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그러나 휴식을 원하는 건 분명했다. 지친 몸은 쉴 곳을 찾으라며 몸부림쳤다. 어느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을 장소로 피하고 싶었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집회장으로 들어가 단상 바로 앞에 놓인 긴 의자 위에 옆으로 몸을 뉘었다.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양심이 깡그리 사라졌다 하더라도 옷으로 부끄러운 부위를 가리며 살아가는 한 께름칙함과 불편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은 피하기 마련이다. 난 이 집회장을 우스꽝스럽게 여길 뿐, 거리낄 게 없았다. 그것이 내가 바로 이곳을 찾은 단 하나의 이유였다. 아둔한 족속들이 헛된 소망을 덧씌워 열렬히 추앙했던 그 문양을 지그시 바라봤다. 본인의 창피함 앞에서는 장님처럼 구는 그들은 마음속에 커다란 결함을 갖고 있다. 그 어떤 육체의 부자유보다도 더한 제약이 삶을 지배한다. 옛 고대 신들은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미워하기도 하고, 안쓰러워도 하고, 답답해하기도 했다. 어리석고 불완전한 자신들의 피조물을 바라보며 말로는 이루 다 표현 못 할 감정들을 품었다. 심지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와 필멸자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이야기도 적잖이 전해진다. 하지만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과 지금 시대에는 더 이상 그들이 내려오지 않는다. 포기해 버린 것인가? 무서운 신화처럼 일시에 우리를 쓸어버릴 묘책을 강구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인간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왔지만 범인(凡人)의 형상에 갇혀 있기에 신의 권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이미 대다수가 타락해 버린 인간을 소수 불멸자들만의 힘과 의지로 바꿔 놓기엔 이미 늦어버린 걸까. 아니면 인간을 너무 믿어 그들이 부여한 자유의지를 절대 거둬들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지키기 위함인가? 결국 인류는 스스로 기막힌 파멸을 빚을 운명인 것인가. 그렇다면 우린 어떤 모습의 최후를 맞이해야지만 가장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길일까. 낡고 오래된 목조 건물의 뒤틀린 곳으로 선선한 바람이 자꾸 스며들어온다. 이런저런 생각에 혼란스러워하던 난 아늑한 요람에 든 아기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보세요, 어찌 이곳에서 잠들어 있는 겁니까?”
나이 든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날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익숙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사장 집에서 일하던 여인이었다. 잠을 충분히 잔 것 같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언짢은 기분을 표출하고 싶었다. 조금만 더 푹 자고 일어났더라면 세상이 알아서 나은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난 뒷 목에서부터 확확 퍼지는 찝찝한 기분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괜히 애꿎은 여인에게 소리 질렀다.
“여기서 잠을 자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벌써 바람이 차요.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나도 모르게 윗옷을 여미다가 당신이 잠들어 있을 걸 보고 걱정이 되어 한 말이에요. 날 너무 몰아붙이지는 마세요.”
사무엘 얼굴에 순간 붉은 기운이 돌았다. 걱정하는 마음에 건넨 말에 법 따위를 운운한 얄팍함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걱정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겐 여기가 집보다 편합니다. 이곳만이 유일하게 저를 잠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여기는 더 이상 본래의 목적으로 쓰일 수도 없고, 아무도 애써 찾아오지 않을 곳입니다. 문제가 안 된다면 계속 여기서 머물고 싶습니다.”
말을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정신이 맑아지고 기운이 도는 것만 같았다. 중년 여성은 엷게 미소 지으며 내 말에 호응했다.
“맞아요. 이곳은 원래 누구나 가장 편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이었어요. 제가 어릴 적에는 큰 칼을 차신 분이 저 위에 올라서서 우리에게 늘 뭔가를 얘기했는데 솔직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아요. 그러나 그 말이 부드럽고 온화해서 잠이 늘 절로 왔지요. 큰소리가 한 번도 울리지 않았어요. 사람들의 얼굴도 평온하기 이루 말할 데 없었지요. 거기다 그분은 늘 집회를 마치고 떠나는 우리에게 숲 속에서 따온 산딸기며, 너도밤나무, 때론 밭에서 일군 감자 같은 걸 주셨지요. 그렇게 우린 이 공간으로 나오길 좋아했고, 떠날 때는 얼른 다시 돌아오고 싶어 했습니다.”
