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부지런한 사람이 이른 아침 집밖으로 나서도 반드시 그보다 일찍 몸을 움직이는 자가 있다.
바로 이 마을에서 가장 손가락질받는 여자의 아들, 콘스탄틴이다. 비록 죄를 지은 당사자는 아닐지라도 어머니에게 지워진 징벌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궂은일을 도맡으면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았다. 사무엘은 콘스탄틴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놨다.
‘인간에겐 출생하면서부터 타고난 것이 있고, 어린 시절에 교육으로 길러질 수 있는 것이 있고, 어른이 돼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인간은 바로 이 세 가지로 형성된다. 콧방울이 뾰족한지 뭉뚝한지, 귀가 안으로 오그라들었는지 바깥으로 펼쳐졌는지, 손발은 어떤 크기 인지, 금발인지 흑발인지, 눈동자의 색깔은 죽었는지 살아있는 지와 같은 것들은 날 때부터 갖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만 길러지는 것은 당장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지만 드러나는 것이 있다. 식사 자리에서 음식을 입에 넣고 어떤 소리를 내는지, 식기를 쥐는 손은 어느 쪽인지 등은 어린 시절에 겉으로 파이고 깎인 조각이기에 바로 드러난다.
자신을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 사람과의 유대를 바라보는 시선, 자신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믿음, 옳다고 여겨지는 행동의 범위, 그런 것들은 내면에 새겨진 각인이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역시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한건 사랑인데, 사랑은 삶의 풍요를 담을 수 있는 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각자에게 의미가 다르며, 추상적인 것이기에 표현 방식이 각양각색이다. 어떤 이에게 사랑은 헌신하여 지킬만한 고귀함이다. 어떤 이는 사랑을 입에 담는 것조차 몸서리쳐질 정도로 천박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긴다. 또 다른 이는 사랑과 이별을 동일시하여 사랑함과 동시에 슬픔에 잠식된다. 가장 가련한 이는 사랑으로 가장된 학대를 진실로 믿어버린 사람이다. 학대의 표식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고스란히 옮겨진다. 상처 주고 시험하며 상대가 견뎌내는 그 모습에서 진심을 느끼는 것이다. 최악의 사랑은 바로 목적을 위해 상대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다. 확실히 사랑은 받은 만큼 줄 수 있고, 어린 시절 자신 주변을 둘러쌌던 세계의 색깔과 온도를 바탕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최악의 사랑을 고집하는 인간도 어찌 보면 가련한 희생자라 할 수 있는데, 운이 좋으면 기적 같은 구원자가 나타나 기존에 알고 있던 사랑을 송두리째 뽑아놓고 사랑의 정의와 방식을 새롭게 심어놓기도 한다. 처음에는 희망의 싹이 피어나는가 싶지만, 대부분은 싫건 좋건 황폐한 원상태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결국 그 구원자도 역시 사람인지라 상처 입고 지쳐 다른 이를 찾아 떠난다. 다시는 험난한 것에 도전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면서.
나중에도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낼 일터, 집, 입을 수 있는 옷, 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를 다르게 한다. 커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물질의 풍요와 빈곤을 좌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나이가 찼음에도 여전히 스스로 가난하다고 여기는 자의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이 마을에서 가장 글자를 많이 알고 있는 난 배운 것을 물질로 바꾸는 방법은 모른다. 어릴 적부터 키워온 기록관으로서 소명, 그것을 계속 수행할 수 있는 것만으로 자긍심을 갖는다. 잠자리에 들기 전 미처 옮겨 적지 못한 사실이 있는지, 주어지는 식량 앞에 부끄럽지 않은지 자문한다. 늘 마음의 채워짐이 있다. 나는 물질에 대한 존재와 부존재로 인해 행복이 좌우되지 않았다.
