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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제발, 내 진심에 귀 기울여 주시오.

by 고전을 마시다

뱅살 백작은 당장이라도 의회에 있는 인간을 모조리 도륙내고 싶었다.

이 자리에 있는 소수 인간들의 결정이 참여 권한도 없는 수많은 인간들의 인생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칠게 불 보듯 뻔했다. 진지한 토론은 개시조차 안 했다. 삶은 달걀 서너 개 일삼아 까먹는 시간이나 할애했을까. 오늘의 경솔한 판단으로 일어날 잔인한 대립과 증오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우리 세상을 뒤덮을지 모를 일이다. 더 우려되는 건 반목과 분열 때문에 아예 다른 배에서 나온 진정한 적들과 제대로 맞서지 못할 상황이다. 이 자리까지 올라온 자들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이리도 자각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들과 나란히 앉는 자로서 창피했다. 자신의 간절한 호소가 저잣거리의 왁자지껄한 소란쯤으로 치부되다니. 백작이란 작자가 갖는 지위와 권위가 이다지도 쓸쓸했다니.‘이 성의 지존인 나의 아버지가 날 외면하기 무섭게, 내게 고개를 조아리던 이들이 날 턱으로 내려다본다. 그들의 가볍고 간사한 몸짓에 치가 떨렸다.’ 망연자실, 우두커니 앉아있는 그를 두고 군상들은 더욱 크게 웃고 떠들었다.‘우리가 그간 널 무서워 한 줄 알았느냐? 넌 하찮은 놈이다. 너의 위치를 뼈저리게 깨닫고 다시는 교만하게 굴지 말거라. 이참에 다시 탕아의 면모를 뽐내지 그러냐. 이곳은 너 따위 어중이떠중이가 있을 자리가 아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말거라.’ 입에서 풍기는 온갖 잡내가 백작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외로움이 뼛속까지 스며들어왔다.


백작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롱에 맞서 일어나는 노여움을 가라앉혔다. 미처 몰랐던 자신의 무능을 알게 해 준 이들에게 감사함을 가졌다. 마음에서 우러난 것은 아니나 억지로라도 그러려 애썼다.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여 자신의 감정을 다잡았다. 더 나은 사람이 돼야 했다.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지상을 올바르게 이룩하기 위해 얼마간이라도 이바지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부터 다스려야 한다. 무겁고 딱딱한 것들은 깊은 곳으로 가라앉힌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운다. 그 누구도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았음을 눈을 떠보니 알게 됐다. 천장 높은 이 공간에 차가운 공기가 쉴 새 없이 맴돌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위를 쳐다봤다. 늘 보던 프레스코가 낯설다. 우릴 굽어 살피던 인자한 얼굴이 고개를 돌린 것처럼 보였다. 축복을 내리려 비스듬히 기울어졌던 신성한 술잔이 바로 세워졌다. 버림받은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깨에 걸린 묵직한 망토가 땅으로 가라앉았다. 의회 문을 나서자 밖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두 명이 그의 뒤를 따른다. 절벽에서 추락하던 남자는 절묘하게 아래에서 불어 올라오는 시원하고 든든한 바람에 충격을 다소 줄였다. 그의 발걸음에는 힘이 실렸다. 가고자 한 문 앞에 이르기 위한 수백 걸음 동안 머릿속을 백지장처럼 비웠다.


막상 목적지에 다다르니 그는 잠시 망설였다. 이 나무장벽을 밀어젖히면 돌이킬 수 없다. 슬픈 눈과 굳세게 다문 입을 한 그는 조심스레 양팔로 문을 밀었다.‘아버지, 의회에서 날 조롱하던 남자 둘, 내게 전혀 두려움을 품지 않는 남자 하나, 그렇게 네 명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난 오로지 내게 생명을 부여한 자만 바라봤다.’그 방의 모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먼저 꺼내는 자가 가장 심약한 자로 낙인찍힐 터였다.


“내가 자네들에게 전할 말은 다 했네.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시게나.”


좌우에 있던 자들은 살짝 머뭇거렸다가 움직였다. 두 명은 백작을 못 본채 했고, 한 명은 군인으로서 예를 갖추며 나갔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침묵은 조금 더 지속됐다.


“앉거라. 우린 공적인 관계이기 전에 부자지간이 아니더냐. 사람들을 물린 이상 너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 내겐 가장 중요하구나.”


순간 자신의 불같은 각오가 누그러짐에 백작은 흠칫 놀랐다. 역시 이자는 노련한 자임을 잊어서는 안 됐다. 사소한 것이라도 그의 말을 듣는다면 다짐이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허벅지와 오금을 단단히 조이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눈에는 서릿발을 세웠다.


