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쟈는 지칠 줄 몰랐다. 특히 그의 눈에서 발산되는 은은한 광기가 그러했다.
“그대로라면 우린 산 채로 늑대의 우악스러운 턱힘에 뼈가 부서지고, 들쥐나 족제비가 살을 뭉텅뭉텅 뜯어가고, 사마귀, 개미가 남은 걸 잘근잘근 씹어대는 걸 느껴야 했을 거야. 이것보다 비참한 죽음이 있을까 싶었지. 억울하고 원통해서 승천 못 할 영혼이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볼 걸 상상하니 참 서럽더군.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어. 도둑놈들이 변덕을 부려 우릴 끝장내러 오는구나, 그래 차라리 목숨을 끊어 다오. 그러면 내 어떤 원망도 품지 않으마. 난 목청이 터져라 욕지거릴 해댔지. 어느새 친구들도 깨어나 고함을 질러댔어.”
사무엘은 이 사내가 어리석고 한심하면서도 가여웠다. 그래도 살아 돌아와 자신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므로 최악의 상황은 면했으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소리만 사라진 거야. 우릴 그냥 지나친 줄 알고 다들 펑펑 울었어. 최악의 희망마저 사라졌음을 인정해야 했지. 하지만 상냥한 그들은 세상 어디선가 자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낯선 이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하지 않았어. 그들은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기며 가여운 자들의 애원을 찾은 거야. 행여 우리 소릴 놓칠까 봐,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마차에서 내려 함께 걸어온 거지. 그렇게 꼽추인 남자와 미소 짓는 여자는 우리에게 나타났어.”
인간은 자신의 끝을 알 수 있을까? 인류사에 이름난 예언가들도 세상의 종말은 입에 담을지언정, 자신의 죽음을 언급하는 일은 드물다. 사소한 일이라서거나, 예지력이 발휘되지 않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소멸할 육신에 잠시 머무를 뿐이라는 그 평범한 사실을, 마음속에 늘 간직하는 가장 현명한 사람일지라도 그걸 입 밖으로 꺼내고, 시기까지 확정 지어버린다면 그때부터 인간은 움직이는 시체로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생의 끈을 꼭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 태어난 생물로서 주어진 유일한 도리이자 본능이다. 사무엘은 숲의 먹이가 되느니 차라리 죽여 달라는 심정으로 고함을 질렀다는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긴 어려웠다. 신의 힘이 제일 극적으로 발휘되는 순간은 바로, 죽음을 요구하는 인간의 지극함이 전능자를 자극했을 때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속눈썹만큼의 살고자 함은 감춰둔다. 인간을 빚어낸 신이 이걸 모를 리 없다. 생명을 준 은혜도 모르고, 간사하고, 비열하고, 변덕스러운 이 거짓말쟁이의 위선을 조롱하기 위해 도발에 응하는 것이다. 창조자는 간절한 이를 속속들이 파고들어 그 터럭을 찾아내려 애쓴다. 일종의 내기인 셈이다. 지하의 심부름꾼이 인간 영혼의 정수리에 손대기 전까지 삶의 희망을 발견하면 신의 승리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신의 헛수고인 것이다. 순전히 재미를 위해 인간에게 악덕을 부여한 장난꾸러기는 승리의 순간, 그 인간에게서 단박에 시선을 뗀다. 그러면 정해진 수순대로 영혼은 지하로 떨어지는 것이다. 하나 만에 하나 자신이 허탕 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명계의 장부를 무시하고 사자(使者)를 아무 데로나 옮겨버린다. 이유는 오로지 변덕과 재미, 어린아이 같은 심술뿐이다. 그에 반해 지하세계는 나름 철저한 원칙에 의해 움직이는 관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도 이러한 변칙이 일어난 경우에 한하여 처절한 분노를 방출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 명의 죽음이 미뤄지면, 수 백, 수천의 죽음이 예정보다 앞당겨진다. 인간으로서 삶에 대한 욕망을 철저히 숨긴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죽음을 외치는 자는 초월적인 의지로 삶을 갈구하는 것이다.