이러한 나의 관점에서 콘스탄틴의 당당함과 타인에 대한 상냥함, 배려심, 이해심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는 몸 파는 여인의 젖을 먹고 자라며, 걸음마하면서부턴 몸 팔아 얻은 죽을 먹었으며, 사물을 식별할 나이가 돼서도 어린 새싹에 반드시 필요한 충분하고 품위 있는 영양분을 받지 못했을 텐데. 그렇다면 그의 얼굴에는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침울함이 그득하고, 어깨는 굽고, 입에는 늘 나지막이 중얼거림이 끊이지 않아야 할 거 같은데. 정녕 내 생각은 틀렸단 말인가. 그는 비록 성을 뺏겼거나 영지가 망해버렸지만, 여전히 정신적으로는 고귀한 귀족의 후손을 마주 한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루는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노인, 이루치가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마을을 빠져나간 적이 있다. 사람들은 이루치가 집을 찾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를 찾지 않았다. 그의 아들 내외조차 내심 한 입 덜었다는 안도감을 비췄으니, 어느 누가 나서서 그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선사하고 싶겠는가? 거기다 이번 실종은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대단히 현명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과연 언제 가장 경탄스러운 것일까. 바로 계산을 앞세우지 않고 선함을 행하는 경우이다. 바보천치여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선을 행하는 데 있어 그 어떤 이유도 덜 중요하기 때문이다. 온몸이 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자식들을 뒤로하며 굶주린 들개 앞으로 나서는 것과 같이.
콘스탄틴은 비난을 무릅쓰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행동을 하고자 수고와 대가를 기꺼이 지불했다. 콘스탄틴은 하룻밤을 꼬박 새워 그 노인을 찾았고 자기 집으로 모셨다. 겉으로는 달가워하지 않았을지언정,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그 사생아의 행동이 축복받을 만한 것으로 생각했으리라. 약자를 구하고, 뒤따르는 책임을 짊어졌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인 것이다. 선행에 대한 대가가 그리 가혹하지 않다는 미담을 남기고 싶어서였을까? 노인은 이튿날 바로 죽었다. 그나마 발목 끝에라도 인간성이 걸려있던 아들 내외가 눈물을 훔치며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돌아갔다. 그럼에도 콘스탄틴은 마을의 천덕꾸러기로 계속 손가락질받았다.
콘스탄틴은 행정관 헨데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한다. 그러나 주로 바깥이 아닌 집안일을 거든다. 그렇기에 어떤 일을 해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걸음마를 떼고 겨우 자음 모음을 발음할 수 있을 때부터 그 집안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했을 것이다. 참으로 어린애에게 몹쓸 짓이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이 마을 최고 권력자의 명령인 것을. 그렇게 십수 년을 그 집의 종으로 살았다. 거기서 어린 시절을 포함한 삶의 대부분을 어떤 경험으로 채웠고, 그게 한 인간의 형성에 어떻게 작용했을지 모를 일이다. 누군가는 부정한 엄마와 함께 있는 공간보다 행정관의 집에서 종노릇 하는 게 더 나았을 거라고 했다. 정말 그 이유로 그의 허리가 곧게 펴졌고, 타인을 배려하며 살아간다고 한다면 난 납득할만하다.’
그에 비해 마을에서 힘 있는 지위와 발언권을 갖고 있음에도 천박하고 세상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는 이가 있다. 에드뉘, 마귀 같은 헨데의 아내이다. 우중충한 어느 날 찢어지는 고함을 찾아 사무엘이 쫓아가 보니, 에드뉘가 부정한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바닥에 이리저리 내팽개치고 있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년, 네년이 왜 아직도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너는 벌을 받는 거냐, 축복을 즐기고 있는 거냐? 너는 암퇘지만도 못한 짐승이다. 왜 아무도 널 해치지 않는 거지?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만 해.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때 늘 옳은 결정을 할 수도 없거니와 같은 인간을 대하는 측은함 때문에 죄인을 가엽게 여기는 게 현실인 걸 알지만 그건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어둠 속에서 빠져나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쏟는 헌신이야.”
