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은 제사장 집의 문을 힘차게 열었다. 마치 아침에 집밖으로 나가 실컷 놀고 돌아온 막내아들처럼 싱그러움이 얼굴에 그득했다. 집안에는 포근하면서도 그리운 향기로 가득했다. 그는 하마터면 자신이 돌아왔다고 큰소리쳐 인사라도 할 뻔했다. 그는 씩씩하게 움직이며 집안일하는 여인을 찾았다. 현관쪽으로 나오던 중년 부인이 그를 보곤 방긋 웃으며 환대했다. 남자는 천진난만하게 가방을 활짝 열었다. 여자는 입에 손을 가져다 대고 짧은 고함을 질렀다. 그녀의 딸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검지손가락을 쫙 펴고 창문 밖을 가리켰다. 사무엘은 다급히 손사래를 쳐댔다. 혐오스러운 것들은 잠시 뒤로 감춰뒀다. 그녀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자신의 말에 잠시만 귀기울여 달라며 고개숙여 부탁했다. 인자한 여인은 다시 미소를 되찾았고 그것들을 지니고 온 경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조곤조곤 물었다. 그는 손짓 발짓 해가며 그간 홀로 꽁꽁 싸맸던 마음속 보따리를 풀어놨다. 젊은 여자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나이 든 여자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거려 줬다. 그렇지만 결국 그녀 또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다시 한번 혼신을 다해 그녀들을 설득했다. 역시나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고, 급기야 몽상가의 궤변에 지쳤다는 듯 등을 돌려 흩어지려 했다. 온몸에 은은한 빛을 발하며 파리한 몰골을 한 여인이 나타나니 그녀들의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음산한 기운에 눌려 모두는 제 자리에서 꼼짝달싹도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다시 한번 차분히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모녀는 한 편에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는 사무엘이 앉았다. 처음에는 양피지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가 슬그머니 왼편에 자리한 의자로 내려놨다.
남자는 평정을 되찾았으나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자리에 앉은 이들을 납득 시킬 수 있을까. 온 마을 사람들을 다 죽여야 한다고, 거기다 최대한 고통스러운 최후를 선사해야 하니 도와 달라 회유하고 싶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그는 명랑한 태도를 유지하며, 간단명료하게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왜 자신이 저 흉측한 것들을 주머니에 소중히 지니고 왔으며 그걸 가지고 어떤 시도를 해보고 싶은지 이야기했다. 어느새 그녀들은 엷은 미소를 띠었다. 순진무구한 사무엘의 표정에서 그가 얼마만큼이나 이 마을사람들에게 멸망을 선물하고 싶은지 여실히 드러났다. 그의 계획은 엉성하고 모순 투성이었지만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작은 세상을 활짝 열고 온몸을 다해 뽐내는 것만 같았다. 그녀들은 초승달의 눈을 띤 채 어머니와 이모, 누이 마냥 그를 귀여워했다. 세 명의 여인은 동시에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단 마음을 가졌다. 그가 원하는 대로 일이 술술 풀려 나가리란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으나, 어찌 됐건 힘을 보태주고 싶었다. 웃음밖에 안 나오는 단순한 발상으로 원대한 뜻을 펼쳐보려는 그가 갸륵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이것이 단지 작은 시작일 뿐이며, 앞으로도 여러 방법들을 찾아낼 것이니 실패하더라도 결코 실망해선 안된다고 연신 덧붙였다. 그녀들은 속으론 딴마음이었을지언정 겉으로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며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사무엘은 저 탐욕스럽고,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세상의 다른 생물들에게 해만 끼치는 저 유해하고 진저리 처지는 후예들이 절대 벗어나지 못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인이 맞장구를 쳐줬다. 옆에 앉은 여인은 박수를 쳐주며 사무엘이 장한 일에 앞장선다고 칭찬했다. 