사람들을 가혹하게 밀어붙였으면서도 눈앞의 이들을 가장 아꼈던 한 인간, 사람들을 그리 많이 죽였으면서도 제대로 된 세상과 인류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주장한 괴물. 그는 여기서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무엘이 공백을 만드는 잠깐사이 그녀는 그로부터 한 두 발짝 떨어진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무래도 목적이 있어 이 공간으로 나온 것처럼 보였다.
“당신은 저주받은 제사장, 그 거짓말쟁이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시지요? 어째서 이곳에 오신 겁니까? 저처럼 편한 곳을 찾아오신 건가요? 아니면 그 기만꾼의 헛소리가 그립기라도 하셨던 겁니까?”
말을 마치자마자 나는 또 뜻하지 않게 공격성을 드러낸 것에 후회했다. 본래는 그녀가 왜 이곳에 온 것인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추잡한 제사장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가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채웠다는 것에 분개하다 보니 주체 못 할 적의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그 대상은 분명 잘못됐다. 나는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을 법한 존재 앞에서 내 분노를 비겁하게 표현해 버린 것이다. 참으로 부끄러웠다. 그녀 또한 그녀를 향한 추악한 본심을 몰랐을 리 없을 텐데도 다시금 날 감싸주며 말했다.
“저는 죄를 지었어요. 아직 적당한 벌을 받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고요. 얼른 제가 저지른 것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치르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건 제 대신 피를 묻힌 가엾은 여인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죄인으로서 이 자리로 나온 것을 알았다. 하지만 상세히 들어야지만 내 안의 의문이 말끔히 해소될 터였다. 내 마음을 헤아렸는지 그녀의 입은 열렸다. 오히려 누군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길 고대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만큼 고민의 흔적은 없었다.
“제가 모셨던 제사장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이 공간을 새빨갛게 칠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드러나지 않는 음흉한 속으로 무슨 마음을 품었고 여기서 무슨 설교를 했길래 당신이 그리도 분노하는지 추측만 할 뿐이지요. 저는 그 자가 여기로 온 이후 이곳에 나오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 그자가 거짓말쟁이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세상이 낮과 밤으로만 구분되고, 해와 달, 땅과 나무, 그리고 사람과 짐승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밖에 모르는 무식한 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모자란 저라도 인간이라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분간할 수 있습니다. 설령 어떤 악인은 이 세상에 반드시 필요하다 할지라도 필히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자는 그것에 대해 분별을 안 했지요.”
그녀는 어릴 적부터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녔다. 잡다한 집안일 말고는 겪은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최소 이상의 도덕과 지성을 갖추어 나를 대했다. 그녀에게 단연 돋보인 지각 능력은 자신과 딸이 각기, 때로는 동시에 당하던 입에 담지 못할 짓에 대한 부당함의 호소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잘 알았다는 점이다.
아무리 그녀가 위정자들을 앞에서 조리 있게 그의 죄를 낱낱이 밝혀도, 마치 바로 앞에서 지켜보는 듯 생동감 있게 묘사할 말솜씨를 발휘한다 해도 마땅히 치러져야 할 벌이 묻혀버릴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그녀는 감정을 억누를 줄 알고 아직 펼쳐지지 않은 상황마저 내다보는 밝은 지혜까지 갖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확실한 몇 가지를 각인시켰다. 그자의 죄는 분명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 지상에는 수많은 악행들이 벌어지고 있기에 순서대로 해결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결국은 벌이 내려질 수밖에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믿음을 단 하루도 잊지 않았으며, 소홀히 하지 않도록 매일 깊이 간직하고 애지중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냥 기다리기만 했다가 살아생전에 그가 단죄받는 모습을 못 보면 어쩌지라는 불안에 다다랐다. 너무나 많은 시간이 남았을지 모른다. 병에 담긴 꽃이 물 덕분에 생생함을 잃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에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영혼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는 화수분처럼 무한히 샘솟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매일매일 말라가기만 하다가 결국 꽃을 시들게 하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그녀가 조바심을 내자 영혼의 고갈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이내 남은 것은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의 마음가짐은 조금 바뀌었다.