그녀는 정의를 구현하는 악마의 사역자처럼 분노했다. 양손으로 가녀린 여인의 뒤통수를 야무지게 움켜쥐고 팔을 땅바닥으로 쭉 뻗은 채로 그녀의 죄질이 얼마나 나쁜 것임을 일깨우고 있었다. 심판당하는 이는 시선을 바닥에 두고 육체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둘 뿐이었다.
“하지만 넌 그 상황을 즐기고, 죄를 뉘우치지도 않았어. 받아야 할 벌을 더 이상 받지 않는 것에 감사함도 몰라. 은혜를 베푼 가족에게 상처만 주고 있어. 나는 너 때문에 가슴 한가운데가 활활 타오르고 물을 마실 때마다 입에서는 구정물을 삼키는 것 같은 역겨움을 느낀단 말이야. 너는 내 삶을 죽음보다 못한 것으로 바꿔놨어. 난 그 어떤 인자한 인물보다 더 참았고, 넌 이제 그 요람에서 숨어있어선 안 돼. 원래 네가 받아야 했던 벌을 다시 받도록 해라. 그리고 이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그녀는 무차별했던 처음과 달리 아귀에 힘을 꽈악 쥐었다 풀었다 하며 간간히 여인의 투명한 뺨을 손바닥으로 탁탁 쳐댔다. 그러면서 마음에 담긴 말을 제대로 쏟아냈다. 시들한 금발 여인은 여전히 입에 자물쇠를 굳게 채웠다. 그녀의 입 자체가 열린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혓바닥이 사라진 것일지 모를 일이다. 그녀들을 둘러싼 전부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여인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사무엘만이 그녀의 육신이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그 가운데도 절대 꺾이지 않을 꿋꿋함을 엿봤다. 겉으로는 인간임을 자각할 존엄성은 따윈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지만 그녀는 마치 일찍이 누군가에게 받았던 한 줌의 존엄성을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것처럼 굳셌다. 그 표정은 인간임을 포기한 사람도, 앞으로 삶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무심함도 아니었다. 마치 세상에 존재했던 아니면 앞으로 존재할 거센 돌풍 속에서 수많은 나뭇잎을 잃거나 심지어 자신을 이루는 가지들이 갈기갈기 찢겨 나간다 해도 몸통과 뿌리는 건재하여 결국 계속 살아가는 커다란 나무 같았다. 그 어떤 시련도 내 인내심보다 내 질긴 생명력보다 땅속 깊이 박힌 내 굳건함보다 오래갈 수 없다. 너희는 단지 스쳐가는 찰나 일뿐이고 가진 것을 전부 쏟아내고 나면 소멸할지니, 진정 내겐 무가치한 것들이다. 내 껍질에 흔적을 남길 순 있더라도 내 안에 착실히 쌓여가는 나이테에는 결코 흠집하나 내지 못한다. 어여쁘게 적당히 휘어진 기나긴 속눈썹 속에 숨겨진 눈동자는 그렇게 얘기했다.
“이게 대체 무슨 부끄러운 짓이란 말이오. 당장 그만두시오!”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던 폭풍의 남편이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나타나 번개같이 그녈 밀쳐냈다.
“나의 아내로서 이 어려운 시기에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는 못할망정, 불안과 소동을 일으켜서 어쩌자는 거요? 당신의 이기적이고 천박한 행동은 나를 너무나도 부끄럽게 만들고 있소. 행정관의 아내라는 자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는 게요?”
원망 섞인 말소리에 폭풍은 고요해졌다. 그것은 아주 잠시였고, 이윽고 더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당신은 내게 행정관의 아내로서 기품을 요구하는군요. 그러나 당신이 먼저 행정관으로서 갖춰야 할 모범을 보이지 않았고, 남편으로서 지켜야 할 정절을 잃었어요. 난 그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을 뿐인데, 어찌 그것을 나무라는 건가요.”