“꼽추가 마차에 태워주었기에 우리는 들짐승의 먹이가 되지 않고 다시 인간으로서 살 기회를 얻었지. 비록 맛은 형편없었지만, 여인의 수프는 굳었던 피를 녹였어. 그들은 미각을 되찾아주고, 입안이 마를 때마다 물을 챙겨줬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어쩜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던지. 참 고마웠어. 밤이슬을 피할 수 있게 되니, 얼마간의 기력을 되찾을 수 있겠더군.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라는 게 있지 않나.”
사무엘 입안에 단내가 퍼졌다. 쟈쟈는 상대 마음을 헤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음날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그들은, 이제 헤어져야 할 길에 들어섰음을 어렵게 꺼내더군.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난 말이네, 처음 얻어먹은 첫 끼 이후 맹탕인 국을 마실 때 떠나야 함을 알았어. 마침내 한계에 다다른 거지. 둘이서 천천히 즐겨도 될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다 보니 금세 동나버린 거야. 그럼에도 둘의 선함은 결코 동나지 않더군, 당연한 요구를 하는 와중에도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그들의 표정이 아직도 내겐 생생하네. 남자는 서둘러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둥 마차가 불편할 거 같다는 둥 서투른 거짓말을 해댔지. 동시에 아내는 불을 지펴 마지막 끼닛거리를 준비했어. 남자는 말에게 먹일 꼴을 구하러 간다며 나섰지. 마치 우리에게 마지막 양식을 기꺼이 양보하고 싶어 자리를 비우는 것처럼.”
사무엘은 모처럼 흐뭇한 감정을 느꼈다. 오랫동안 찾아 헤맨 인간의 선함을 낯선 이들로부터 엿본 것이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아직 인간을 철저히 불신하기엔 아쉬웠다. 얼른 경직된 가슴이 데워지길 바랐다.
“나는 많은 것을 받았음에도 아무것도 보답할 수 없음이 부끄러웠네. 거기다 마지막 남은 한 그릇까지 염치 불고하고 얻어먹어야 살 수 있는 필멸자의 숙명이 서러웠어. 하지만 두 친구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야.”
나무꾼의 아들은 전혀 조심스러워하지 않으며 퉁명스럽게 말했지.
‘우릴 버리고 가서 고기라도 구울 작정인가 보군.’
“곧이어 다른 자도 그 미움을 잘라먹으며 더 큰 미움을 뽐냈지.”
‘그간 먹은 건 그냥 더러운 맹물에 지나지 않았어. 도리를 아는 인간이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그들은 입에 든 악의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추악하게 키웠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처지인 사람을 변덕으로 버린다는 게 인간이 할 짓인가?’
‘우릴 인간 취급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상대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네, 아니 도리어 옳은 말이야.’
“난 사람이란 존재가 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 짐승보다 나은 생명이라고 생각했어. 추악함을 합리화하기 위해 은인의 고마움이고 개인의 양심이고 깡그리 무시할 수 있단 것에 놀랐네. 사람은 짐승보다 더한 짓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아챈 거야.”
“나는 잠시 그 여인의 눈치를 살폈네. 일행들의 부끄러운 대화에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어. 제발, 그 여인이 귀담아듣지 말아 주기를, 제발, 내 동료들이 인간임을 포기하지 말기를, 제발, 내가 그들을 바른길로 이끌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길.”
“내 세 가지 바람 중 한 가지는 다행히 이루어졌지만 두 가지는 이뤄지지 않았네.”
사무엘은 이뤄진 한 가지가 바로 용기의 발현이길 간절히 바랐다. 뱉어진 말은 주워 담진 못한다. 은혜를 저버린 순간부터 그들은 인간임을 포기한 것이다. 남은 건 마지막 한 가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생사를 함께 한 동료를 비난하거나 저지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내면에 있는 인간다움도 철저히 짓밟는 잔혹한 인간을 오로지 온정을 지렛대 삼아 선의의 길로 인도하기란 어렵다. 고통으로 마소를 훈련시키는 방법을 똑같이 적용하는 게 효과적일지 모른다. 인간의 마음이 고쳐지기란 개구리가 뱀에게 잡아먹히는 것만큼 보기 드문 일일 것이다. 부디 가엾은 저 청년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이어가도록 결단했길 바라며, 나머지 두 청년도 잠시 엇나가긴 했지만,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뒤늦게나마 아름다운 인간으로 복귀했길 기대하며 다음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나무꾼의 아들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여자의 관대한 태도를 보더니 더욱 열을 올렸네. 더 비열해졌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 해. 인간은 타인의 관용을 더 큰 무례함의 발판쯤으로 여기거든.”
