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마에게 새로운 임무가 부여됐다.
매사에 불퉁스럽고 험악하게 구는 데다 정작 힘든 일에는 뒤로 빠져 관망하는 이고르, 역시나 손에 흙 한 터럭 묻히지 않지만 일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이상한 잔꾀만 굴려대는 마듀, 그리고 호의적이지 않은 몇 명의 농부들. 마을 제일 집정관 헨데의 절대명령 아래 꾸려진 이 오합지졸들로 막시마는 마을 안에 작은 우물을 파내란 명령을 받았다. 사람들이 마실 물은 계곡에서 길어다 사용할 수 있었지만, 동물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필요한 물을 허접한 통으로 날라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다. 물 긷는 자들의 어깨가 나마나 질 않았다. 출렁출렁한 물통이 양 쪽에 달린 나무대기를 어깨에 짊어지면 나중엔 인간의 등이 굽던지, 나무가 휘던지 둘 중에 하나는 꼭 고장 난 종말을 맞이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들이 파낼 우물은 인간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함이 아닌, 동물의 갈증을 해갈할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어찌 됐건 막시마에겐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잘 해내고 싶었고, 이 우물이 자리 잡는다면 나중엔 그 곁을 지나다니는 선량한 주민들도 구덩이가 내준 단물로 목을 축이리라 믿었다.
그러나 임무는 개시 전부터 삐거덕거렸다. 이 일을 해내야 할 구성원들에게서 볼맨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지금껏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잘 살아왔건만, 이제 와서 굳이 우물 따위가 필요한지에 공감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더 나은 삶을 꿈꿔 본 적이 없거나 꿔선 안 된다고 마음을 걸어 잠근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막시마는 동기(動機)야 말로 모든 일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첫날부터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일의 의미와 가치를 설파했다. 녹슬어 빡빡한 빗장을 조심스레 열어 변화라는 달콤함을 맛보게 하고 싶었다. 농밀한 꿀의 진한 풍미를 맛본 꿀벌이 또 다른 꽃을 찾아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 오늘부터 전 여기 모인 분들과 함께 길이 남을 금자탑을 이룩할 것입니다. 여러분 중 누군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한낱 우물 하나에 뭘 그리 거창한 허풍을 떨어대냐고. 겨우 지하로 땅굴이나 파는 건 두더지나 하는 일에 지나지 않다고. 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서 하늘을 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어두운 땅 밑으로 가히 찬란한 하늘의 빛이 이어지는 광경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내 그 구멍은 공허한 무에서 생명의 근원으로 출렁거릴 것입니다. 그곳에서 퍼낸 물로 말미암아 가비뇽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 전부는 어떤 피로도 잊게 해 줄 한 잔의 안락함을 얻을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더 나아가 우리의 후손은 선조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왜 우리를 계속 기리고 지혜를 따라야 하는지, 한 세대의 수명은 유한할지언정, 인류의 존속은 계속 이어진 다는 참된 이치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로 인해 가비뇽과 소중한 생명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저는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음에 이 자리가 더욱 뜻깊게 다가옵니다. 벅차도록 설렙니다. 물론, 이 마을에서 살고 있는 전부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기에 마을이 유지되 온 것은 잘 압니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쭉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앞으로 자신과 이웃의 몸을 편리하게 하고, 물을 구하러 가는 시간을 절약함으로써 더 유익한 일에 시간을 쏟을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당장의 하루를 충실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일을 위해 준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지혜를 갖고 있음을 증명하는 길일 것입니다. 지금 당장 공감하시지 못한다 해도 좋습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오늘처럼 내일도, 모레도 여러분이 힘을 낼 수 있을 때까지 격려해 드리고 일에 의미를 일깨워 드릴 것입니다. 제가 더 앞장설 것이고, 더욱 힘을 쏟을 것이며, 더 큰 헌신을 보일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부디 억지로 일을 하진 마시고, 스스로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신다면 그때 합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 이제 말을 마치고 바로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한편 마을의 서쪽에서는 또 다른 자에게 무거운 임무가 내려졌다. 바로 메로빙과 레도를 주축으로 게라드, 그리고 몇 명의 목수가 무리를 이뤄 나무를 파내고 마을의 면적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진행되는 두 과업은 표면적으론 마을 환경을 개선하여, 주민들의 편의를 증진시키려는 공통된 목표가 있었다. 이 거창한 마을 정비 사업은 수십 년 전 숲 속에 터를 잡을 때나 했을법한 일들로 주민 전부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치단결하여했던 것들이다. 당시에는 단 한 명의 진두지휘와 다시 한번 살아보자는 공동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가비뇽은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늙은 행정관 헨데와 젊은 행정관 비시, 그들은 가문의 가주로써 동일한 속내를 갖고 있었다. 자신이 상대 집안을 찍어 누르고 지속적인 권세를 누리는 것. 이들은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이 단순한 목적만을 궁리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내리는 의사결정과, 언행은 결국 이 초라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의 호의호식의 영속을 추구하고자 함이었다. 전날 어느 야심한 밤, 누군가 막시마 집 문을 몰상식하게 두드렸다. 바깥에 있는 상대의 얼굴을 굳이 마주하지 않아도, 상대가 품고 있는 불쾌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런 소란이었다. 막시마는 아이들이 깰까 얼른 문을 열어 무례한 자를 확인했다. 얼굴에 야비함과 간사함이 온몸에 배어 있는 남자는 눈을 한껏 추켜올려 막시마를 올려다봤다. 그 안에 서려있는 불안과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못나게 가늘고 찡그린 눈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집주인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막시마를 이 마을로 되돌아오게 한 장본인은 막시마가 마을에 머무른 지 두 달이 넘을 동안 방문은커녕, 단 한 번의 알은체도 안 했다. 그자는 퉁명스럽게 말을 던져댔다.