그녀의 말은 짧고 간결했으나 정이 돌덩이에 찍히듯 파고들었고, 이내 쩍 하며 무섭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부정한 죄를 지어 벌을 받던 이를 자신의 처마아래 숨겨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피하게 했어요. 남자들은 자연스레 생겨난 성욕을 풀 부정한 그릇을 잃었고, 여자들은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본보기를 잃었어요. 이 마을에 질서를 부여해야 할 당신은 그것을 무너뜨렸어요. 그 이유는 더 가관이죠. 더러운 창녀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그 어떤 것이라도 한 줌이면 가질 수 있는 싸디 싼 몸뚱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당신의 아내를 저버렸어. 덕분에 난 반 줌의 오물만도 못한 여자로 전락해 버렸지. 그 부정의 열매를 집안에 들임으로써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모지임을 매 순간 깨달아야 했어. 그 어떤 빗방울도 날 적시지 못하고, 끝없이 바싹 타오르고 갈라지기만 해. 그 황량함에 기품이나 품위 따윈 존재하지 않아. 나는 껍데기뿐인 행정관의 아내야. 하지만 더 이상 이 펄럭이고 냄새나는 가죽을 붙들기 지쳤어.”
폭풍은 비를 동반하여 몰아친다. 지금 이곳을 둘러싼 폭풍은 그보다 훨씬 차갑고 날카로운 것을 품고 있다. 닿는 곳마다 상처를 내고 영원한 흉터를 남겼다. 유황비가 쏟아진 그 도시, 얼음송곳이 휘날리는 이 마을, 어떤 의지로 인한 것이든 심판이 일고 있다. 그곳에는 늘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못했음에도 죄인으로서 처형대 계단 아래 대기하고 있는 사내가 있다. 콘스탄틴은 우두커니 슬프거나 괴로운 것을 추적추적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상이 그에게 처음 가르친 것은 아마 그가 저지르지도 않은 것에 대한 손가락질조차 억울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리라. 썩은 늪지대에서 탄생했기에 어쩔 수 없는 악취를 뿜어야만 하는 존재, 그는 자신에게 향한 이 혐오의 감정을 억울해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신에게 더 크게 쏠리길 바란다. 그리고 제발,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누그러들길 기대했다. 폭풍은 그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었다.
“한 때는 진창에 빠져 더럽혀지는 남편을 구하려고도 했었지. 하지만 부정한 열매가 내 집안에 들어와 썩어가는 누린내를 풍기기 시작하면서 난 알게 됐지. 이젠 내가 구할 수 있는 것도,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것을. 나는 증오한다. 단지 내가 나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죄책감 때문에 너를 인정하고 감싸려 했던 사실을. 나는 부족했을지언정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야. 아니 조금의 잘못이 있었다고 할지언정 달궈진 바위 위로 내 영혼이 맨발로 거닐게 할 정도는 아니야. 나 자신을 위해 나는 너를 내 집에 들이지 않거나 내 발로 그 집을 나왔어야 했어. 나 스스로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미워해. 이제라도 난 참지 않기로 했어. 나 자신을 위해 나 스스로를 혐오케 만든 것들을 부수고, 파헤쳐서 모조리 지워버리기로 다짐했어. 손톱이 수백 번 빠지는 고통이 있더라도 좋아. 아니 즐길 거야. 그것이 내 남은 영혼을 살리는 길이라면. 나 자신을 먼저 용서치 않으면서 타인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냥 목구멍으로 식지 않는 숯을 삼키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 과정에서 폭력과 분노가 일어난다면 그것을 아낌없이 흩뿌리는 게 내 영혼을 위한 일인 거야.”