주변 분위기가 화기애애 해졌고, 오래전에 실종된 진실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말이 통하지 않는 여인까지 문간에 기대어 실로 행복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여인이 이야기했다. 지금 사람들이 이성을 잃었으니 속이기는 쉬우나 모두를 한꺼번에 구렁텅이로 빠뜨리긴 어렵다 말했다. 다른 여인은 답했다. 저들이 가장 원하는 건 입에 무엇이라도 넣는 것이라며, 손가락을 뾰족이 오므려 입안으로 넣는 시늉을 했다. 사무엘은 가방의 소중한 것들을 잘라내 이웃들에게 나눠주자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의 지혜를 가진 여인이 그것은 이미 썩은 냄새가 진동하기에 그것이 품고 있는 기운을 다른 데로 옮겨 이용해 보자 말했다. 남자의 입에선 어떻게 라는 질문이 나오려다 멈췄다. 그는 하얗고 투명한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무래도 바깥세상에서의 경험이 풍부한 그녀라면 길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조용히 사무엘의 옆으로 와 가방을 낚아챘다. 다들 어안이 벙벙했지만, 깊은 속내가 있으리라 여겨 숨죽인채 그녀를 지켜보았다. 가방의 내용물을 이리저리 유심히 살펴보던 그녀는 자리를 떴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만히 기다렸다. 한 여인은 그녀가 불쾌한 나머지 침실로 돌아갔다고 했고, 한 여인은 회초리를 가지러 간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못된 아이를 혼내주기 위함이라고 사무엘을 놀려댔다. 사무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윽고, 백색의 여인이 나타났는데 그녀는 주둥이가 넓지만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정도 깊이인 질그릇을 들고 왔다. 반죽할 때 쓰는 뭉툭한 밀대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나이 든 여인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였고, 젊은 여인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여자는 쥐들을 항아리에 다 넣더니 곱게 그것들을 짓이겼다. 뭔가가 찍찍 대며 터지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마치 평생을 바쳐 겨우 발견한 광석에서 절대 변치 않는 알갱이들을 얻어내듯이 고이고이 갈아냈다. 나머지는 그녀의 고결한 몸짓에 넋을 잃고 바라봤다. 여인은 빛을 모아 어두운 타르타로스에 비추었다. 그리고 가벼운 턱짓으로 만족스러움을 표현했다. 그리곤 발랄한 몸놀림으로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금세 한 손에 작은 종지를 들고 돌아왔다. 원숙한 여인은 검지로 내용물을 찍어 이국인(異國人)의 입으로 가져다 댔다. 앵두 같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그것을 빨아들이니 서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음으로 약지를 찍어 사무엘의 입으로 가져다주니 그는 얼굴을 붉히며 그것을 받아먹었다. 처음에는 삼삼한가 싶더니만, 이내 새콤달콤하고 향긋한 맛이 입 안쪽까지 은은히 퍼졌다. 씨앗이 톡톡 씹히기까지 하여 염치 불고하고 한 번 더 맛보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그러나 입맛을 다시는 것으로 스스로의 충동을 잠재웠다.
늙은 가정부는 찬장에서 작은 빵 두 덩어리를 가지고 나왔다. 젊은 여인은 물 담긴 옹기에 가냘프고 고운 손가락을 담갔다가 손끝에 맺힌 물기를 바싹 말라비틀어진 빵떡 겉면에 가볍게 튕겨 댔다. 순간 부드럽고 푸근한 탄력이 차오르는 게 눈으로 보였다. 숙녀는 그걸 한 입 크기로 알맞게 찢었다. 입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까지 감안한 한 조각 한 조각은 네 명의 여인들과 한 남자가 잠깐의 행복 속으로 잠기기에 충분했다. 손바닥만 한 한 덩어리가 다섯 가슴을 채우고도 남았다. 만찬은 끝났다. 유령 같은 노파는 먹다 남은 종지에 흉악한 붉은 액체를 부었고, 남은 빵 한 덩어리를 따로 챙겨 사무엘에게 양손으로 건네주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머지는 전부 너에게 달렸다는 비장한 표정도 함께 넘겼다. 그는 그녀들 하나하나와 일일이 눈을 맞춘 뒤 지체하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어디로 갈지는 진즉 정해져 있었다. 사무엘은 한달음에 목적지에 다다랐다. 하늘을 뚫고 내려오는 차갑고 푸른 광선이 마치 그 집을 집중적으로 비추는 것 같았다. 그는 숨을 멈추고 잰걸음으로 문 앞으로 갔다. 주먹을 너무 꽉 쥐지 않고 공손히 나무 판때기를 두드렸다. 창백한 몰골의 남자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기록관을 힘겹게 맞이했다.