“헨데 집정관님께서 당신을 찾으십니다.”
“이보게, 자넨 예의란 것도 모르나? 얼마나 급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그리 문을 경박스럽게 두드리는 겐가? 뻔히 아이들이 잠들어 있을 거란 생각까진 못 한 겐가? 아니면 그러든지 말든지 알바 아니라는 태도인가? 내 인사까지는 바라지도 않네만, 개인적으로 자넬 너무 편하게 대한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드는군.”
막시마는 그 운명의 밤, 남자가 했던 말들이 단순히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았음을 다시 기억해 냈다. 남자를 향한 그의 시선은 인간적인 실망이 담겨 있었다. 상대는 그의 눈빛이 신분의 차이에서 비롯된 업신여김이라 받아들였다. 부아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걸 드러낼 때가 아님을 스스로 되새겼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워낙 시급하게 지시하셨기에 그 중대함을 잊지 않느라 사려 깊게 행동치 못했습니다. 저란 놈이 그 정도 그릇밖에 안 되지 않겠습니까? 너른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구려.”
막시마는 남자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면 할수록 깊은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괴이쩍은 그의 태도는 뒤로 하고 그에게 문밖에서 잠시 기다리라 말했다. 막시마는 별안간의 소란으로 강아지들이 놀라지는 않았을까 침실로 가보았다. 다행히 그들의 미소는 그대로였다. 막시마의 마음은 누그러들었고, 조용히 집밖으로 나섰다. 막시마는 헨데의 집으로 가는 내내 침묵했다. 오밤중에 자신을 부른 연유가 궁금했지만, 게라드에게 물어도 모를 수 있을 것이고 또 안다고 해도 흔쾌히 답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상대는 단순히 존칭을 사용하고 싶지 않단 이유로 입을 꾹 다물었다. 헨데의 집으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이미 여러 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다랗게 네모진 탁자의 건너편 가운데에는 늙은 행정관이 불 켜진 양초를 곁에 두고 앉아 있었다. 불빛은 겨우 얼굴을 비쳤을 뿐, 그 외 나머지는 어둠 속에 숨겨 놨다. 그의 왼편에는 젊은 행정관이 역시 작은 양초만으로 간신히 낯짝만 드러냈을 뿐, 몸뚱이는 어둠에 꼭꼭 감쳐뒀다. 그 옆으로 이고르와 알레르, 칼 레도가 순서대로 앉아 있었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흄과 나무꾼이 마주하고 있었다. 헨데는 막시마에게 나무꾼의 오른쪽 자리에 앉으라 했다. 게라드는 우물쭈물 대다가 방 밖으로 나갔다. 고요한 긴장이 살갗에 닿을 정도로 또렷이 흘렀다. 분명 자신이 오기 전까지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텐데, 지금 일어나는 괴괴한 정적이 자신 때문은 아닐까란 불안이 막시마에게 들이닥쳤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구석에 앉은 헤로도가 어슴프레 보였다. 막시마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으나, 기록관은 이 공간에 낯선 막시마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편이 편해지고, 긴장이 그나마 누그러드는 것 같았다. 차가운 얼음장을 깬 건 젊은 행정관이었다.
