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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라스트 카니발

by 고전을 마시다

그들은 추락한 귀족의 뒤틀린 성에 몰래 잠입했다. 미리 챙긴 준비물들 중에는 헌 헝겊도 있었다. 두 남녀는 낡은 천을 이용하여 코와 입을 잘 감쌌다. 그것은 단순히 진동하는 악취를 막기 위한 가리개가 아니었다. 용기를 주는 방패였다. 하관을 숨긴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속 거리낌이 사라졌다. 무명천 쪼가리의 은은한 색감이 죄책감이란 암울한 빛깔을 다소 희석시켰다. 얼굴에 물드는 검댕이가 옅어지는 듯했다. 그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몸뚱이를 발견하고 서로 눈을 마주 봤는데, 순간 상대가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건 아닌가란 착각을 동시에 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대짜로 뻗어 있는 나체는 확실히 흉측하고 망측스러웠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것을 만지는 일이 아주 약간은 고역스러운 일일지 몰라도 눈앞에 놓인 덩어리가 인간이 아니란 걸 깨닫기만 한다면, 신선한 고기를 얻는 아주 생산적이고도 보람찬 일에 지나지 않았다. 행동에 앞서 사무엘은 경건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자신을 바쳐 세상에 진리를 실현할 그의 헌신에 잠시나마 경의를 표했다. 여인은 짐승의 머리와 몸뚱이 사이에 주둥이가 넓은 항아리를 괴어두더니 가벼운 손놀림으로 멱을 뚝하니 따버렸다. 순간 요란 치는 않으나 버둥질이 나타났다. 그들은 그 모습에 놀라 경기를 일으켰다. 그래도 사무엘이 꼴에 사내라고 흘러나오는 선지가 헛되이 사방으로 튀는 걸 막고자 괴물의 머리를 무릎으로 눌러 그대로 고정시켰다. “으으”하는 들릴 듯 말 듯 한 신음소리가 맨바닥을 기어 다녔으나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것은 명백히 이것의 잘못이다. 사신(死神)은 일찍이 이 냄새나는 육체로부터 비천한 혼령을 빼내가려 갖은 애를 썼을 것이다. 짐승이 움켜쥐고 있는 이승에 대한 끈덕지고 추접한 미련 때문에 애꿎은 이들이 고생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넌 어차피 비참히 죽어야 할 운명인데 어째서 그걸 거역한단 말인가. 명계의 사신(使臣)이여, 이 무능한 자여, 어서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마치거라. 이 괴물이 바르르 떨면서 느끼는 고통이 우리의 손끝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불쾌하기 짝이 없구나. 얼른 이 기분 나쁜 시간에서 벗어나길 소망한다. 이것은 인간사의 정화를 위한 일이다. 우리가 원해서이거나 당연히 책임져야 할 의무도 아니다. 누구도 나서긴 싫어하나 반드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자진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야 한다. 아직 지상에 정당한 도리가 남아있다면, 이 자리에 웅크린 우리에게 축복이 내려지진 않을지언정 훼방받아선 안 된다. 여기 기꺼이 손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반드시 기적이 있으리니.’


사무엘이 마음속으로 자신들을 찬양하는 동안 불뚝거리던 핏줄의 맥동이 잦아들었고, 빠르게 떨어지던 핏줄기는 방울로써 끊어져 천천히 내렸다. 몇 발짝 뒤로 물러나 있던 여인이 곁으로 다가왔다. 눈대중으로 여기저기를 가늠하던 그녀는 정해진 곳을 향해 네모진 칼을 반듯하게 귀까지 들었다가 내려쳤다. 그녀의 차가운 장신구가 여러 번 경쾌하게 움직였다. 넓적다리에 툭, 궁둥이에 쓰윽, 옆구리에 탁, 팔뚝을 뚝, 떨어지는 덩어리들은 왼편에 둔 옹기에 무심히 던져졌다. 웅덩이에서 비린 생선을 잡아 올려 망태기에 담듯이 차곡차곡 쌓았다. 사무엘은 그녀의 용기 있고 씩씩한 모습에 감탄할 뿐이었다. 그들은 과한 욕심을 경계했다.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알았다. 여인은 대륙을 섬나라로부터 지켰던 성녀처럼 분연히 일어섰다. 사무엘은 그녀를 섬기는 시종처럼 뒤따랐다. 펄럭이는 그녀의 치마가 마치 휘날리는 깃발처럼 겁쟁이를 이끌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허약한 이는 그녀의 일사불란한 행동에 탄복하고 또 탄복했다. 군더더기 없는 행동으로 일은 마무리됐다.