“어서 오게, 내 안 그래도 자넬 기다리고 있었다네. 며칠간 똑같은 꿈을 꿨는데 말이야. 신기하게도 자네가 늘 나왔단 말이지. 아무래도 자네와 대화를 나누란 계시가 아닐까 싶네.”
순간 그의 환영인사가 사무엘의 마음을 기묘하게 만들었으나,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콧속을 휘젓는 역한 냄새가 방안 곳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은 달빛이 드는 창가 쪽 탁자에 자리 잡았다. 그 위에는 동물들의 털이나 작은 뼈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사무엘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정확히 하자면, 맞은편 사내가 숨을 내 쉴 때마다 거북하고 더운 공기가 뿜어져 나왔고,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기에 입을 벌려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사무엘은 말없이 가방에서 종지와 빵 한 덩어리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손님이 이런 걸 내밀게 하다니, 귀족 체면 구겨지는구먼. 내가 얘기하지 않았었나? 내가 사실 이 마을을 세운 백작의 후손이라는 걸? 말 못 할 연유로 홀로 떨어져 나와 살았지만 이 마음 한 구석에는 늘 긍지를 품고 있었지.”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당장 따져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게걸스럽고 너절하며 더러운 행동은 그가 주장하는 고귀한 뿌리를 의심케만 할 뿐이었다. 그는 쉬지 않고 빵을 입 안과 밖으로 씹어댔다. 쩝쩝 짭짭 빵은 끈끈한 침과 뒤섞여가며 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그는 어깨까지 뻗은 고수머리를 연신 뒤로 넘기면서 추저분하면서도 끈기 있게 되새김질해댔다.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썩은내가 진동했고, 그 부위 여기저기를 물들인 옷의 얼룩이 사무엘의 신경을 거슬렀다. 남자는 탁자 위로 팔을 최대한 넓게 펼쳤다가 감싸 안았다. 마치 자신의 것에 눈독 들이지 말라고 경고라도 보내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어디에 마음이 동했는지 사무엘에게 말을 건넸다.
“이건 대체 무엇으로 만든 즙 이길래 이리도 영롱한 빛을 띤단 말인가. 걸쭉한 이 액체 속에 셀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아 보이지 않은가.”
“그건 거룩한 뜻을 품어 자신의 몸뚱이를 기꺼이 내놓은 생명으로부터 쥐어짜 낸 것입니다. 부디 그것이 선사하는 권능을 취하시어 이 마을이 마땅히 맞이해야 할 운명으로 이끄소서.”
그의 입안에는 미처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은 찌꺼기들이 그득그득했으나 상대에게 그걸 보인다는 부끄러움 따윈 품지 않았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무엘 쪽으로 입을 쭈욱 벌리고, 그 붉은 액체를 빵에 잔뜩 묻혀 입안에 넣었다. 이 사이 사이에는 꿈에 나올까 두려운 광기들이 빼곡히 끼어 있었다. 그는 천상의 황홀함을 독차지한 것처럼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몇 번 더 추잡한 몸짓을 반복하더니 결국 종지 깊은 곳까지 혓바닥을 집어넣어 핥아댔다. 사무엘은 끔찍한 그의 모습에 최대한 초점을 흐리려 했지만, 코를 뭉개는 듯한 악취가 그를 이 지옥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붙들어 맸다. 사무엘은 목적한 바를 다 이뤘기에 자리를 뜨려 채비했다.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할 이야기가 많은데 왜 벌써 일어나는 것이냐며 힘겹게 말했다.
“저는 더 이상 백작님께 드릴 게 없습니다. 내일 아침에 찾아뵙도록 하지요. 혹시 압니까? 밤새 무슨 요행이라도 생겨 백작님이 기뻐 할 멋진 세상이 펼쳐질지 모를 일이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백작의 후예는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더니 소리쳤다.
“그렇구나, 그대 어서 가 신하 된 자로서 소임을 다 하거라. 나를 즐겁게 할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쉬이 몸을 뉘여선 안 될 것이다.”