“대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이들에게도 정당한 자리가 필요해요. 마을의 미래를 짊어질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행정관님도 잘 아시다시피 이들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우리와 삶과 죽음을 함께 한 동지들이었습니다. 다 같이 이 낙원으로 추방당해 다시 한번 살기 위해, 이 땅의 독기를 발로 직접 밟아 잠재웠어요. 이들의 아버지나 가족들은 애석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 조금의 안정도 누리지 못했지만, 다행히 그들이 남긴 소중한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고, 그들의 공로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남은 이 친구들에게 적절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가 말한 대우받아 마땅한 자들은 헨데 옆에 줄줄이 달려 있는 자들일 것이다. 라 이고르, 알레르 메로빙, 칼 레도, 세 남자의 얼굴은 감당 못할 상황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헨데가 어떻게든 하겠지란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 있었다.
“말이 나왔으니 따져봅시다. 일단, 그들이 여느 사람들과 구별된 자리와 권한을 가져도 될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까? 그들이 단순히 우리 가문들과 오랜 연이 있다는 것이 이유라면 어느 누구도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정받지 못한 사람의 직책이 어찌 제대로 쓰일 수 있겠습니까? 라 이고르, 사막에서 태어난 자네 할아버지는 칼과 창으로 무장한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굴복한 이교도였어. 우린 숭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역만리까지 떠났으나, 결국 허무한 실패만 맛보고 돌아와야 했지. 그때 자네 할아버지는 고된 원정에서 밝은 길잡이 노릇을 자처했어. 우린 자네 할아버지의 사슬을 끊어주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지만, 도리어 그는 자유 의지로 가족까지 데리고 우리의 귀향에 합류했지. 어차피 자신은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운명이라면서. 낯선 땅에서 정착하기가 여간 쉽진 않았을 테지만, 나를 비롯하여 여럿은 당신네 가족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지. 그 덕분에 자네가 이렇게 우리들과 나란히 앉을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바란다면 그것이야말로 욕심이 지나친 게지.”
이고르는 어딘가 불편한 짐승처럼 안전부절하지 못했다. 늙은이는 마른 장작을 패듯이 쉬지 않고 또 다른 나무토막을 받침대 위에 털썩 던져 올려놨다.
“알레르 메로빙, 인자한 가면 속에 음흉한 진심을 숨긴 놈 같으니라고. 네 놈이야 말로 밑바닥부터 다시 기어야 될 놈이다. 내 그리 때를 기다리라고 신신당부하였거늘, 좁아터진 마음으로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그 어리석은 의자에 앉아 뭘 바라고 있는 게냐? 너는 산자임에도 죽은 너의 아비를 부끄럽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구나. 네가 가진 불만이 정말로 정당하다고 생각됐다면 직접 날 찾아와 고했어야 마땅하다. 이 비열하고 겁 많은 녀석이 기껏 찾아낸 방법이란 게 고작 덜떨어진 네 죽마고우와 손잡고 징징대는 거였느냐? 썩 꺼지거라. 그 옆에 앉은 하찮은 것도 주어 가라. 무가치한 것들.”
무자비하게 내려치는 그의 도끼질에 메마르고 하찮은 땔나무들은 산산조각 났다. 비시 행정관은 가만있어선 안 됐다.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물러난다면, 오늘이 아니더라도 다음엔 자신이 쪼개질게 분명했다.
“어찌 그리 잔인하게 이들을 대하신단 말입니까? 옳은 신념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아 고통을 겪은 자들의 가여운 후손을 그리 박하게 대해셔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이들이 아직 성인으로서 부족한 걸 어찌 이들의 잘못이라고만 하실 수 있습니까? 저들의 뿌리가 세상이 나아지는데 헌신하느라 자신들의 가족을 돌보는데 소홀했고, 본인들이 흔들리지 않는 심지를 세우느라 자식들의 유약함을 방치했을 뿐입니다. 그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행정관님과 제가 이들을 보듬어 줘야 마땅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행정관님이 아버지처럼 저들의 잘못을 일깨우고 나무라셨으니, 저는 어머니처럼 이 미성숙한 존재들을 감싸고 이 상황을 양분 삼아 성장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게 제 역할일 것입니다. 부디, 이들의 부족함과 잘못은 따끔하게 꾸짖어주시되, 이들이 가진 의지가 완전히 꺾이게는 하지 말아 주시길. 이들은 그냥 마을을 위해 더 큰 헌신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남들보다 특권을 누리려거나, 편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도리어 작은 권한에 몇 곱절이나 되는 책임감과 의무를 짊어지려 하는 것입니다. 현명하신 행정관님께서 갸륵한 이들의 진심을 외면하시진 않으리라 믿습니다."