그녀는 단지를 옆구리에 둘러메고 마을 중심으로 갔다. 그곳은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한 데 모여 따뜻한 정오의 수프를 나눠먹던 바로 그 장소였다. 하지만 정수리 위에 꼿꼿이 솟은 태양을 바라볼 수 없게 된 뒤부터 그들은 그곳에 모일 이유가 사라졌다. 오늘 두 남녀는 절망의 낭떠러지로 추락한 이들에게 고소한 희망의 냄새를 맡게 해주고 싶었다. 사무엘은 누군가를 위한다는 심정으로 계곡까지 가 맑은 물을 길어다 날랐다. 마음에 불어 닥치는 혹한에 떨고 주린 배를 움켜쥐며 내일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 가여운 영혼들, 목자를 잃고 초원 아닌 허허벌판에서 방황하는 불쌍하고 연약한 이들, 그들의 입 안에 퍼질 한 모금의 따스한 수프가 바싹 메말라버린 두 눈에서 눈물을 일궈내길 바랐다.


습한 나뭇가지를 긁어다가 불을 붙인다고 애를 먹긴 했지만 결국 의지를 가진 자들이 이뤄내지 못할 일은 없었다. 어느새 항아리는 보글보글 끓어댔다. 그동안 여인은 잡은 민물고기들을 잘게 으깨 물에 넣었다. 챙겨 온 향신료도 몽땅 집어넣었다. 수증기가 향을 머금고 천장으로 올라갔다가 꼭대기에 난 틈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맙소사, 눈에 보이지도 않은 것이 어찌나 빠르게 퍼져나갔는지 온 마을 사람들은 영문 모를 기운에 홀려 집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투명한 무언가가 사람들의 등을 채찍으로 후려갈겼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은 혼비백산하여 목적지로 향했다. 그동안 남자는 긁개를 이용하여 항아리 밑동에서 타고 있는 잔가지들을 빼냈다. 원래도 아주 뜨겁지 않았던 액체는 빠르게 열을 잃어갔고, 거기에 남은 찬 물을 부어 애써 끓인 수프를 식혀버렸다. 그리곤 짐승의 몸에서 나온 가장 중요한 진액을 단지 주둥이에 받치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풀어 넣었다.


이 한심해 보이는 행동을 한 데는 사무엘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같은 인간임을 부끄럽게 만든 괴물이자, 짐승이며, 한편으로는 인간의 부도덕함을 심판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거짓 귀족의 체액 속 생동하는 힘이 고스란히 살아남길 바라서였다. 작열하는 태양열의 괴롭힘 아래 끓어오른 물에서는 온갖 생물이 타 죽지만, 온당한 태양빛의 보호 아래 온건한 열을 머금은 웅덩이 속에서는 헤아리지 못할 수의 생명이 활보한다. 이 단순한 자연의 이치를 정오의 수프에도 담았다. 적은 것이 많은 것에 스며들면 묽어지는 게 섭리이거늘 붉은색은 더 진해지고 끈끈해졌다. 하다 하다 일부는 덩어리가 지기도 하여 사람들이 더욱 군침 돌도록 형체를 굳혀 나가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 음침한 숲 속에서 쓸쓸히 홀로 살아가던 마녀는 어느 날 문득 세상 모든 것이 미치도록 미워졌다. 자신만 쏙 빼놓고 웃으며 행복해하며, 감사해하는 것들을 견디지 못했다. 숨 쉬는 전부에게 저주를 내리고 싶었다. 그래서 인간이 생각해선 안 될 갖가지 재료를 섞어 마법 약을 만들어 냈다. 그 신비한 묘약은 지독한 힘을 갖고 있었다. 오로지 생명에 해를 끼칠 목적으로만 탄생된 그것은 하반신을 잃은 채 박박 기어가는 시체의 상반신처럼 처절하고 소름 끼치게 극악스러웠다. 지옥의 연못처럼 부글대는 끈적한 액체 속에 노파는 몸을 던졌다. 그녀가 일평생 품고 살았던 끔찍한 마음이 그 속에 녹아들었다. 평생 동안 그녀를 지독하게 괴롭힌 시기와 질투, 증오와 분노, 불안과 의심, 슬픔과 후회, 혐오와 좌절이 퍼지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정성에 힘입어 무수히 많은 세월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항아리 속 기운은 득실거려 세상을 잠식한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이성과 사랑을 지녔음에도 그 마법에 침식당한 채 살게 되었다.


사무엘은 자신을 인신 공양 할 각오까진 없었기에 마음속에서 빚어낼 수 있는 온갖 참되고 성실한 마음을 수프 단지에 담았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했던가, 마을 사람들은 빠짐없이 모여들었다. 사무엘과 여인은 밖으로 나섰다. 거칠게 들이닥칠 것만 같던 이들은 마치 그 옛날 방주 밖으로 모여든 쌍쌍의 짐승들처럼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사무엘의 입으로 쏠렸다.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마무리마저 이방인에게 떠넘긴다는 건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었다. 남자는 주인의 지시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용기를 냈다.


