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바람, 흙, 혼, 시간은 천지를 이룬다. 유구한 세월을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하나뿐인 영혼을 구리 동전 몇 닢에 팔아넘긴 지 오래다. 저잣거리에서 썩은 생선 대가리는 다툼의 대상이 될지언정, 바닥에 버려진 인간성은 굶주린 개조차 안 물어간다.
우리 곁에 늘 머물며, 변치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흙이 가장 먼저 인간을 등졌다. 이제 인류에게 남은 건 오로지 어둠과 바람, 그리고 시간이다. 어둠은 너무나 강대할 뿐만 아니라, 신비로우면서도 두려운 미지의 영역이기에 감히 만물의 영장조차 다스릴 엄두가 안 난다. 바람은 상대적으로 가벼우나 워낙 변덕이 심하고 변화무쌍하기에 다가가려 하면 도망가고, 달아나고자 하면 순식간에 쫓아온다. 그야말로 깍쟁이인 동시에 은혜로운 존재이다. 이제 인간에게 불멸의 존재는 오로지 시간뿐이 안 남았다. 세월은 늘 우리 곁에 머무르며 손을 내미는데 온 우주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그것을 지각하고, 이용할 수 있다. 누군가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에 용감히 팔뚝을 집어넣어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잡아 올리려 할 것이다. 시간을 현명하게 활용하는 또 다른 이는 격랑에 몸을 던져 물줄기를 타고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자일 것이다. 사무엘은 한낱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마쳤다. 이제는 절대자가 벼려낼 결과를 기다릴 차례였다. 천 길 낭떠러지처럼 아득히 깊은 공백을 견뎌내야 했다. 그는 최근 거처로 삼은 가짜 장로 집 바닥에 흩어져 있던 양피지들을 가지런히 모아놨었다. 분명 순서가 있었겠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과거의 파편을 제자리에 끼워 맞추려는 노력은 헛되다 믿었다. 그 깨어진 조각의 가장자리에 베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멀찍이 떨어진 채 중심에 새겨진 문양의 의미를 감상했다.
‘말라비틀어져 가는 웅덩이에 남은 생물의 운명은 온몸으로 악취를 토해내는 것뿐이다. 이 마을에서 얼른 탈출해야 한다. 하지만 난 차마 그럴 수 없다. 이 마을을 빚어낸 한 사람이자, 이곳에 갇힌 이들이 받는 저주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인 내가 끔찍한 죄악을 피한다는 건 감히 옳지 않은 일이다. 내가 정당하다고 판단하고 행했던 일들이 여전히 올바른 일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송곳으로 가슴이 찔리는 것만큼 아픈 일일 것이다. 난 적어도 비겁자이고 싶진 않다. 그뿐이다. 그것이 이 마을과 몰락을 함께해야 할 이유다. 이 고립된 사막 속 유일한 빛이었던 막시마가 제 살길을 찾아 떠난 지 어언 이년이 흘렀다. 마을의 백작은 그의 후손이 사라지자마자 이미 속이 썩어버린 나무처럼 후드득 무너져 내렸다. 그 뒤로 음침한 자 몇몇이 마을의 주인 행세를 했다. 섬기던 자의 은총을 입어 겨우 성씨를 얻은 것들의 후예 주제에 사람들에게 공포와 슬픔을 내린다. 그들은 늘 어두컴컴한 공간에 모여 하늘이 노하고 이 마을을 세운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이야기만 나눈다. 오로지 자신들의 즐거움과 기쁨, 몸과 마음의 편함만을 추구했다. 어느 날 아직 덜 성숙한 돼지처럼 보이는 자가 자신들 아가리에 동물의 쫀득한 살코기 한 점 더 넣고자 동족에게 동족의 살덩이를 먹이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그들의 망언에 구역질이 나온다. 나머지는 긍정하지 않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 침묵함으로써 알아서 말 나온 대로 해주겠거니 하는 비열하고 천박한 인간들. 내가 지혜를 나누어 저들과 함께 그 벌을 지었다니. 내 어리석음으로 그날을 도모하였다니, 나는 고개를 떨굴 따름이다. 이들에게 정의와 도리를 외쳐봐야 코웃음만 살게 분명하다. 불의를 실행한 부역자요. 외간 남자와 단 둘이 숲 밖으로 도망쳐버린 배신자의 아비. 영혼을 잃어가는 다른 사람들은 외면한 채, 가여운 제 딸만 이 시궁창에서 탈출시킨 저열한 이기주의자. 이런 내가 어찌 저들에게 바른말을 건넬 수 있단 말인가. 벙어리 망부석처럼 앉아 있는 게 내 일이다. 썩어가는 과일 껍질에서 돋아난 초파리 떼를 손바닥을 부딪쳐 박멸해 버리는 통쾌함을 맛보고 싶다. 물론 나는 짜부라지고 으깨지는 한 마리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나를 좀먹으면서 하루를 깎아 내려간다.’