사무엘은 그가 입을 벌리는 동안 겨우 숨을 참았다가 부리나케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는 두근두근 하며 뛰는 심장소리를 누군가에게 들킬까 두려웠다. 어디론가 몸을 숨겨야만 했다. 자신의 집에는 하얀 남자의 환영이 다시 돌아왔을까봐 가지 못했다. 그에겐 한 밤의 지루함과 맞서 싸울 아늑한 공간이 필요했다. 역시나 한 곳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나, 며칠 내 연속으로 머물렀던 그 장소가 주는 익숙함은 따분하다 못해 숨 쉬는 것 자체에 염증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신선한 공기와 낯선 구조가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주길 기대했다. 그리고 시체가 없길 바랐다. 이제 나쁜 냄새는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이 저주받은 마을에 썩은 향이 자리 잡지 않은 곳이 과연 있을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었다.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발걸음을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흙더미가 발바닥에 쩍쩍 달라붙는 듯 무거워졌다. 천근만근인 몸을 계속 이끄는 건 무리였다. 그는 잠시 어느 통나무집 담벼락에 기댔다. 여기는 대체 어딜까? 추측컨대 모든 인간들이 숨을 죽여 잠들 정도의 늦은 밤은 아니었다. 하지만 썩어버려 텅 빈 나무는 아무 소리도 전달하지 않았다. 그는 있는 힘을 쥐어짜 집의 정면으로 돌아갔다. 여긴 마을의 두 번째 장로인 칼 레도의 보금자리였다. 그에겐 가족도 일을 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평생을 외롭게 홀로 지낸 괴팍한 노인, 아마 수십 년 전에 그가 아무리 미성(美聲)을 가진 미남자였다 할지라도 그 성미를 견딜 사람은 못 만났을 게 분명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까다로웠을 것이며, 유별나기가 병들어 죽기 직전인 노인보다 심했을 것이다. 이 집에는 그 말곤 누구도 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노친네는 행정관 집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사무엘은 망설임을 멈추고 문을 밀고 들어갔다. 누군가 이미 힘껏 발로 차버렸었는지 제 기능을 못했다. 다행히 그를 반기는 어떤 악취도 없었다. 집안은 난장판이었다. 사람이었는지 짐승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온 집안을 헤집고 뒤집어 놨다. 찾고자 하는 게 무엇이든 그 비슷한 것이라도 있었다면 깡그리 훔쳐 갔을 만큼 샅샅이 그리고 철저히 겉과 속을 뒤집어 놨다. 그는 초라하고 딱딱한 침상에 걸터앉았다. 내일에 대한 기대감에 잠이 오지 않을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철퍼덕하며 오른쪽 몸뚱이를 뉘었다. 묵직한 눈꺼풀이 끔뻑끔뻑했다. 바닥에 희끗희끗하고 네모진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마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수십 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평소 사무엘이라면 단박에 일어나 그것들을 주웠을 테지만, 그럴 기력 따윈 남지 않았다. 그는 죽음처럼 무거운 잠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기록관은 다시 태어났다. 종소리는 멈춘 지 오래였다. 지저귀는 새소리도, 찍찍대는 쥐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바람처럼 가볍게 엉터리 백작 집으로 한달음에 뛰어갔다. 현관으로 올라가기 몇 발짝 전부터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올라가 귀를 문에 갖다 대었다. 웃음과 중얼거리는 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자세히 들어보니, 단 한 명의 광인이 지치지 않은 원기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내일이 되면 백마를 타고, 괴물들을 물리치러 가야 한다. 시종은 어디 있는가, 내 황금 투구와 장창을 준비하라. 낄낄낄. 나를 호위할 병사는 삼백 명이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사랑스러운 나의 세 여인을 지키도록 해라. 무엄한지고! 어디 말대꾸를 한 단 말인가. 내 위엄에 짓눌려 명령을 수행하는 게 차가운 칼날에 목이 떨어지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내일 난 무수히 많은 괴물들을 무찔러야 해. 그것들은 인간들을 수프로 만들어 살아가는 잔악무도한 것들이야. 결코 고결한 우리들과 함께 공존해선 안 될 존재들이지. 자 어서 가자. 내가 앞장설 것이니, 내 몸뚱이의 뼈와 살같이 들러붙어 나를 따르라. 낄낄낄.”