그녀는 아주 천천히 콘스탄틴에게 걸어갔다. 이윽고 눈을 의심케 한 행동이 이어졌다. 그녀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 더 큰 그의 양쪽겨드랑이를 파고들어 양팔로 그를 감싸 안았다. 그 둘은 동시에 그 집에서 처음 만났던 기억으로 되돌아갔다. 헨데는 꼭 붙잡은 어린 사내아이의 손을 에드뉘에게 건넸다.
콘스탄틴의 기억은 이랬다.
‘무서웠다. 뒤편으로 올려 가지런히 정돈된 머리가 그녀가 짊어진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나타냈다. 입은 억지로 다물고 눈매는 다부져 엄숙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온 눈동자 속 그녀는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망설이고 있는지, 반가워하고 있는지 아니면 전부일지, 번잡스러운 감정이 뒤섞여 있다. 앞으로 시키는 건 뭐든 할 것이라고 정중히 말하며 부드러운 배를 접어 고개를 숙일 수 있는 데까지 내렸다. 제발 저와 엄마를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에드뉘의 기억은 이랬다.
‘손을 잡았다. 너무 작아서 손목까지 한 번에 만져진다. 태어난 지 이제 갓 삼 년이 됐다고? 그런데 왜 이리도 마른 것인가, 포동포동해야 할 어린것이 단단해지지도 않은 뼈밖에 안 남았구나. 티 없이 순진해야 할 하얀 얼굴에 잡티와 수심이 그득하구나. 어서 먹이고 씻겨야겠다. 지금부터 이 아이는 내 아이다.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거야. 오늘 이 아이의 모습을 기억하자. 다시는 슬픔이 이 아이를 감싸 안지 않도록 내가 늘 감쌀 거야.’
둘은 기억했다.
‘날 왜 이리 꼭 안아주는 걸까? 날 미워하는 게 아니었나? 좋은 냄새가 난다. 포근하다. 배가 고프다. 잠들고 싶다.’
‘따끈따끈하다. 내 체온보다 높은 작은 것이 내 품에 있다. 순둥순둥 내게 몸을 맡기고 있다. 날 완전히 믿고 의지하고 있다. 가슴이 조용히 울고만 있다. 너는 앞으로 내가 지켜주겠다. 나의 아이다.’
지금 사무엘은 둘의 포옹을 지켜봤다. 그는 이 장면을 이렇게 적었다.
‘자신을 미워하게 만든 존재들에게 분노를 선사하겠다던 그녀, 그 분노란 용서와 사랑을 의미한 것일까.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혼미함과 인간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게으름, 그리고 상황이 무조건 원만하고 아름답게 해소되리라 넘겨짚어버리는 혐오스럽고, 구역질 나고 동떨어진 현실감각을 소유한 자의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그의 가슴에 기대 있는 그녀의 머리 위로 붉은 빗방울들이 쏟아졌다. 그녀의 가슴까지 단박에 파고들만큼은 아니지만, 생기를 잃고 말라버린 잎사귀들부터 적시기 시작한 액체들은 얼굴과 목을 타고 서서히 흘러내렸다. 그 따스하고 끈적이는 것들은 시간이 걸려도 분명 가슴까지 다다를 정도로 끊이지 않고 내렸다. 그걸 내리는 존재는 자신의 사명을 다 하는 양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자신을 타인에게 기꺼이 흘리고 있었다. 품에 안긴 여자는 소매에 감쳐둔 쇠붙이로 콘스탄틴의 등을 후벼 파냈다. 회색빛 세상에서도 유독 피만이 붉은빛을 잃지 않았다. 뒤편에 서있던 사람들은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충격에 움직이지 못했다. 정면에서 지켜보던 나를 비롯한 행정관은 그들의 놀라움이 그녀의 포옹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그녀의 진심에 행정관은 절규했다.’
“나의 아들아. 콘스탄틴. 대체 어째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냐.”