‘늙은 행정관이 고향을 등진 남자를 불러들이자 말했다.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막시마라는 한 인간에 대한 거부감 보단 굳이 이 시점에 외부인이나 다름없는 자를 끌어들이는 저의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백작이 몸져누운 뒤부터 마을의 모든 대소사를 내키는 대로 쥐락펴락 했다. 똑같은 일도 기분에 따라 다르게 처리했다. 두려움을 심어주고 불만을 품지 못하도록 멋대로 법을 뜯어고쳤다. 그들이 사람들 앞에 나서고부턴 가비뇽에 질서와 화합은 사라졌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끝 모를 절망, 말 못 할 불만만이 가득 찼다. 그때부터 인간들은 마음을 잃었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암흑으로 물 들어가는 자신들의 감정들을. 내일을 바라며 행복을 기대했던 이들이야 말로 가장 먼저 추저분하게 변했다. 작은 일도 앞다투어 밀고하기에 급급했다. 흄이 고자질한 자에게 죄를 지었을 경우 면죄부를 부여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켜지지 않았다. 뜻있는 사람들이 뭉쳐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지 않게 하기 위해 꾸며낸 사악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음지에서 살짝살짝 펴진 거짓은 실체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용당하고 버림받았다. 손가락질받는 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더욱 뻔뻔스럽게 굴었고, 그게 마을의 일반적인 모습이 되어갔다. 더 이상 사람들은 지성, 감정, 의지를 회복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타인을 위해서도 그렇다고 자신들을 위해서도 살지 않았다. 몇몇만이 원하는 세상으로 바뀌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굳이 껄끄러울 수도 있는 자를 마을로 소환하자니, 도무지 이해 못 할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의견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난 새로운 희망의 싹이 틀 조짐이라 받아들였다. 물론 그의 귀환을 바라는 자의 목적이 순수치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변덕이 심하고 재밋거리를 찾는데 귀재인 늙은이였다. 심심풀이 도구로써, 거기에 슬슬 기어오르는 젊은것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이기도 했으리라. 분명한 건 막시마가 복귀하자마자 그를 맞이할 것은 고된 시련일 것이다. 하지만 백작 아들의 착한 심성이 열을 발하면 꽁꽁 얼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줄 수도 있을 터였다. 난 부푼 기대감에 설레었다. 그의 소재는 백작의 명령으로 드문드문 파악되고 있었기에 찾아내는데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늙은 행정관은 말을 종결지었고, 남은 이들은 볼멘소리를 해댔다. 허드렛일을 하는 종자는 그날 밤 곧장 길을 나설 것을 명 받았다.’
‘늦은 밤, 마을 밖으로 나갔던 남자 중 하나가 내게 슬픈 소식을 가져왔다. 그에게 미리 바깥에서 살고 있는 딸의 상황을 확인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었다. 행복한 모습을 기대하진 않았다. 다만 죽지 못해 살지 않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남자는 그녀의 비참한 몰골과 생활을 지나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나의 일그러지는 얼굴에 더욱 희열을 느껴 상상과 사실을 섞어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녀가 일촉즉발의 위기란 말도 빼놓지 않았다. 함께 도망친 남자는 험한 일에 휘말려 맞아 죽어버렸고, 갓 애 낳은 외지인을 가엽게 봐주는 이 하나 없다고 했다. 그녀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갓난쟁이가 내일의 태양을 보는 게 기적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난 그들이 어둠의 자식도 아닐 진데 어찌 햇살이 허락되지 않겠냐며 소리쳤다. 간절히 기다리던 막시마를 얼싸안고 반기고 싶었으나, 어찌하겠는가. 피가 우정보다 진한 것을. 난 선택을 망설이지 않았다. 난 내 딸에게 미리 동의를 구하지 않고 생명을 부여해, 이 괴로운 인간사에 내놓았다. 따라서 난 그녀를 구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늙은 행정관에게 나아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빈손으로 나가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 뭐라도 들고나가야 했다. 아사 직전인 그녀의 입술을 마냥 바라보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늙은이는 낄낄대면서 웃어댔다. 박수까지 쳤다. 피붙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악마의 속삭임에라도 기꺼이 따르겠냐며 내게 물었다. 난 망설이지 않고, 어떤 사악한 음성의 부름에도 응답하리라 맹세했다. 그는 내게 두툼한 자루 하나를 내주었다. 그러곤 내 약속에 대한 증명은 내가 원치 않는 순간에 요구될 것이라 말했다. 