미소 짓는 헨데의 속은 널찍하게 커다랗고 움푹 파인 솥으로 변했다. 거기에는 별의별 잡것들이 마구잡이로 쑤셔 넣어졌다. 바닥에서 치솟는 화염은 솥을 무자비하게 달군다. 무엇하나 스스로 원한 것이 아녔다. 감정이라는 땔감이 탁탁 소리를 내며 활활 타올랐다. 전달되는 열에 몸뚱이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뒤틀릴 지경이다. 역한 냄새가 식도를 타고 입과 코로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깊은 곳에서 무엇이 끓든 간에 결코 몸에 이로운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어찌나 지독한 악취인지 위의 신물을 함께 실어 날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승리를 위해 이깟 어려움은 충분히 참고 버티어 이겨 낼 수 있다고 자신을 진정시켰다.
"그럼 내기를 해보는 건 어떤가?"
노인은 천진난만하게 제안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강요였다.
"고명하신 행정관님의 제안을 누가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모름지기 내기란 공평하게 시작되어야지만 승리의 여신도 눈여겨보는 것이지요. 생각해 두신게 있으십니까?"
젊은것도 지지 않았다. 수면 위의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려 안 보이는 곳에서 안간힘으로 발버둥 치는 백조처럼 필사적으로 허우적댔다.
"어이 막시마, 이 마을에 온 지도 꽤 됐지? 이 마을에 뭐가 들어서면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으냐?
노인은 평소와 다르게 거칠고 철없이 물었다. 막시마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 연유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잠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부리부리한 안광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의 눈도 마주치기 어려웠다. 차라리 잠시 어둠을 택하는 게 나았다. 곧이어 막시마는 안정을 되찾았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 필요한 것,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는 게 핵심이었다. 눈치를 볼 일이 아녔다. 빛의 잔상들을 빠르게 훑어봤다. 며칠 전, 마소를 먹이러 물을 길어 나르던 쟈빈의 힘겨운 모습을 포착했다. 이번에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분명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작은 알맹이들을 떠올렸다. 아침이면 여기저기에서 구린내와 지린내가 사방으로 퍼졌다. 변소로 쓸 마땅한 장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공간을 늘려 잘만 활용하면 해결될 일이지 싶었다. 마침내 막시마는 개안했다.
"마을 가까운 곳에 우물이 있었으면 합니다. 짐승들을 먹이기 위해 물을 나르는 이들의 고됨을 덜어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서쪽으로 터를 넓힌 다음 기둥을 심고 지붕을 세워 다 함께 사용할 공동변소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주변이 청결해질 뿐 아니라, 거름을 모으러 애써 돌아다니지 됩니다."
몇몇은 짜증 섞인 숨을 뿜어댔다. 노인은 노망이라도 난 것처럼 신명 나게 손뼉 치며 웃어댔다. 막시마는 당장 흘러나오는 반응들은 전부 외면했고, 말한 것들이 이룩됐을 때 터져 나올 환희만 속으로 그려댔다. 헨데가 불만이란 이름의 곤충을 씹던 입을 열려던 찰나, 권위 있는 노친네가 거룩히 막아섰다.
"재밌겠구나, 두 패로 나뉘어 일을 벌여보자꾸나. 우군과 좌군, 우군의 책임자는 막시마, 함께 할 이는 멧돼지 흄과 꼴도 보기 싫은 이고르다. 좌군의 책임자는 무능한 알레르, 거기에 여물을 입에 넣어도 아까울 레도를 끌고 가라. 부스러기 같은 천덕꾸러기 게라드는 아무나 데려가라. 헨데 네 놈이 보기엔 막시마가 입 밖으로 꺼낸 일들 중 뭐가 쉬운 일일 것 같으냐?"
늙은이는 명백하고도 시원시원히 편을 가름했다. 헨데는 머리를 굴렸다. 늙은 너구리가 쉬운 일을 고를게 자명했다.
"지하수가 고인 땅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서쪽 땅의 나무를 파내는 게 낫겠지요."
"그렇다면 네놈들이 땅을 넓히고, 나머지가 우물을 파내라. 먼저 나를 만족하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하겠다. 좌군이 이기면 헨데의 청을 들어주마."
동심으로 돌아간 노인은 깊은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오로지 재미가 그의 유일한 판단 근거임을 애송이가 알아차릴 리 만무했다. 헨데는 괜스레 열이 바짝 올랐다. '저 썩어빠진 노인네가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헨데의 입은 모래를 한 움큼 씹은 것처럼 불편했다. 그럼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역시 행정관님의 명판결은 사마리아의 옛 왕의 것과 견줄만합니다."