사무엘은 허탈함에 그의 말소리가 흘러나오는 벽에 등을 맞대고 주저앉았다. 독기가 그의 몸뚱이에 마구 번식하여 그를 잡아먹길 바랐건만. 지독한 악인인 그는 도리어 그 해악을 마시고 더 왕성해지다니, 기록관은 절망에 사로잡혔다. 상상이 심히 어긋난 버린 까닭에 희망이 검은 연기처럼 하늘로 날아갔다. 통나무 틈으로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같잖은 소리를 더 들어주기엔 인내심이 바닥 나 버렸다. 사무엘은 입을 벌리고 턱을 앞으로 꾹 내밀었다. 목 뒷덜미가 뻐근하고, 콧구멍으로 뜨거운 게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은 몸이 한결 나았다. 칼 레도 집 바닥에 뿌려진 종이가 번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새로운 보금자리로 복귀해 종이들을 발로 대충 슥슥 모았다. 낯익은 글씨체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허리를 구부려 곰팡내 나는 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종이 밑에 깔린 먼지가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기록이 이 공간에서 읽혀지길 기다린 게. 두서없이 펼쳐지는 과거의 진술이 안갯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장면들에 끼워 맞춰졌다.
그는 다음날도 동이 트기도 전에 귀족의 집으로 뛰어갔다. 부디, 그가 간절히 바라는 소망의 첫 단추가 끼워지길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도착한 그는 잠시 거리를 좁히지 않고 머뭇거렸다. 양손의 손가락을 사이사이에 꽉 끼우고 기도하는 자세로 희망을 꿈꿨다. 자비를 갈구했다. 그의 고상한 몸뚱이가 병들고 썩어 원대한 계획의 밑거름이 돼 주기만 한다면, 사무엘은 잠시 상상한 것만으로도 그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몰라 몸을 배배 꼬았다. 떨리는 맘으로 땅을 스치듯 조심스레 반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시름 놓으면서도 초조함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눈을 꾹 감고 망설이던 왼발을 다시 앞으로 내디뎠다. 어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말소리인 줄 알고 뭔 얘기를 하나 잠자코 들어보니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흡사 짐승의 신음소리였다. 어린시절의 사무엘은 딱 한 번 난산으로 고통받는 망아지의 비명과 신음으로 밤새 시달린 적이 있다.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초저녁, 마구간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동물의 앓는 소리가 그자리에서 그를 귀 달린 망부석으로 만들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강렬한 굉음은 흉폭한 힘으로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끌어당겼다. 피하고 싶은데, 벗어날 수 없고, 마주치기 싫으면서도 거역할 수 없는 성난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인간의 언어로 옮겨서는 안 될 결코 발을 들여서도 안 될 금단의 영역은 몸 안에 잠재되어 있던 야만적인 색정을 들끓게 했다. 인간의 지성과 감성만으로는 절대 설명 못 할 불가사의한 힘이었다. 그 밤의 기억이 그 이후 사무엘을 더욱 금욕의 길로 이끌었었는데, 오늘 그 날 밤에 버금가는 떨림과 두근거림으로 발작했다. 인간이 인간이라 불리기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시절 우린 아마 편의에 따라 앞발을 땅에 내디뎠을 것이며, 욕구에 따라 입에 넣어서는 안 될 것을 아무렇지 않게 구멍으로 쑤셔 넣고, 충동에 따라 가장 가깝게 있다는 이유의 대상에게 성적 행위를 일삼았을 것이다. 한번 빠지면 결코 도망치지 못한다. 지하 깊은 곳에서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는 기운을 억누르고 외면하며 살았던 그에게 드디어 해방의 순간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어 가만히 문을 열어젖혔다. 경이로운 기적이 그를 맞이했다.