‘여인의 한이 아무리 날카로웠을지언정, 그 쇠붙이가 인체의 가장 치명적인 자리를 뚫었을지언정, 한창 혈기왕성한 남자를 단번에 무기력하게 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어떤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인지, 인간다운 사람과 교감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짐작할만하다. 그는 속죄의 후련함을 만끽하고 있다. 그녀는 그에게 처형 집행자가 아니다. 오히려 맹목적인 혐오와 비난의 고리로 죽 이어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속박으로부터 그를 끌러주는 해방자인 것이다. 몸에서 빠져나오는 피는 이미 썩었던 것이 콱 박혔던 가시가 빠지면서 분출되는 것이다. 진즉 짜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피고름이 쭉쭉 뿜어 나오는 쾌감, 안도감. 비로소 살 것 같다는 평화로움이 깃든다. 태어나 처음으로 맞이한 후련한 해방감을 안겨준 그녀에게 미소로서 감사함을 표한다. 눈은 고운 초승달을 뒤엎어놓은 듯하고 입꼬리는 자연스럽게 올라가 있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관한 징벌이 억울하지도 않았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견뎌야 했던 무자비한 고통, 앞으로도 빗처럼 쏟아질 화살 같은 비난, 그것만으로도 이미 자신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따지는 것이 무의미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그렇게 수십 년을 더 사느니, 부정한 그릇에서 태생한 저주받은 존재가 아닌 속죄로써 거듭난 한 인간으로 살길 바랐으리라. 비록 지는 석양조차 제대로 즐기지 못할 짧은 시간이지만 한 번이라도 이제 겨우 열여덟 된 사내아이로 봐주길 원했다. 사람들은 멸시와 경멸을 버리고, 눈앞의 청년을 하나의 사람으로 다정하게 바라봤다. 더러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미안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화해의 장면 속에서도 비극은 계속됐다. 콘스탄틴은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그녀를 자신의 품에 껴안고 있었고 이 결말을 예상했을 것만 같은 그녀 또한 그의 품에서 고개를 돌리지도 몸부림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누구의 목숨이 먼저 끊겼을까. 분명한 건 둘 모두 마지막 순간을 만족했다는 것이다. 콘스탄틴은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갖다 댔고, 그녀는 엷게 웃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들의 최후이다. 행정관은 울면서 그 둘을 떼어 놓으려 했다. 그들은 꼬옥 붙어있었다. 누구 하나를 억지로 떼어버리면 다른 이의 살점이 뜯길 것만 같이 함께 얼어버렸다. 누구 하나를 선택할 수 없었다. 손바닥을 두 사람의 등에 각각 올려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아마도 따스한 온기가 양쪽 모두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에드뉘는 콘스탄틴을 자신의 아들로서 끝까지 지키려 했다. 하지만 색욕에 눈먼 헨데가 그의 친모를 집 한 편으로 불러들인 뒤 모든 것은 뒤죽박죽이 됐다. 한 명의 쾌락을 위해, 다수가 희생당했다. 콘스탄틴을 가슴으로 낳은 여인은 아들을 지옥으로부터 탈출시켰다. 그를 배로 낳은 여인은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지켜볼 따름이었다. 사람들은 그 여인마저 동정했다. 안쓰러워 일으키려고도 했다. 승천한 여인과 남자는 끝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한 것이다.