"속이 더러운 놈 같으니라고. 흐흐흐."
늙은 행정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서둘러 방문을 빠져나갔다. 나무꾼 비시가 뒤따라 나갔다. 이고르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어째서 자신은 상대편으로 배정됐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겨진 활에 재였던 화살이 막시마에게 집중됐다.
"네놈 혼자 다 알아서 해라. 다만, 지는 날에는 가만있지 않을 테다."
"기껏 생각해 낸다는 게 그딴 일이라니, 참으로 너 답구나. 내 그리 마을을 떠나라 일렀거늘. 기어이 또 일을 벌이는구나."
"내버려 두시오. 형님, 어릴 적부터 순진한 얼굴로 남들을 골탕먹이는게 습관이었잖습니까?"
"뭔가 생각이 있었겠지요. 아무렴 정말로 마을주민을 위해서 그랬겠습니까? 내일이라도 행정관님께 가 무릎을 꿇고 손쉬운 내기거리로 바꿔달라 빌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막시마?"
막시마의 결심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고, 입은 태산처럼 무거웠다. 다수인 상대를 맞아 대거리를 요란스럽게 하기에는 자신감이 부족했지만, 당장의 치욕을 만회할 기회는 반드시 오리라 믿었다. 더 주눅 들기 전에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아니요. 제가 헨데 행정관님을 찾아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승부가 개시될지 안 정해졌으니, 내일부터 당장 시작해도 되겠지요. 헛된 힘을 쏟을 바엔 차라리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낫겠습니다."
더 이상 돼지들의 대꾸는 없었다. 젊은 비시 드 오르는 목소리를 낮게 깔아 주변을 압도했다. 사자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들개가 설쳐대는 꼴이었다.
"막시마,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되돌아간다네. 불행일지, 행운일지 어쨌건 반드시 무언가를 품고 가겠지.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품을 수 있는 말만 내뱉어야 해. 지금 자네가 가볍게 지껄인 말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내 똑똑히 지켜봄세. 자네 또한 그 순간을 맞이하면 내 말이 떠오르겠지. 온 마음을 다해 오늘의 언어가 은혜가 되길 간절히 바라야 할 거야."
막시마는 앞으로 펼쳐질 설레는 일들을 가슴에 꾹꾹 눌러 담았다. 비시의 말은 아마 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 이제 그럼 전지전능한 막시마의 말에 따르려면 자리를 파하도록 합시다."
갑자기 불쑥 검은 그림자가 방안으로 침범했다. 헐레벌떡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누군가를 따라갔다 온 모양이었다.
"저는 알레르 메로빙 쪽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제가 아무리 무능하더라도 양손은 있으니 말입니다."
그 누구의 입도 벙긋하지 않았고 모두는 재빠르게 흩어졌다. 그것이 두 무리가 아등바등 거리는 과업의 전말이었다. 흔히 인간의 도량을 그릇에 비유한다. 실제로 사람을 곱게 갈고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물을 섞어 흠씬 치대어 빚은 반죽을 구우면 그럴싸한 사발이 될 수도 있겠으나 악신이 강림하지 않고서야 현실적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막시마는 자신의 그릇이 어떤 형태일지 얼마나 클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 정도 일은 품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당장은 버거울지라도 견디고 버티면 자신의 테두리가 조금씩이나마 넓어질 것이라 자신했다. 그는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두 발걸음은 어느덧 마을의 가장자리를 넘어 숲의 근방에 이르렀다. 집으로 가는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은 자신의 마음으로 향하는 길로 나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어둠을 똑바로 뚫고 가는 것만이 빛을 갈구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미 머릿속에는 일의 순서를 대충 짜놨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절대 혼자서는 불가능하단 사실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그들의 의지를 한 데로 모아야지만 일을 해치울 수 있었다. 작은 일부터 함께 해내가며 보람과 긍지를 느끼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설득과 솔선수범으로 충분히 고양시켜 준비된 자만 따르게 할 것인가. 뭐가 됐건 부딪쳐야 했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을 책임져야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는 건 누구나 아는 진실이다.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어느덧 늦은 밤에는 들어와선 안 되는 공간까지 이르렀다. 무아지경이 자신을 삶과 죽음의 경계로까지 안내했다. 주황 불들이 속속들이 켜졌다. 막시마에겐 송곳니에 의한 두려움 따윈 일지 않았다. 가장 무서운 건 오로지 자신이 옳다고 여긴 것을 스스로 저버리는 일이었다. 그는 충분한 방황을 마쳤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천사들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