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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by 고전을 마시다

영원한 작별을 알리는 종소리가 숲 너머까지 아스라이 울려 퍼진다.

느릿느릿하고 진득한 마찰음에 맞춰 사람들도 움직였다. 저마다 가장 말끔한 옷을 차려입고,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훌쩍거리는 사람과 괜스레 고개를 떨군 이, 표정을 감춘 자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자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받는 의식(儀式)은 시작됐다. 일정한 외형적 절차와 형식으로 이뤄지는 이 시간은 엄밀히 따지면 누워 있는 자에 관한 서 있는 자들의 기억을 정리하는 지극히 내적인 자리이다. 수백 명의 사람을 일일이 열거해 가며 오늘의 주인공에게 품었던 인상이나 감정을 묘사하긴 어렵다. 분명한 건, 이 자리를 통해 사람들을 가비뇽으로 이끈 남자의 격에 걸맞은 이별이 가능했으며, 그의 업적에 어울리는 충분한 존경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지나 간 삶에 대한 의례는 그럭저럭 끝났다. 이날 기억해야 할 순간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의 삶을 향한 의지의 충돌이다. 그 핵심은 역시 돌아온 백작의 아들, 르 막시마 쿠르파, 그가 전달하고자 한 진심에서 비롯됐다.


“이 자리에 모인 분들께 온 마음을 다해 전합니다. 제 아버지는 빛을 향한 여정으로 떠나셨습니다. 그의 마지막까지 함께해 주신 소중한 분들 덕에 그가 이웃과 마을을 위해 헌신한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들로서 그에 대한 존경심과 자랑스러움을 다시금 기억하게 되니 벅찬 감격에 목이 매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 갖는 감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히 오늘 이 자리의 말 몇 마디로 표현되선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향한 제 고마움은 저의 남은 삶에 걸쳐 이뤄질 것입니다. 사람들을 이 마을로 이끈 남자의 후손이며, 이 마을에 희망의 불씨를 선사한 한 인간의 의지를 잇는 자로서 전 존재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남자는 연단에 서서 진심으로 망자를 기렸고, 사그라드는 불의 의지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 누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누구의 감정을 건드리지도 않은 짧고 간결한 마무리였다.


어젯밤 마을의 늙은 행정관 클레는 막시마를 찾아왔었다. 늙은 행정관은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막시마에게 지금 이 마을에 필요한 것이 뭔 줄 아냐는 질문을 던졌다. 백작의 아들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오랜 시간을 떠나 있던 자가 쉽사리 답할 수도, 답해서도 안 될 질문이었다. 일종의 시험으로 받아들여도 과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몸소 찾아준 이에게 자신이 정답을 갖진 못했어도, 그걸 함께 찾을 의지가 있음은 알려주고 싶었다. 신중하게 답했다.


“저는 아버님의 빈자리를 대신한 여러분들이 계셨기에 마을에 당장 있어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처음 정착할 때, 당시 우린 집도, 먹을 것도, 일할 터전도 갖지 못했지만, 현재는 삶에 필수적인 요소를 충분히 갖췄다 봅니다. 다만 인간으로서 단순히 생존의 형태를 탈피하고,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선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과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지혜를 빌려주시면 힘껏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대가 아버님과는 사뭇 다른 걸 내 오늘에서야 알겠네. 그에게는 세상 전부를 태우고도 남을 확신이 있었지. 절대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려 들거나, 타협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어. 신에게 마저 틀렸다고 할 수 있는 그의 굳건함은 주변 이들을 매료시켰고, 그 덕에 우리의 운명은 여기까지 흘러왔지.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일 걸세. 신의 장난으로 내가 과거 어떤 선택의 기로로 돌아간다면 이전과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 장담 못하네. 그러나 그런 바보 같은 상상을 하기엔 우리가 이 대지에 제 발로 딛고 있을 시간이 너무 짧지. 난 말일세, 이곳에는 당장 질서가 부족하다고 확신하네. 자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많은 혼란이 있었거든. 난 그것을 바로잡고 싶을 뿐이고, 그건 나 혼자만의 힘으론 불가능한 것이지. 당장 뭘 어쩌자는 건 아니야. 자네 말대로 지금은 시간이 필요해, 마을에게도 자네에게도. 그러나 이거 하나는 약속함 세나. 아까 말한 대로 나는 지혜를 빌려 줄 테니, 자넨 나를 돕는 게야.”


늙은 남자는 매끄럽지 않은 미소를 띠었다. 막시마는 그의 말에 숨은 의미가 있을 것만 같아 대답을 신중히 골랐다.


“행정관님을 돕는 게 마을과 주민들을 위한 것이라면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기꺼이 그럴 것입니다.”


늙은 남자의 얼굴은 부동에 가까웠으나, 억지로 입꼬리를 광대 쪽으로 올리고 눈을 초승달처럼 지었다.


“역시 그 아비에 그 아들이군. 잘 돌아왔네. 내일 장례식은 우리가 준비할 테니 아무 걱정 말게나. 그냥 간단한 추모사만 준비하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면 도리어 백작을 애도함에 어긋남이 있을 수 있으니 유념하게나. 그 점은 현명히 잘하리라 믿네.”