난 경솔히 대꾸했다.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지금의 내 선택을 후회하게 할 순 없노라고. 노인네는 덧붙였다. 그녀가 마을로 돌아오면 자신이 정해주는 남자와 살아야 할 것이며, 이미 낳은 아이는 내가 키워야 하고 부녀간의 정을 끊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것만이 마을을 배신하고 떠난 자가 용서받을 길이라 분명히 못 박았다. 난 여부가 있겠냐며 굽실댔다. 그때부터 내 목에는 보이지 않는 목줄이 채워졌고, 그 늙은이는 내 영혼의 주인이 되었다. 난 그 길로 마을을 떠나 나의 딸 소마르를 찾아갔다. 꼬박 일주일간 그녀와 그녀가 잉태한 작은 생명을 보살펴야 했다. 겨우 그들은 기운을 되찾았다. 며칠이 더 지나자 늙은 행정관은 또 한 번 배려심을 발휘했다. 마을 남자를 하나 보내온 것이다. 그 덕분에 난 그 안쓰러운 것들을 데리고 천신만고 끝에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깥에서의 고생이 고왔던 그녀의 외모를 거칠게 바꿔 놨다. 우리의 귀환은 남들이 잠든 늦은 밤에 몰래 이뤄졌고, 그 뒤로 그녀는 나완 남남으로 살았다. 나와 함께 그들이 숲을 통과하도록 도운 남자가 그녀의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그래도 서글프거나 외롭지 않았다. 내게는 갓 태어난 손주아이가 생겼다. 그 아이가 이제 내 일을 뒤 이을 터였다. 나는 가끔 젖먹이를 품에 안고 딸 내외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을 남몰래 지켜봤다. 웃음소리보다 울음소리가 더 자주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그 모습이라도 볼 수 있음을 감사히 여겼다. 다음 해 소마르는 사내아이를 낳았고, 몇 년 뒤 겨울, 남자는 마을 밖으로 나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한적한 오후, 막시마는 방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정오 직전에 불려 온 그는 적막함과 홀로 사투를 벌였다. 끌려 온 영문도 모르던 그는 꽤 오랫동안 방치됐다. 나를 비롯한 사내들은 일부러 그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걸 최대한 질질 끌었다. 아마 안개를 이루는 작은 물방울처럼 수많은 잡념들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놨을 것이다. 우리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온몸으로 견디고 있었을 긴장을 누그러뜨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는 기진맥진한 눈동자로 우릴 바라봤다. 그에게 희망의 빛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윗입술이 퉁퉁 부어 보였다. 마음속에 다 담지 못할 커다란 괴로움이 피부까지 뚫고 나올 기세였다. 그들은 수 십 가지의 죄목을 들어 그를 짓눌렀다. 늙은이는 막시마가 자신이 사람들을 속이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라 했다고 고함쳤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마을을 위해 바친 희생은 알지도 못하면서 남에 대한 험담만 하는 비겁한 인간이라 비난했다. 비렁뱅이를 데려다가 사람답게 살게 해 주었더니 은혜를 모르는 금수만도 못한 생물이라 규정했다. 거기다 주제도 모르고 남을 가르치려 들었다며 코웃음도 쳤다. 막시마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할 도리를 이야기한 것이며, 그것이 누군가를 지칭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힘든 일을 이루기 위해선 격려도 쓸모 있지만 상대에 따라 다소 과격한 표현도 필요함을 피력했다. 때론 자신도 한 인간이기에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다툼이었을 뿐 일방적인 힐난은 없었다고 자부했다. 또한 자신의 모든 말속에 그 자리에 없는 자를 욕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음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막시마는 지독한 손가락질 앞에서도 진심과 성의로 대했다. 결국 진실이 이기리라 믿었다. 예상외로 젊은 행정관은 감정을 배제하고 메마른 목소리로 그에게 따져 물었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남들이 바라는 바를 다 들어줄 수 있단 식으로 얘기했느냐가 첫 질문이었다. 막시마는 말문이 막혔는지 조용히 있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자신의 역할과 권한 내에서 호의를 베풀고 싶었을 뿐, 거만함이나 착각 따윈 개입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또한 이방인으로서 사리분별을 똑똑히 하려 늘 애썼고, 마을을 도망친 부끄러움을 알기에 하루하루를 혼신의 힘을 다해 보냈다며 자신했다. 모진 구박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얼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그들과 동화되어 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진실로 호소했다. 젊은 행정관의 귀는 닫혀있었고, 입만 다시 열렸다. 