“어젯밤 저는 푸른 불빛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불꽃은 이야기했습니다. ‘내 너에게 작은 밀알을 줄 터이니, 너는 그걸 가장 귀중한 일에 쓰거라.’ 저는 그걸 단숨에 입으로 넣는 시늉을 하다가 멈췄습니다. 이 씨앗을 나를 위해 쓰는 것은 겨우 한 명을 아끼는 것에 그치나, 남에게 베푼다면 그것은 두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이리라. 집 밖으로 나가 가장 먼저 마주친 이에게 그것을 주고자 다짐하며 문을 열었는데 맨 처음 제 눈에 띈 건 작은 생쥐였습니다. 저는 또 생각했습니다. '이 밀알 하나를 사람이 삼키면 감질만 날 뿐이겠지만, 이 미물이 먹는다면 위장을 가득 채울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작은 것으로 한 생명을 채우는 일이리라. 부족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값진 일은 바로 이것이다.' 저는 작은 온기를 바람으로부터 보호하듯 조마조마 무릎을 꿇고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놨습니다. 그리고 밀알을 집어 그 작은 주둥이로 가져다대니 그 하찮은 것이 그것을 오물오물 야무지게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작은 생쥐는 기운을 차리더니 얼른 자신을 땅바닥에 내려달라더군요. 그것을 풀밭에 내려놓자마자 어디론가 쏜살같이 향하는데, 마치 저를 따라오라는 것처럼 뒤돌아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바보 같은 일임을 알면서도 저는 그것을 쫓아갔습니다. 우리는 한창을 숲으로 들어갔는데 갑작스레 앙칼진 울음이 들리기 무섭게 검은 형체가 회색 생쥐를 낚아챘습니다. 제 손톱보다 훨씬 작지만 제 살가죽을 찢고도 남을 정도로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그놈은 생쥐를 야무지게 움켜쥐곤 대가리부터 두 입에 나눠 뜯어먹어버렸습니다. 말릴 틈도 없었지만 설령 그럴 여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저는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살아남기 위해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 다른 동물의 피를 기꺼이 마셔야 하는 그놈을 감히 제지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그 짐승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겠습니까? 그 포식자는 슬픈 굶주림 끝에 만난 먹잇감에 만족했는지 벌렁 드러누워 뒹굴 거렸습니다. 하지만 이내 신명 난 족제비는 삐삐 노래를 부르며 더 깊은 숲으로 행진했습니다. 전 그 요염한 자태에 홀린 나머지 또 따라갔지요.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간간이 이어지는 것으로 전 제가 숲의 한복판에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방이 고요해지며, 제 사지는 자꾸만 움찔거리고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육중한 그림자가 바람을 거느린 채 등장하여 발랄한 족제비를 짓누르더니 저의 손목도 너끈히 끊을만한 이빨을 꺼내 먹이의 몸통에 박아 넣는 게 아니겠습니까. 가녀린 족제비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살려달라며 애절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감정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결코 외면 못할 그런 구슬픈 가락을 길게 뽑아냈습니다. 눈이 돌아간 저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제 한쪽 가슴만 한 크기의 뾰족한 돌덩이를 찾아냈고, 그걸 들어 사정없이 늑대를 내리쳤습니다. 처음에는 등을 내려쳐서 척추를 휘게 만들고, 그다음에는 머리를 찧어서 단단한 뼈를 조각조각 냈습니다. 입을 내려치니 혀가 잘리고, 눈알이 빠졌습니다. 그 육식동물을 곤죽으로 만든 다음에, 아직 눈을 감지 못한 작은 동물에게도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저는 제가 직접 숨을 끊은 그 짐승을 둘러업고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이국 여인이 저를 도와 그것의 털을 뽑아내고 살을 발라냈습니다. 오늘의 수프는 우리 마을에 내려진 축복인 것입니다. 부디 질서를 지키시어 단 한 분도 빠짐없이 한 그릇의 기적을 맛보도록 하십시다.”


인간들은 순한 양처럼 줄을 섰다. 남자와 여자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누구도 빠뜨리지 않고 미지근한 수프를 나눠줬다. 노린내가 났지만, 남의 고기를 씹으며 살아가는 동물은 이 냄새를 평생 지녀야 했고, 그것을 섭취하는 동물 또한 구역질을 감내해야 했다. 사람들의 눈에서 미지근한 물이 더러 흘러내렸다. 남자는 뿌듯함에 취했다. 수프가 동나자 모두는 자신이 속해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사무엘은 아늑하고 고요한 눈빛과 편안하게 다문 입으로 여인을 바라봤다. 아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태양보다 환하게 웃어주었다. 사무엘은 누군가에게 절실히 안기고 싶었다. 커다란 그녀는 작은 그를 꼭 안아주었다. 사무엘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키스를 해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촉촉하고 두꺼운 입술로 남자의 얇고 건조한 입술을 살짝 감쌌다. 그리고 그들은 운명의 시간을 기다리려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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