‘천벌이 확정된 짐승에게 미리 인벌을 내리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준비, 그리고 그 이후 상황을 의도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계산이 선 경우에만 시행해야 한다. 그녀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복으로 여긴다. 어린 시절 얼마나 불행한 상황 속에서 자라났는지, 그리고 생에 내내 눈살 찌푸리게 할 고단함과 삼키지 못할 슬픔을 얼마나 두껍게 걸치고 있었는진 개의치 않았다. 생명의 잉태와 삶의 지속 자체가 기적이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그녀에겐 그 기적을 최후까지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자신이 실행할 처벌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지 삶을 포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녀는 알맞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바람이 매섭게 부는 어느 날 그녀의 구원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 구세주는 천상의 미모를 지녔다. 기꺼이 자기 몸을 희생함으로써 모녀의 영혼이 추접한 악에게 빨아들이는 걸 늦춰주었다. 그녀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일지 않을 평화로운 날을 골라 쇠꼬챙이를 준비했다. 악의 활동이 격렬하다 못해 절정을 지나 모든 긴장이 풀린 잠시를 틈타 악을 처단하고자 다짐했다. 자신들을 스스로 그 구렁텅이에서 꺼내고자 했다. 물론 그 발판은 자신을 바쳐 온몸으로 그 악을 받아낸 이방인이었다. 인간의 말을 아직 배우지 못한 그 희생양에게 자신이 오랫동안 작정한 일을 뒤집어 씌우면 끝이었다. 직접 목격하지 않은 사람 모두를 속여 넘길 상황으로 꾸미기에 충분했다. 잠들기 전 언제나 머릿속으로 그려봤고,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을 펜촉 삼아 어디든 그려봤다. 명백한 죄에 정당한 벌이 내려졌다는 것만으로 성녀는 누명의 멍에를 짊어질 터였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분이 지상으로 강림한 이유라 믿었다. 모녀는 왼쪽 눈으로는 자신들로 인해 이뤄질 천벌에 감격의 눈물을, 그리고 오른쪽 눈으로는 성스러운 여인의 희생에 대한 감사의 눈물을 흘릴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사람이 뜻 한 대로 흘러가는 세상의 경우가 얼마나 있으랴. 일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녀들을 포함하여 그녀들이 사용하려 했던 여인까지 자유의 몸이 되어버렸다. 악을 직접 처단한 용감한 처자들은 마을의 혼란스러움 덕분에 마을 주민이기에 받아야 할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 이야말로 하늘이 꾸민 짓이라 짐작될 만했다.
그 어떤 속박도 중년 여인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았건만, 그녀는 스스로 만든 좁은 감옥 안에서 허둥지둥 댔다.
그녀는 방황하는 나를 가련히 여기다 이곳을 떠났다. 난 갑자기 의자 위로 올라가 양팔을 벌려 퍼덕퍼덕 날갯짓을 해댔다. 난 나를 억누르던 그 어떤 억압이나 부담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이내 너무 가벼운 몸짓을 허공에 의미 없이 흩뿌리다 공허함만 확인했다. 같은 행위를 몇 번이나 더 반복했다. 만족할 만큼 아니 나 자신을 잃을 만큼. 갑작스레 세상이 참으로 가볍게 느껴졌다. 이전의 나였다면 결코 갖지 못했을 희열이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득 힘을 비축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게 내려질 무거운 운명의 무게를 떨쳐버리고 단박에 비상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꾹꾹 눌러 담았다.