거기에선 결코 훔쳐봐선 안 될 동물이 알몸으로 몸부림쳐댔다. 그는 최초의 인류라 자부할 인간조차도 까마득히 알아차릴 수 없는 생물, 수 천 수만 세대를 거슬러 진화한 존재, 옷 대신 털과 두꺼운 가죽을 더 믿고, 부끄러움의 의미 따윈 알지 못하며, 태어났기에 살아갈 뿐인, 탄생의 순간 경이로움보다 역겨움과 불쾌함을 발산했을 존재 그 자체였다. 그의 온몸은 분뇨와 피고름으로 낙인찍혔다. 사무엘은 확신했다. 자신 또한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라고. 이것은 결코 목도해선 안 될 장면, 설령 우연히 마주한다 하여도 꽁지가 빠지도록 세상 끝까지 도망쳐 머리를 싸매고 잊으려 온갖 노력을 해야 겨우 영겁의 처벌을 피할 죄악이었다. 그 옛날 우연히 여신의 목욕장면을 본 사냥꾼이 네 발 달린 짐승으로 변해 결국 자신들이 기르던 사냥개에 갈가리 찢겼다. 하지만 이 광경은 부주의했던 고인(古人)의 과실에 비할 데가 못 됐다. 그는 반드시 자신이 상상 못 할 벌을 받아야 함을 다짐하고 또 이유를 되새겼다.
그에겐 다시 도움이 필요했다.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한 그는 자신들의 뮤즈에게로 향했다. 여자들만 사는 집에 거리낌 없이 들어가던 소년은 사라졌다. 그는 조심스레 현관문을 두들겼다.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그러자 평소라면 되돌아갔을 그의 발걸음이 더더욱 과감해졌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의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들어간 그의 앞에 이국의 여인이 나타났다. 거침없는 사내를 양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이 뒤로는 더 이상 가서는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단호히 가로저었다. 짧은 시간 그의 이성적 사고는 뭉개져 버렸기에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
“왜 그러지? 내가 다른 여인에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밤새 증오로 똘똘 뭉친 음침한 여신이 찾아와 당신의 가슴에 가시 돋은 장미 덩굴이라도 심어놨나? 이전의 나라면 당신의 그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였겠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당장 물러나. 그렇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어.”
그는 팔을 뻗어 그녀의 부드러운 겨드랑이 밑을 파고들며 여인을 밀쳐냈다. 더 이상 절제하지 않아도 될 욕망을 이용하여 그녀에게 수치심을 들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리어 두 손바닥을 그의 가슴팍에 힘차게 내리꽂았다. 사무엘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눈이 뒤집힌 그가 벌떡 일어나 온 힘을 다해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그녀가 곧바로 응수했고, 앳된 사내는 힘이 작용한 반대편으로 꼬꾸라졌다. 있는 대로 성질이 뻗친 그는 곧장 부엌으로 달려갔다. 더러운 식탁 위에는 주둥이가 짧은 항아리 몇 개와 역시 여러 벌의 날붙이들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단지 안에서 고소하거나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는 무뎌 보이지만 두텁고 끝이 뾰족한 칼을 집어 들었다. 그의 눈깔은 이미 흰자로만 번뜩였다. 뒤돌아 목표로 향하려는 찰나, 그를 독점하고 싶어 남자를 폭력으로 길들이려 한 광폭한 주인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이 몸짓 저 몸짓으로 그에게 뭔가를 전달했다. 이내 다른 네모진 칼을 집어 들더니 나무 탁자를 툭툭 내리치고, 항아리에서 거친 가루들을 움켜쥐어 들어 올리더니 손아귀를 서서히 풀어 작은 알갱이들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을 자신의 코에 대보곤 입을 벌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곧바로 그의 얼굴로 갖다 댔다. 시큼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향내를 맡은 남자는 조금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의 뇌리에 한 괴물의 발버둥이 스쳐 지나갔다. 혹여 누구라도 그것을 대신 잡아가선 안 됐다. 그것은 자신만의 전리품이고 또 다른 삶을 살게 할 희망이었다. 사무엘은 되돌아온 갈색 눈동자로 그녀의 파란 눈동자를 응시했다. 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역시나 준비되어 있던 큰 항아리에 이것저것을 담았다. 그들은 함께 모험을 나섰다. 괴물을 무찌르고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들의 행동을 재촉했다. 남자가 다시 거실로 이르자 여자는 혹여 그의 발걸음이 집 안쪽으로 향할까 봐 게걸음으로 그가 나아갈 방향을 경계했다. 그는 대체 저기에 뭐가 있길래 그토록 자신을 방해하는지 궁금했지만, 손에 들린 이 무거운 물체만 있다면 나중에라도 실컷 확인할 수 있으리라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들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아침 속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