부족한 자신은 그렇다 쳐도 고명한 행정관까지 단지 땀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했다던데, 그럼 누가 이 자리에 앉아야 하며 막시마는 충분한 조건을 갖췄냐며 의견을 물었다. 막시마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마치 자신이 내뱉었던 말과 문맥을 정확히 기억해 내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상대의 질문들은 막시마를 끌어내리기만을 위해 골몰하여 이 대화 저 대화에서 요리조리 골라내고 앞뒤를 잘라내고, 덧붙이길 궁리한 것이다. 거기다 여럿이 머리를 맞대어 짜낸 말들에 어찌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슬픈 건 그의 말에 귀 기울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막시마는 최선을 다했다. 조금 더딜지라도 진실과 진심이 빛을 발할 것으로 믿은 것이리라.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무너졌다. 대답에 성의가 사라졌고, 그들의 억측에 수긍하기 시작했다. 아마 여러 이유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우선 반복되는 그들의 신문에 그의 답변이 소용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언행이 경솔했음을 인정해 버린 것이다. 그는 지나치게 책임감이 강했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늘 잊지 않았다. 미련스러우리만큼 선한 태도와 성실함으로 매사에 임했다. 이렇게 당하고도 남을 성정이었다. 부러지는 게 마땅하고, 뻔뻔하고 추저분한 자들에게 짓밟히는 게 당연했다. 이것이 그의 숙명이자, 삶의 종착지였다. 그 이후로 그는 살아도 산 게 아니고, 똑같이 두 발로 걸어도 같은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할 것이다. 슬픈 짐승이여, 애석한 삶이여.’
‘어느 날 난 막시마에게 도망쳐야 한다 말했다. 그의 무기력한 모습에 울화통이 터져 버렸다. 이곳에서 버티는 건 무의미하다며 당장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라고 부탁했다. 그에겐 더 이상 스스로를 일으킬 힘 따윈 없었다. 매 순간마다 그를 도와야 한다는 마음은 차고 넘쳤으나 내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할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이 비참해질수록 내 마음에는 부끄러움이 커졌다. 방관자로서 한계에 다다른 난 비겁하게나마 개입해야만 했다. 막시마는 떠나야 한다는 내 의견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었으며 그건 이 마을을 떠나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란 두려움으로 굳어졌다고 털어놨다. 절망의 족쇄가 두 발목에 단단히 채워져 있다고 토로했다. 난 그의 말이 허튼소리이며, 생존이야 말로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난 유일한 과제임을 일깨웠다. 살아남기 위해서 다음을 이을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졸렬한 짓도 기쁘게 해야 하며, 비굴하고, 치사한 짓도 머뭇거려선 안 된다고 그를 몰아쳤다. 그가 내세운 공포는 어둠에 맞서지 못하는 자신을 포장하는 너절한 변명일 뿐이라 일축했다. 강한 자에게 짓밟히는 것을 예사로 여기고 약자를 유린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사의 참된 이치임을 명심하라 외쳤다. 따라서 여기서 있었던 경험은 도리어 앞으로 인간답게 살아갈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난 내가 내뱉은 말이 얼마나 허황되고, 무책임한 말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난 그에게 거짓 희망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가 새로운 터전을 찾아 잘 살기를 바라서였다기보다 얼른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것에 더 절실했다. 못난 스승의 더러운 가르침에 막시마는 힘겹게 일어났다. 나의 두 눈에서 뜨거운 것이 마구 흘러나왔다. 무너지듯 그의 양팔을 붙잡았을 때 난 오열했다. 당연히 잡혀야 할 물렁한 것은 온 데 간데 사라지고, 감촉으로 전해져선 안 될 앙상함만 남아 있었다. 그것마저도 연했다. 톡 하고 부러져버릴까 세게 쥐지도 못했다. 난 천천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살가죽이 뼈에 착 달라붙은 그의 얼굴을 난 그동안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아니, 애써 외면한 것이다. 얼른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잠든 아이들을 한 명씩 업고 나서자 했다. 혹시 그의 맘속에 망설임이 남았을까 봐 이 마을로 들어설 때 빈손이었듯, 나갈 때도 똑같이 나가는 것이라며 저주받은 이 땅과의 작별을 재촉했다. 가서 제발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끝까지 함께 갈 수 없기에 새벽녘이 될 때까지만 동행하겠다 말했다. 서둘러야 한다고 그를 타박했다. 그의 탈출이 중요하기도 했지만, 나 또한 아무렇지 않게 돌아와 손자를 돌봐야 했다. 가까이 갈 수 없는 딸을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봐야 했다. 복잡한 마음에 난 판단력을 잃었다. 그의 딸을 업었다. 