나는 이 마을과 사람들이 결국 벌을 받기 위해 순번을 기다릴 뿐이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인간임을 증명할 영혼의 한 방울마저 증발해 버렸기에 이 땅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게는 창백한 남자처럼 칼을 휘두를 능력이 없었다. 거기다 아직 족히 이 백 명은 될 법한 이들에게 공평히 내려 주기엔 그 벌이 너무 부족할 것 같았다. 난 밤새워 기도했다. 이리 간절히 바라노니 나를 둘러싼 이 거대한 흐름이 부디 예정대로 마쳐지도록 해달라고, 그것도 가능하면 빨리, 최대한 거칠게 휘몰아쳐주길,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므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바삐 움직여 본 적 없는 이른 새벽, 해지기 전까지 마쳐야 할 일이 너무 많은 농부처럼 움직여 댔다. 어느 농기구 창고에서 찾은 작은 날붙이를 내 가죽양피지 가방에 넣었다. 미미한 일일지라도 조금씩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농사를 지어본 적은 없지만 작은 씨앗을 뿌려 여럿을 먹여 살리는 농군처럼 성실히 해내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연했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이어지는 지적 승계가 끊긴 것이 불만스러웠다. 누군가의 지혜를 구하고 싶었으나 그럴만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영적 존재의 계시에 기대야 했다. 가장 맑은 영이 기거할만한 곳으로 무작정 나아갔다. 고요한 가운데 풀벌레가 찌르륵 대며 자연을 찬양했다. 그는 자신을 덮고 있는 모든 굴레를 벗어던졌다. 아득히 먼 선조가 부끄러움을 알기 이전으로 돌아가 순수함을 회복하고자 했다. 자신이 갈구하는 것이 얼마나 지고지순한 것인지, 알아주길 바랐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얼굴을 땅으로 처박았다. 어떤 것이 와 자신을 뜯어먹을지라도 움직이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바칠 것이 혐오스러운 몸뚱이뿐이기에 그것으로 만족해 주길 원했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겠지만, 분명 신은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을 내려주실 것을 믿었다. 악신이시여 제 순백의 살의를 갸륵히 여겨주소서. 그는 잡념을 비우고 몸과 마음을 무의 지경에 이르게 했다.
‘콧속으로 흙내음이 흘러들어왔다. 낮게 깔린 찬 공기에 가둬진 생령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이름조차 다 알지 못할 수많은 생명들이 이리 가득한데도 그들은 조화롭게 살아간다.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저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부족함만을 채우기 위해서만 서로를 잠시 빌리며 살아간다.
상대를 말살시킬 의도를 갖지도, 절멸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은 흡사 형제들처럼 다퉈가며 서로가 가진 것을 뺏고 뺏기지만 죽음이라는 고요한 영면에 들어서면 살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행동들은 잊히고 그들은 어느새 한데 어울려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
큰 형체는 갈가리 분해되어 작은 알갱이로 돌아가고 뒤섞인다. 그들은 어머니의 품으로 되돌아가 다음 생을 준비한다. 둘이 하나가 되기도 하고, 하나가 둘로 쪼개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오로지 인간만이 이리도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일까. 다른 것들이 갖지 못한 영혼을 가졌기 때문일까. 어차피 대지의 일부가 되는 건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이 오만한 존재만이 타 종족의 생사여탈권을 움켜쥐고, 그것들의 삶을 아무렇게나 규정하여 쓸모를 정해 마구 다루는 것일까.