이제 남은 숙제들은 산자의 몫이다. 누군가는 그들의 죽음에서 얻은 충격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칠 테지만 대부분은 그들을 애도했다. 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울음을 터뜨리는 이도 있었고, 당장은 덤덤해도 죽음에 관한 깊은 사유 때문에 몇 날며칠 밤을 지새우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더라도 그들이 갖는 것은 마음이 느끼는 기분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거나 다른 기분이 들어찬다. 지금 이 마을에서 가장 괴로운 이는 콘스탄틴을 열 달이나 몸으로 품은 여인이다. 그 여인의 고통은 말 그대로 신체가 끊어지는 그것이다. 상실 이후에도 통증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분명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곳에서 온기가 전해오는 것 같다. 그것은 본격적인 아픔이 찾아오기 전 조짐일 따름이다. 이내 세로로 똑바로 선 날카로운 칼이 그 빈자리를 쿡쿡 쑤셔댄다. 실제로는 그 부위는 존재하지 않고,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막을 수 도 피할 수 도 없다. 그런데 그 고통만은 실재한다. 이 영겁의 괴로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잊는 것인데, 그걸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내 품 안에 쏙 안기던 말랑말랑한 따뜻함을, 온종일 재잘거려도 지겹지 않은 목소리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모습이, 어찌 지워지겠는가. 도리어 기억하기 위해서 등가교환으로 성립하는 고통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존재, 바로 어머니. 그녀가 이 자리에 서 있는데, 어느 누가 함부로 슬픔을 입 밖으로 꺼내랴. 다들 은연중 그녀의 눈치를 살폈는데 예상과는 딴판이었다. 평소에 깊숙이 숨겨놨던 자아를 끄집어내 꼿꼿이 서 있던 것이다. 금발인지 백발이지 분간 못할 그 여자. 행정관과 아들을 낳았기에 오늘 이 사달의 희생자가 된 콘스탄틴의 어머니, 그녀는 더 이상 몸짓을 흐느적거리지 않았고, 회색의 눈빛도 버렸다. 아들의 장렬하면서도 슬픈 죽음을 마주하고 남은 자로서 뒷일을 수습할 결의를 다진 강인한 어머니가 되어버렸다.
망연자실한 행정관을 몇몇이 부축했고, 몇몇은 시신을 수습했고, 넋 놓은 채 지켜만 보던 이들도 감당 못할 감정들에 의해 흩어졌다. 단연 가장 큰 슬픔을 짊어지고 있는 그녀는 분별 있게 상황을 파악하고, 결합된 시신들을 수습해 가는 자들의 뒤를 쫓아갔다.
사무엘은 자신이 받은 강렬한 하루의 마무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생의 마지막은 여러 형태를 띤다.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타인에게 유발되는 감정은 다양하게 나타나겠지만, 결국 개인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우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인간의 죽음을 분석하는 것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오늘 얻은 내 직관적 인상을 정확히 기록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화나면 표정을 찡그리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고, 즐거우면 웃는다. 상황에 걸맞은 감정을 갖는 것이야 말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린 커가면서 감정을 숨기고 억눌러야 한다고 배운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게 과연 인간이란 피조물의 원래 목적에 맞는 것인지 고민이 된다. 여인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죄책감 때문에 돼먹지 못한 배우자의 혼외자를 인정했다. 그때부터 세상 모든 일을 괴로움이란 색깔로 칠해진 창을 통해 바라봐야 했으며, 진흙이 담긴 병에 물을 담아 삼켰다. 행복했을 리 만무하다. 제대로 분노했어야 했다.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건 결단코 부당한 일이라고. 억울함은 잔인하게도 그녀의 생명력을 점점 앗는 대신 원망을 부여했다. 몸뚱이는 무자비하게 쪼그라들어 다른 감정들이 설 자리를 잃게 한다. 청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에게 씌워진 불행의 굴레와 죄인의 낙인을 어찌할 바 몰랐다. 속으로는 매일 울고 있으면서, 어머니의 슬픔을 덜어 줄 생각 밖에 없었다.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리라. 바보같이 너무 빨리 철들었다. 아장거리는 아기의 굳센 모습 보다 가슴 아린 게 또 있을까? 걸음마를 뗀 뒤 시작된 교육은 슬픔을 더욱 숨기게 헸다. 응어리가 그렇게나 커지고 단단해지기 전에 울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눈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금방이라도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질 것 같은 투명한 유리 방울. 오늘 그들의 마지막 순간, 드디어 그것들은 흘러나왔다. 꾹꾹 억눌려 있던 감정이 해방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후련함으로 말미암아 대기보다 가벼워진 몸으로 이 회색세상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