막시마는 그의 마지막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에 조문객들에게 감사함과 앞으로의 다짐으로 짧은 추도를 마친 것이다. 그러나 사소하면서도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앞으로 이 마을이 어떻게 흘러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비록 하룻밤밖에 보내지 않은 걸 알지만, 백작님을 보내기 전 그분 앞에서 아드님의 의향을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질문을 던진 자는 비시 드 오르, 마을의 젊은 행정관이었다. 그의 질문이 다소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아버님의 의지를 잇는 자를 표명했으므로 그것을 밝히는 게 가히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막시마는 잠시 망설이는 동안 아버님이 이루려 했던, 그리고 자신이 믿는 인류의 지향점, 옳다고 여기는 덕목을 정리했다.


“이 마을은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죄를 결코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우리 개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해야 할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다른 생각에 대한 포용, 자연에 대한 감사한 마음,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함을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오랜 시간 이 마을을 떠나 있던 탓에 당장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답을 드리긴 어려울 듯합니다. 부족한 저를 가련히 여기시어, 이 자리의 답은 이 정도로 만족해 주시는 건 어떨지요.”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 경건한 자리의 의미를 처음부터 다르게 받아들였던 자들에게 그의 답은 눈동자 앞의 바늘처럼 위협적이었다. 앞서 언급된 것들은 넘길 수 있다고 해도 마지막에 덧붙여진 단어는 몇몇 사람들의 귓가에 닿자마자 그들의 가슴속을 불타오르게 만들었다.‘평등’, 그 단어에 반응한 인간의 마음속 발화점이 낮은 것인지, 아니면 단어 자체가 품은 열기가 너무 뜨겁기 때문인지, 원인이 어쨌건 그들의 심장은 고통스러웠다. 누군가는 백작의 아들이 건방지지만 좀 더 지켜보기로 정했고, 누군가는 단박에 그를 미워하기로 결론지었다. 아니, 그가 돌아오기도 전부터 그를 미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막시마가 비운 공백은 꽤 길었고, 그 사이에 겨우 무언가를 움켜쥔 몇몇의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서슴지 않을 자들이 되어 있었다. 자신에게 겨우 주어진 작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오히려 가련하고 순수했다. 악의는 하찮은 부스러기를 지키려는 과정에서 자라난다. 생각지도 못한 이 우연의 찌꺼기에 대한 소유욕은 강해진다. 이걸 뺏기는 끔찍한 일을 피하기 위해 이 방법, 저 방법을 사용하다 보면 결국 양심은 눈이 멀어버린다. 단 한 번만 사용하려 했던 몽둥이 끝에 묻은 추악함이 점점 퍼지더니, 마침내 인간의 심장까지 더럽고 흉악하게 물들어 버리는 것이다. 깨끗한 욕심은 인간에 의해 더럽혀진다.


막시마는 순백의 군중들 속에 이질적인 눈빛들을 감지해 냈다. 그럼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앞서 언급한 것은 모든 게 불분명한 상태에서 반드시 움켜쥐어야 할 최소한이었다. 나머지는 아무래도 괜찮다. 그는 아랫배에 힘을 꽉 줬다. 죽은 자는 양지바른 곳에 묻혔고, 산자들은 음지로 돌아왔다.


쾅쾅쾅쾅, 옛 백작이 머물던, 막시마의 집으로 두 명이 찾아왔다. 집주인은 많은 이들 틈에서 주황빛을 발산하던 손님들을 알아봤다. 사내들을 안으로 불러들인 막시마는 거실에 자리 잡았다. 비시 드 오르, 장례식장에서 질문을 던졌던 젊은 행정관이 말을 꺼냈다. 그 옆에는 늑대의 얼굴을 한 자가 서있었다.


"이 마을로 돌아오신 특별한 까닭이 있습니까? 당신 아버님의 죽음과 당신의 복귀가 너무나 공교롭게 이뤄졌지만, 뭐 어찌 됐건 좋습니다. 혈육이 참석한 장례를 마다 할 망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행이라고 칩시다. 여기까지는, 하지만 앞으로는 어찌할 겁니까?"


그의 말투에서 꽤 불쾌한 것들이 묻어 나왔다. 막시마는 상냥히 답했다.


"객지를 떠돌며 고향을 그리워했던 자가 마땅히 올 곳에 이제야 도착한 것뿐입니다."


질문을 던진 사람, 답을 내놓은 사람 모두 원치 않는 답이었다. 사내는 재차 물었다.


"그래요. 자신을 제 발로 찾아준 인간에게 땅은 늘 축복을 내리지요. 그 과정이 워낙 험난해서 그렇지. 하지만 말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심어주지 못한 자의 말만 믿고 이 땅에 들어선 인간은 불행해질 겁니다. 당신이 아무리 바깥에서 몹쓸 것에 물들었을지라도 눈앞에 펼쳐진 비극으로 기꺼이 걸어 나가지는 않겠지요? 그 정도로 어리석어 지진 않았겠지요?"