애초에 이들이 이럴 목적으로 태어난 것이라면, 감히 보탤 말이 있겠느냐만 자비롭고 자애로운 절대자가 단순히 인간에게 짓밟히라고 다른 생명들을 태어나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백번 양보하여 우리 인간의 육신에만 넋이 담겨있고, 회개를 통해 다시 살아갈 기회를 얻는다는 점에서 얼마간의 이기심이나 잔혹함을 허락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이나 양심, 도덕적 가치들을 지켜야 함에 틀림없다. 거기다 같은 모습을 지닌 타인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함은 누구도 부정해선 안 될 진리일 것이다. 그게 다른 존재들을 맘대로 다룰 수 있는 거만함을 용인하는 유일한 약속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리 간단한 이치조차 잊는 무지한 자이다. 오직, 뼈저린 교훈으로 자신들이 잊은 것들을 깨우쳐야만 한다. 답답한 소리, 잔악함이야말로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신은 점토로 자신의 모습을 본뜬 인형을 재미 삼아 만들었다. 그 형체에 우연히 세상을 떠도는 늑대, 닭, 돼지, 개, 고양이, 말, 당나귀, 사자, 쥐의 영(靈)이 깃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겉만 특별할 뿐 속은 짐승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들에게 고결함을 바라는 건 지나친 확대해석이며 착각이다. 그렇다면 더욱 망설일 필요가 있는가. 나 또한 한낱 인간인데, 꼴사나운 것들을 눈앞에서 치우고 싶단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방법, 다만, 그 수단이란 놈이 어떤 모습인지 떠오르지 않을 뿐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 나의 노여움을 이들의 살갗에 새길 수 있단 말인가. 저 더러운 살덩어리들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울부짖는 모습을 보며 꼴좋다고 손뼉 치며 크게 웃고 싶다. 그들의 괴로움이 바로 내 행복이 될 지어다. 물론 절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칠 리 없겠지만, 그들의 목을 거친 끈으로 동여매어 끌고 다니면 내 속이 조금은 후련해지련만.'
사무엘은 또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비몽사몽 자신의 몸뚱이를 만져댔다. 이리도 인적 드문 곳에서 알몸으로 잠든 자신의 사지가 멀쩡하긴 어려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털끝하나 잃은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제발 자신의 어딘가가 뜯겨나가고 이에 탄복한 천궁의 누군가가 자신에게 기막힌 꾀를 내려주길 빌고 또 빌었건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웃음이 났다. 미친 자의 헛된 망상이 참으로 우스웠다. 행정관의 집으로 가 아무 날붙이나 집어다가 되는대로 살해를 이룩해야 했다. 그윽한 밤 집집마다 불을 놓아 운이 좋으면 더 많은 이들의 죽음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라도 해내야만 했다. 역시나 그들의 고통을 보는 것보다 의미 있는 일은 전무한 것을 절실히 느꼈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마을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주변에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이 주변에 움직이는 것이라면 뭐든 입안으로 넣지 않았나 싶었다.
사무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그는 어린 시절 거동이 불편해 집에 홀로 남은 노인의 손가락이 무자비하게 뜯어 먹혔다는 악몽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작은 악마들은 아마 사람이든 무엇이든 무방비하게 홀로 있기만 하다면 그 불뚝 튀어나온 앞 이빨로 모조리 갉아먹는다. 더욱 최악인 건 그들은 커다란 동물의 목숨을 일거에 끊지 못하기에 아마 최대한 길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선사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탐욕과 포악함을 원동력 삼아 부산스레 움직이며, 찍찍댈 것이다. 그것들에게 살덩이가 아주 조금씩 찢기는 걸 두 눈으로 지켜봐야 할 것이다.
사지가 마비되어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면, 어찌 보면 행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식성이 독특한 놈이 얇은 눈꺼풀의 진미를 알아 말끔히 발라먹어버린다면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그 생지옥을 고스란히 두 눈으로 봐야 할 것이다. 반면, 정상적으로 신경을 가진 이가 받을 고문이란 감히 상상조차 어렵다. 사무엘은 철부지 나이에 검지 손톱 옆 눈에 띈 거스러미를 입으로 물어뜯은 적이 있다. 그때 얇은 살의 결이 일자로 주욱 뜯겨 올라왔다. 커다란 몸뚱이에서 그 엷은 한 줄이 떨어졌을 뿐인데 어찌나 화끈거리고 고통스러웠던지 그때의 감각은 다시 입에 올리기라도 하면 큰일 날 것이었다. 제일 끔찍한 건 온몸의 땀구멍이 열리고, 털들이 곤두서며, 항문이 오그라드는 동시에 끼치는 소름이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순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쥐새끼들의 먹이가 된다는 건 비교 안 될 만큼 진저리 쳐질 참혹한 통증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자신의 배꼽이나 목구멍이라도 들어가 내장을 파먹어 얼른 목숨을 앗아가 달라고 울고 불며 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잔혹하고 추접한 것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애걸복걸은 소용없다. 그들은 따뜻한 피를 본능적으로 좋아하기에 유사 이래 최고의 고문 기술자처럼 숨이 끊이지 않는 선에서 신중한 재단사처럼 살덩이라는 원단을 섬세히 다듬어 갈 것이다. 하루의 해가 저물고, 달이 기울어도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그는 어느새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으슥한 숲 한 복판으로 들어섰다. 거기에는 예전에 맡아본 악취가 코를 강하게 때렸다. 벗어나야겠단 생각보단 그 근원을 찾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게 들었다. 점점 더 진하게 풍겨오는 향을 더듬더듬 찾아갔다. 파다 만 작은 구덩이, 불편하게 상체를 드러내고 있는 두 구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밖으로 나온 머리부터 가슴께까지는 가죽과 살이 말끔하게 벗겨져 있었다.
