내가 당신들에게 주눅 들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 내가 갈망하는 욕망은 당신의 머뭇거림보다 훨씬 깨끗하고 맑아. 당신은 패배자야. 그걸 아무리 허울 좋게 포장한다 해도 추잡스러울 뿐이야. 비렁뱅이 주제에 고귀한 품격을 간직한다는 것만큼 속을 메스껍게 하는 게 있을까.”
“난 이 마을에 다시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맡은 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버텼어. 그게 겉으로는 날 괴롭히기 위함이었던지, 윗사람들의 장난기 어린 결정에 놀아나는 것인지 개의치 않았지. 발단 따위는 무시한 채 모든 것이 완전히 끝마쳐진 뒤에 발생할 마을 전체의 이익만을 따졌어. 네놈 따위가 뭘 알아. 남의 마음과 말은 제대로 헤아리려 하지도 않고, 악의와 증오만으로 세상을 대하는 네놈이 뭘 제대로 판단 한단 말이야. 아무리 너를 품으려 해도 넌 결국 제자리야. 네가 그 따위 태도로 구는 이상 누가 너와 진심을 나눌 수 있을까. 그래, 네 놈이 이쪽으로 온 뒤에 큰 도움이 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매일같이 남을 헐뜯는 소리에, 허구한 날 늘어놓는 얼토당토않은 네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거나 널뛰는 기분을 챙겨주지 않으면 그날 일은 말짱 꽝이지. 그런 날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나? 그럼에도 난 자네에게 핀잔 대신 격려와 배려를 해줬는데 기껏 되돌아 온건 이건가?”
남자와 사내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 이후로 게라드는 막시마에게 말을 걸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막시마는 그에게 시간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예전에도 기분 내키는 대로 일을 해왔지만 이제는 아예 대놓고 농땡이를 부렸다. 낮 시간의 태반은 행방불명이었다. 그는 양 쪽 작업장을 오가며 고군분투해 댔다. 우물은 형태를 잡아가고, 변솟간은 지붕을 올리는 일만 남았다. 확실히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점점 이 일을 함께 시작한 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새롭게 투입된 농부들이 일을 도와주긴 했으나, 일을 결말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막시마는 마을의 늙은 행정관을 찾아갔다.
거실로 들어서니 이고르, 흄이 외부인을 빤히 쳐다만 봤다. 막시마도 굳이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고, 직접 방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행정관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나는 특별히 나눌 말이 없네.”
“지금 하는 일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는데, 조금 지지부진합니다. 일을 시작한 사람들도 다들 어디론가 가버렸고요. 혹시 그들이 제가 모르는 별도 지시를 받은 게 있을까요.”
“그럼 잘난 네 놈이 다 해내면 되잖아! 입으로는 못 할 일이 없지. 당장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는 끝끝내 눈도 마주치지 않고,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만 질러댔다. 남자는 영문도 모른 채 일단 물러나야 했다. 둘 뿐이던 거실엔 어느새 셋이 앉아 있었다. 그중 뱀의 눈을 한 자는 쿡쿡대며 웃어댔다. 막시마는 밖으로 나서야만 했다. 고독함이 입안에서 소용돌이쳤다. 푸른 하늘이 휑하니 시리도록 차갑게 느껴졌다. 바깥의 햇살은 분명 여전히 맑았지만, 웬일인지 그날 이후로 세상은 흐려진 것만 같았다. 그는 잠시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홀로 멋쩍게 웃음 지었다. 어디론가 가야 했지만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니 그리운 집에 다다랐다. 집안으로 들어섰지만 적막함과 오래된 먼지만이 그를 맞이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그만의 보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무서우리만치 조용했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도망가고 싶었다. 순간 까르르 대며 집안으로 들어오는 천사들의 음성이 들렸다. 헤로도 가 그들에게 햇살을 쬐어주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코끝이 찡해왔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물러나선 안 됐다. 그는 쥐 죽은 듯 집밖으로 빠져나왔다. 막시마는 안간힘을 내 작업장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무의미한 일을 반복해 댔다. 석양과 함께 세 남자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들의 접근 의도를 막시마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