“모든 행동의 기준을 바로 자신의 안전에 둔단 말이지. 처음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고, 그 디딘 자리가 위험하지 않다 싶으면 더 들어가는 법이지. 사람 간의 관계도 그래. 가만가만 다가갔다가 위험이 감지되지 않고, 뭔가 더 얻을 수 있다 싶으면 그때부터 가차 없이 추하게 구는 거거든. 그자는 집어든 사발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곤 말이 들리지 않냐며 고함질렀어. 그리고 벌떡 일어나 여인을 무섭게 쳐다봤지.”
“나무꾼의 아들은 이틀 전만 하더라도 입조차 벙긋 못했지만 그땐 이미 원기를 회복한 상태였지. 아무리 인자한 여인도 잠잠히 있기엔 소란이 너무 크고 거칠었어. 그러나 예상 밖의 반응이 이어지더군. 여인은 애써 눈가의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지만, 몸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어. 입에서 나온 단어는, 아니 말은, 아니 소리는 ‘아 아 아 어 어 어’ 그녀는 귀머거리였던 거야. 우리가 처음에 내뱉은 짐승들의 소리를 듣지 못한 거야. 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어.”
우리 내면에는 추악함과 아름다움이 웅크려있다. 상황에 따라 어느 쪽이 반응할지는 사람의 가치관에 달려 있다. 거기에 주변인들의 반응은 드러난 성향을 더 증폭시킨다. 더럽고 흉악한 이들이 모인 곳에서는 폭력, 광기, 혼돈, 파괴가 추앙받을 것이고, 훌륭하고 갸륵한 이들이 모은 곳에서는 포옹, 양보, 질서, 배려가 빛을 발할 것이다. 세상이 아름다움으로만 이루어졌다면 참 좋으련만, 악은 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인가. 사람은 스스로 영양분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따라서 다른 생명을 씹어 삼킴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살기 위한 일이다. 수가 늘어난다. 인간은 우주의 별만큼이나 많은 의지를 갖는다. 차이가 생긴다. 일부는 더 먹어야만 하며, 특별한 것을 원한다. 모자람이 발생한다. 누군가는 자연의 섭리라고 고함치고, 누군가는 차별이라고 맞선다. 다툼이 일어난다. 흥하고 쇠한다. 멸한 것이 다시 성한다. 어느덧 악은 인간사에 양면 중 한쪽이 되어있다. 선은 비열한 악을 처단하기 위해 폭력을 선택하고, 악은 어리석은 선을 부려먹기 위해 포옹을 강조한다. 이 둘은 한 몸을 갖고 있기에 서로를 완전히 말살하지 못한다. 상대에 대한 핍박을 조절하여 균형을 이룬다. 그 사이를 욕망이 파고든다. 이 변신의 귀재이자 유혹의 달인은 선과 악, 어느 쪽에도 속박되지 않고 둘 사이를 오고 간다. 상대를 어루만지고 달래어 무절제를 낳는다.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은 자식을 무기 삼아 한쪽을 겁박한다. 다른 한쪽을 멸할 때까지 멈춰서는 안 된다고 몰아붙인다. 다행히 아직까진 최악의 사태 직전에 혼미가 해소되었기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아마 모든 것은 이미 무(無)의 상태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무절제는 언젠가 자신을 태어나게 한 존재에게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바라지도 않던 생을 준 부모에 대한 보은으로 무자비한 종말을 선사함으로써 존재의 이유를 완성하려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의지는 거대해지고 있기에 수순의 종결은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여기 다시 이 숙명의 심판이 열리려 하고 있으니, 사무엘은 제발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 악을 선이 견제해 주기를 마음속으로 절실히 소망했다.