"존경하는 비시 드 오르, 당신이 내게 무얼 일깨우려는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많은 배움이 절실한 순간입니다. 한편, 당황스럽기도 하군요. 저의 발걸음이 이리도 심각해지다니. 저를 너무 겁주진 마시지요. 마을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저의 목표는 당신들과 다르지 않거든요. 설령 차이가 있다고 해도 맞춰 나가면 되겠지요. 제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다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절대 융화될 수 없는 것. 천천히 따져봅시다. 나는 급하지 않으니."


"네, 그러시지요. 아 그리고,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데. 이 집에서 일하시던 분들은 다들 어디 가셨는지요. 제가 앞으로 뭔갈 하려면 아이들을 돌봐 줄 누군가 필요할 텐데요."


"남의 집의 애들을 따로 돌봐 줄 한가한 사람이 마을에 있을리가요. 평등 아닙니까. 평등. 각자의 앞가림은 알아서 해야지요. 그럼 평안한 밤 보내시오."


사내는 찡끗 웃으며 돌아갔다. 그 옆의 사내는 끝까지 입을 한 번도 열지 않았다.


막시마의 머릿속에 혼란이 침범하려 했으나, 그는 의식적으로 그걸 차단했다. 남자는 자신의 유일한 보물들에게로 향했다. 마을의 두 번째 밤이 힘겹게 지나갔다.


그는 종소리가 울리기 전 실례를 무릅쓰고 한 집에 방문했다. 한 사내가 막시마를 맞이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남자와 함께 간단한 아침 식사를 들고 있었다. 알레르 메로빙, 칼 레도는 막시마가 마을을 떠나기 전 돈독한 사이였다. 그는 본받을 만한 성품을 지녔던 그들을 잘 따랐다. 잠시 집 내부를 살폈다. 둘은 함께 기거하는 듯 보였다. 그간의 사정을 듣고 싶었지만, 반가움이 앞섰다. 이들을 보니 자신이 잘 돌아왔다는 안심이 될 아주 작은 온기를 얻을 것만 같았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형님들, 잘 지내셨습니까. 이 못난 아우가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잠잠히 있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알레르는 숟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말했다.


"바깥에서 어련히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지고 돌아온 건 몸뚱이와 어린아이 둘 뿐이라며? 나는 뭐 대단한 귀환이라도 했나 싶었네."


막시마는 숨이 탁 막혔으나, 모진 순간을 내어준 그들의 처지를 헤아리기로 했다.


"예. 그리 됐습니다. 그래도 마을의 어르신들과 형님들이 계시니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겠지요."


"그래 아침부터 뭣 때문에 우릴 찾아온 건가? 반가움에 형님들을 찾아온 것이라기엔 행색이 참 초라하군. 설마 우리에게 부탁이 있어 온 건 아니겠지? 십 수년 동안 닳아버린 옛 우정이라도 남아있길 바란 건가?"


메로빙의 비아냥이 막시마의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한 마디 작별인사도 남기지 않고 떠난 자가 무슨 염치로 이들의 환대를 기대했을까. 들켜버린 알량한 마음에 부끄러웠다. 자신에게 내려지는 냉대가 당연하다 고 받아들였다.


"제가 돌아왔는데, 인사는 드려야지요. 앞으로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죠."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고 싶어 고개 숙이며 황급히 돌아서는 막시마, 함부로 몸을 뒤튼 탓이었을까? 그의 배에서 나온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가 빈 공간을 가득 채웠다. 부리나케 집밖으로 나섰다. 낄낄거리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현관을 나서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곤혹스러웠다.


"막시마."


남자는 목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렸다.


"이걸 가져가게."


메로빙은 한 손으로 작은 헝겊주머니를 건넸다. 결코 눈물 따윈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였건만, 그걸 두 손으로 받는 순간 뚝하고 떨어지는 물방울이 그의 의지를 수포로 만들었다. 매인 목은 어떤 소리도 허락지 않았다.


"아무도 자넬 반기지 않아.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자네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없어. 그냥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낼게 아니라면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가. 자네가 온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피해자가 생겼어. 당한 사람에게 상대의 의도는 그리 중요치 않거든. 자신이 받은 불이익만 기억하고 그 원인을 제공한 자에 대한 미움만 남지."


막시마의 귀에 그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헝겊에 든 게 곡식가루 인걸 확인하고, 얼른 아이들 입에 넣어줄 생각뿐이었으니까. 고개를 못 들던 남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아이들은 깨어나 눈을 비비적대며 칭얼거리고 있었다. 미리 떠놓은 물그릇에 밀가루를 풀었다. 아이들은 야무지게 고사리 같은 작은 두 손으로 그걸 꼭 쥐고 부드러운 고개까지 젖혀가며 꿀꺽꿀꺽 마셔댔다. 그는 속으로 감사하다고 쉬지 않고 외쳤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활기차게 들렸다. 막시마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일어났다. 아이들을 꼭 안아주며 집 안에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당부를 남겼다. 마음속 심지를 바로세운 그는 얼른 집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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