그리고 마지못해 하는 그의 등에 아들을 업혀줬다. 우리 네 명은 쓰러질 듯한 헛간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향했다. 마침 구름에 가리어진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렷하게 둥근달은 내가 알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포근했던 노란빛이 아닌 불길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의 보살핌 아래 우린 으슥한 나무 사이로 파고들었다. 마구잡이로 달렸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으며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었다.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지치지 않았다. 도리어 심장은 자신은 괜찮으니 더욱더 무지막지하게 내달리라 외쳤다. 막혔던 구멍들이 시원히 뻥 뚫렸다. 묵은 체증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우리는 땅이 올록볼록 솟아난 지형에 다다랐다. 잠시 쉬었다 가자고 막시마에게 말하려던 찰나, 앞서던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곤 흠칫하더니 발걸음을 뒤로 물렀다. 무슨 일이냐 물으려던 내 입은 딱 들러붙었다. 우리들 앞엔 칠흑 같은 어둠 장벽이 가로막았으며 군데군데 쌍쌍의 주황 불빛이 선명히 박혀있었다. 우린 늑대 굴로 들어왔다. 핏빛으로 물든 선명한 달이 짐승들을 더욱 포악하게 만들었고, 우리에겐 그것들의 주둥이에서 질질 흘러나오는 침을 볼 수 있게 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사타구니를 축축이 적시는 것이 땀인지 오줌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딱딱 부딪치는 이를 감쌌다. 하지만 요동치는 심장이 내 온몸을 뒤 흔들었다.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끔찍한 끝장‘이란 결론이 머릿속을 지배하니 난 움직이길 포기했다. 나는 이제 곧 봉제인형처럼 갈가리 찢길 터였다. 그 순간 막시마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여기까지 같이 올 수 있어 기뻤으며, 아이들을 부탁한다고. 그리곤 사내아이를 내게 건넸다. 난 업었던 딸아이를 앞쪽으로 돌려 안고, 남자아이도 껴안았다. 어린 딸이 잠시 눈을 떴다. 아버지는 그녀의 볼을 살짝 깨물고는 손바닥을 왼쪽으로 젖혀 작은 눈동자를 가리어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애정이 듬뿍 담겼고, 아주 조심스러웠고 느렸다. 순한 아이는 다시 잠들었다. 막시마는 몸을 돌려 가운데 우뚝 자리한 검은 개에게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한 손에는 돌덩이 하나가 야무지게 들려있었다. 난 똑똑히 봤다. 그 검은 놈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남자를 가소롭게 쳐다보는 것을, 그러나 곧이어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냈고, 다른 놈들이 막시마에게 사납게 덤벼드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부터 난 달렸다.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잔혹한 공기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도망치는 내내 찍히고, 뜯기고, 으르렁대는 와중에 낑낑 대는 소리가 날 끈질기게 쫓아왔다. 하지만 그 남자의 신음은 들리지 않았다. 가쁘거나 고통에 힘겨운 숨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는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에게 축복을 내렸다. 자신의 슬픔을 기억하지 말 것이며, 이 순간 막시마가 행한 것은 희생이 아니라 남은 이들의 행복을 위한 거룩한 기도라 전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의 기쁨을 위한 것이기도 했기에 자신을 안쓰러워할 대상이 아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만끽한 자로서 대해주길 바랐다. 그렇게 분명히 우리에게 외쳤다. 살아 있는 것보다 나은 죽음은 결코 없으니 끝까지 생을 움켜쥐어달라 조용히 부르짖었다. 나는 부끄러운 생환을 이룩했다. 종소리가 마을을 뒤덮었다. 나는 곧장 늙은 행정관의 집으로 찾아갔다. 마침 그 늙은이는 문 밖으로 나와 있었다. 난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땅바닥에 내려놓으며 울부짖었다. 비겁한 막시마가 자식들을 버리고 마을을 떠났다 고발했다. 이 가련한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마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소중한 생명을 지켜야 한다고 비장하게 아뢨다. 늙은이는 아침부터 별일도 아닌 것으로 호들갑 떤다고 말했다. 막시마가 언제 떠나든 자신과는 상관없었고, 꼴 보기 싫은 그 우울한 표정을 보지 않아도 된다니 잃었던 입맛이 돌아오겠다며 싱겁게 웃었다. 아이들을 잘 돌보고 싶으면 그 아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말라는 말을 서늘하게 덧붙였을 뿐이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서럽게 통곡했다.’