큰 해골에게 안기듯 포개져 있는 한 손으로 잡힐 듯한 작은 해골. 찢겨나가긴 했지만 눈에 익은 옷차림새였다. 제사장을 죽이고 자유를 얻은 파랑새 같은 여인과 함께 숲에서 발견된 남자와 노파, 그들의 시체였다. 더러운 들짐승들이 오래간만에 포식을 했지 싶었다. 이들의 운명은 아마 그 기묘한 만남이 아니었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위치나 자세는 달랐을 수 있어도 이리 자신의 몸뚱이를 보시하게 될 팔자는 이들이 숲으로 들어온 이상 벗어나지 못할 숙명이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망자의 대한 예의를 차리고자 안쓰러움과 처연한 눈으로 그들을 잠시 바라봤다. 그러나 고개를 까딱 숙이진 않았다.
그들이 갈림길에서 선택한 결과였다.
스스로 그 험난함을 뚫고 직접 고른 길을 개척한 이들에게 어찌 감히 동정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그는 애도보다는 경의의 마음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의 발밑에 토실토실한 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땡땡하게 부풀어 오른 게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절대적으로 확실하진 않겠지만 이것들의 상태가 저 시체들과 연관이 있을 거라 추측했다. 중간중간 분리되고 절단된 사슬처럼 확실히 이어지지 않는데, 억지로 갖다 붙이면 뭔가가 될 것도 같았다. 악의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무언가를 파괴하고 해하기 위해선 이것저것 시험 삼아 펼쳐본 다음 효과가 있으면 쾌재를 부르면 되고, 안 되면 아주 살짝 아쉽고 마는 것이다. 선은 백 가지의 계획 중 하나라도 그르칠까 노심초사하지만, 악은 백 가지 계획 중 하나라도 성사되면 족한다는 주의다 보니 늘 산뜻하고 긍정적이며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임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결국 지치는 것은 늘 선이고, 꾸준함으로 무장하여 최후의 승리를 맛보는 것은 늘 악인 것이다. 선은 이루고자 하는 목표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딘 상태를 못 견디는 반면, 악은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인 탓도 크다.
잠시 서있던 사무엘은 머릿속에 끼여 있던 안개가 걷히고 뭔가가 보이는 듯했다. 물론, 지나친 욕망으로 판단이 흐려진 탓에 잘못 본 걸 수도 있다. 더러운 구정물에서 겨우 손에 잡은 것이 더럽고 끈적이는 해감덩어리에 지나지 않아 허무히 흩어져버릴지라도 무수한 시도 끝에 송사리 한 마리라도 건질지 누가 알겠는가. 사무엘은 썩어가는 살덩어리를 양피지 가죽에 고이 담았다.
그의 낡은 신발아래 들풀이 스치듯 지나갔다. 오래간만에 상쾌한 공기가 콧구멍으로 술술 들어왔고 입으로 솔솔 빠져나갔다. 그에게는 지혜가 부족했으므로 현명한 자를 찾아야 했다. 단박에 결과를 내고자 하는 조급함을 제어해 줄 덕을 갖춘 이의 인도가 필요했다. 행운의 여신이 갸륵히 여겨 하나의 행동에도 두 가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요행을 나눠 주면 참으로 좋으련만. 문득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