“아버님, 우리는 불쌍한 나그네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의 사악함과 분란을 일으키려는 욕구를 간과했습니다. 우리의 잘못입니다. 그걸 인정하면 전부 해결되는 것입니다. 잘못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이걸 바로잡으면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음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늦지 않았습니다. 아니, 늦었다 하더라도 아니함보다 나을 것입니다. 제발 결정을 돌려주십시오. 그들과 공존한다는 건 후세에 재앙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노인은 창가부근에서 천천히 몇 발자국 옮기다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들어 얼어붙은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너는 우리의 후손이 불행할 것이라 장담하는구나. 언제부터 네게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생겼더냐. 오늘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오직 그 분만이 알고 계신다. 설령 최악의 사태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그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설계된 일부일테지.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한 이상, 그것에 따르고 조화롭게 어울릴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부딪치고 좌절하며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아니더냐. 내 너의 성정을 모르는바 아니니 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너의 아비이기 전에 이 성의 영주이다.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질서를 무너뜨릴 수 없다. 판단은 다수에 의해 결정된 것이고, 그 방식은 예전부터 평화롭게 합의된 체계다. 더 이상 번복을 논하지 말고 현명히 대처할 수 있도록 내 곁에서 힘이 되어 다오.”


“다수의 합의가 슬기로울 수 있는 건 개개인이 신중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거쳤을 경우입니다. 오늘 의회는 사람들이 지난 오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 일을 사사롭게 여겨 자신들의 사명을 소홀히 여긴 결과입니다. 하다못해 이 사안을 진지하게 다룰 기회를 한 번만 더 요청드립니다.”


“너는 어떤 근거로 사람들이 경솔했다고 말하는 것이냐. 또한 그들이 자신의 책무를 망각했다고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내 그리 방자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일렀거늘. 자신보다 타인을 헤아려야지만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그렇게 쉽게 무시할 정도로 그들의 세월이 헛되지는 않다. 도리어 명명백백한 것이기에 이야기가 쉽사리 끝났다는 생각에는 못 미치는 것이냐.”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면 사람들이 벌벌 떨 위용을 뒤에 세워 놓아야 한다고도 가르치셨지요. 오늘 당신은 제 의견을 묵살하여 절 멸시했고, 덕분에 전 일찍이 경험치 못한 냉대 속에 모멸감을 톡톡히 느꼈습니다. 제게 오늘 부족했던 건 위압감이었습니다. 그걸 깨우쳐 준 그들에게 감사합니다.”


“존경이란 받고 싶은 사람이 아닌 받을만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나라고 어찌 처음부터 위엄과 존중을 얻었겠느냐. 우리가 얼핏 다른 사람 위에 위치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티끌만 한 잘못도 감추지 못하고, 어디에서 던져 진지 모를 갈고리로 언제든 쉬이 끌어내려질 자리에 놓여있다. 거기다 우리 정수리 바로 위에 위태롭게 매달린 저 날카로운 칼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정확히 모르나 우리에겐 타고난 지위가 계승됐다. 그렇기에 늘 스스로를 삼가고 타인에겐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이 잘 돌아가면 당연하게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우리 부자의 탓으로 돌린다. 말도 안 되지만 그게 우리가 짊어진 무게다.


그리고 회의에 앞서 이방인들의 사상을 몰아내야 한다는 언질을 내게 미리 비춘 적이 있느냐? 네놈은 너의 생각을 표정만으로 헤아려주기만을 바란다. 내 널 그 정도 그릇으로 밖에 길러내지 못했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 네가 그 허무맹랑한 원정으로 십수 년간 자리를 비운 탓에 진짜 배워야 할 것을 놓친 게야. 이미 수백 년 전에 퇴색된 명분을 들고 나설 때 내 너를 말려야 했다. 내 아끼는 신하들을 너에게 딸려 보냈던 건 네가 옳았기 때문이 아니다. 너를 사랑해서였다. 너에게 작위가 내려진 건 너의 공적이 컸기 때문이 아니다. 네가 헛수고했다는 좌절감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국왕께 내가 간곡히 요청했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패배감을 안겨주는 자가 아니다. 내 비록 너에게 완벽하진 못했으나, 난 너를 감싸주기 위해 존재하는 자다.


그러니 아들아 이번만은 내 진심을 믿어다오. 너에게 처음 털어놓는구나. 내 일찍이 이번 사안에 대한 진상을 따로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이번 일은 무작정 반대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 나그네들이 우리 성으로 들어온 것은 이미 계획된 것이고, 성내 조력자들이 적잖이 있었어. 다른 성의 사례도 몇 군데 조사했지. 최악의 경우 그들이 정치와 행정에까지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만, 너와 내가 힘을 합한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도리어 새로운 세력을 이용하여 구세력을 견제하고, 더 나은 질서를 도모할 수 있다. 미리 너와 상의하지 못했구나. 용서해 다오. 네가 이 아비의 진심을 받아 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어. 나 또한 그릇이 이리도 작구나. 이제라도 내 간곡히 말하마.


도와다오. 너의 힘이 필요하다. 네게 닥친 위험은 마찬가지로 내게도 향한다. 아직은 내가 그걸 해소할 수 있지만, 나중에는 너 스스로 견뎌야 한다. 날 믿고 따라주면 사람들도 너에게 마음을 열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란다. 네 곁에 나의 자리를 내어다오.”


“아버님, 당신의 뜻을 잘 알겠나이다. 부디 이 못난 아들의 부족함을 용서하여 주시길. 이 방을 나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백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바깥에는 여전히 두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백작이 원정을 떠나기 훨씬 이전부터 심복이었다. 그들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명으로 백작을 지켜주고 있었다. 둘은 곧장 백작을 따라가지 않고 방으로 들어와 자신들의 옛 주군에게 경의를 표했다. 노인은 미소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른 아들을 따라가라며 손짓했다. 마침내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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