사무엘의 세상에 아침이 밝았다. 그는 밖으로 나가 사방의 고요함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이제야 비로소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 것만 같았다. 편안함이 그를 길고 긴 잠으로 인도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쳤다. 환상세계의 입구에는 앞니가 벌어져 헤픈 입술을 가진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몇 번이고 질펀하게 무너졌다. 그의 사지는 풀렸고 몽롱함에 취해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그녀는 가장 오래된 참나무보다 거대한 거인을 부려댔다. 여인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거인에게 명령했다. 사무엘과 여인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단숨에 검은 숲을 빠져나갔고, 동방의 찬란한 비밀정원에 도착했다. 온갖 신비한 새들이 형형색색 꽃들로 옮겨가며 꿀을 빨았다. 여기저기 돌 더미로 장식된 물줄기에서 맑은 소리가 흘렀다. 그곳을 지나 그는 커다랗고 오래된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사방을 가득 메운 양피지 두루마리들이 빼곡히 꽂혀있었다. 하나를 꺼내 펼쳐봤으나 읽을 순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던 기쁨을 느꼈다. 몇 날 며칠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그는 인간이 일생동안 가질 수 있는 만족감을 누렸다.
운명의 끝
사무엘은 긴 여정으로부터 복귀했다. 여전히 사방은 고요했다. 다만 마을엔 악취가 득시글댔다. 세상을 뒤덮은 적막함을 홀로 견딜 자는 없었다. 누구라도 이 삭막함을 오래 견디긴 어려울 것이라 확신했다. 누군가에게 가슴을 내주기보다 누군가의 품에 기대고 싶은 게 진솔한 그의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찾아갔다. 높은 천장의 그 집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위에서 아래로 그를 맞이했다. 그는 그녀가 마지막 키스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기에 겨우 그녀임을 알아챘다. 그녀는 대들보로부터 내려온 줄로 하늘에 맞닿아 있었다. 그녀를 껴안아 주고 싶었지만 무리였다. 그리고 숙녀에게 의사도 묻지 않고 무례를 범하고 싶진 않았다. 작별인사를 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 어떤 인기척도 없었다. 사무엘은 미소 지으며 무궁한 자유를 느꼈다.
누군가 사무엘에게 신이 존재 하냐고 묻는다면 어찌 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렇지 않다 하기엔 너무 큰 은혜를 입었고, 또 하늘에서 우릴 굽어본다고 하기엔 너무 많은 죄를 지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후련하단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 내려진 건 정의도 선도 아니었다. 그냥 눈앞에서 알짱대는 인간들이 볼썽사나웠을 뿐이며, 치워버릴 수 있어 그렇게 했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사무엘은 그것에 흡족했다. 그는 안식처로 돌아가 펜촉에 잉크를 담갔다.
‘나는 마을 최후의 기록관 사무엘이다. 축일의 학살자이자, 사실의 기록자, 전달자, 가장 진실된 자이다. 나는 오늘도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마지막 글을 썼다. 가슴속 슬픔이 가득한데도 자꾸 웃음이 난다.’
그는 할아버지와 자신이 적은 기록들을 가지런히 모아두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린 시절 들었던 산꼭대기 머리만 내놓은 괴물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그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했다. 설령 자신이 거인의 투박한 이빨에 산채로 씹힐지라도 사무엘을 위해 눈물 흘려줄 사람은 없었다. 홀가분히 떠날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그를 설득하여 신세계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죽 가방을 왼쪽어깨로부터 오른쪽 허리로 걸머졌다. 양손으로 끈을 꾹 부여잡았다. 사무엘은 무서운 두근거림을 이겨내며 그가 다짐한 바를 지키러 가비뇽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