“도적들에게 목숨이 뺏겼다고 동정받은 슬랭은 원래 더 잔혹한 죽음이 어울릴 놈이야. 이 연약한 존재를 짓밟아서 멋대로 취해도 된다고 확신한 거지. 아래에서 뿜어 나온 사악한 기운이 단박에 머릿속을 지배했어. 이성과 영혼을 내쫓고 몸뚱이 자체만 움직이더군. 순식간에 달려가 그녀를 잡아했어. 목덜미부터 가슴까지 옷을 찢었어. 여잔 팔로 자신을 필사적으로 감싼 채 털썩 주저앉았어.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려 자신을 보호하려 한 거지. 괴물은 인간이 소중히 지켜온 긍지를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매우 들떴어.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을 후려쳐. 한 대, 두 대, 세 대, 드디어 빗장이 풀리려는 순간, 무너지는 아내를 본 미쳐버린 사내가 등장한 거야. 이자는 구세주처럼 감격스럽지도 않고, 기사처럼 전율을 일으키지도 않았어. 악에 받쳐 달려드는 우스꽝스러운 난쟁이 그 자체였어. 그의 손에 들린 낫은 휘어진 게 그 주인과 닮긴 했지만, 제구실을 톡톡히 했지. 불한당 중 하나의 뒷덜미에 움푹 박힌 낫. 아무리 날붙이를 들었다고는 해도 우린 세 명인데 어린 사내를 왜 막지 못했냐고? 한 명은 마차를 뒤지며 물욕을 채우고 있었고, 한 명은 성욕을 채우려 했고, 나머지 한 명은 어물쩍대며 비겁할 뿐이었어. 진지하게 자신의 아내를 지키려는 진짜 사내를 어찌 막을 수 있겠어. 우린 셋도 아니었고, 어른도 아니었으며, 인간도 아니었어. 피를 양껏 수확한 낫이 뽑히자, 남은 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탓인지 숨겨진 양심이 고개를 쳐든 탓인지 달아나기 시작했어. 작은 소리는 큰 소리에 묻히기 마련인데 커다란 여인의 울부짖음 가운데 사내의 절규는 정확히 귓속을 파고들었어. 역시나 악취 나는 우리 등에도 낫이 번갈아 가며 꽂힐 거란 상상에 너무나 무서웠지. 그런데 무슨 생각이었을까, 난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고 싶었네. 달아나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내는 우리를 쫓아오지 않고 있었어. 사내는 낫을 내려놓고 꺼억꺼억 흐느끼는 여인을 감싸줬어. 그는 함께 눈물을 흘리며 여자의 팔뚝을 문지르고, 머리를 쓰다듬었어. 뭐라고 말하는지 안 들렸지만 ‘혼자 둬서 미안해, 저들을 괜히 돕자고 해 미안해. 우린 괜찮아.’를 반복하지 않았을까. 아마 그에게 말을 반복하는 횟수는 중요치 않았을 거야. 태양과 석양, 깊은 밤이 아무리 시끄럽게 다투더라도 그는 그녀를 어떤 것으로부터도 보호했을 거야. 우린 정신없이 달려 어딘지도 모를 곳에 도달했어. 잃어버린 이성과 인간성을 되찾는 데 며칠이 걸렸고, 그리고 또 얼마 큼인지 모를 시간 끝에 마을에 도달한 거야.”
사무엘은 씁쓸함에 휩싸였다. 동정심 따윈 사라진 지 오래다.
‘남자는 추악한 행동을 고백했다. 자신에게 지워진 감당 못 할 거대한 바위를 내던져버리고 싶을 뿐이다. 확실히 사죄의 의도는 아니다. 미안함이란 응당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향해야 한다. 바위 무게는 가해자가 덜어 내선 안 된다. 피해자만이 덜 수 있다. 밀알 한 톨만큼의 죄를 덜어내기 위해선 백 번, 천 번, 아니 수만 번의 품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상처받은 사람에게 요청해야 한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사죄는 용인되기 어렵다. 자신에게 지워진 바위는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이다. 그러나 상처받은 이들은 타인에 떠밀려 깊은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 밑에는 뾰족한 돌기둥이 솟아있다. 추락하는 몸은 하늘을 보고 대자로 쫙 펼쳐진다. 바닥의 수직 원뿔은 등을 통해 명치로 아주 천천히 파고든다. 극심한 고통이 신체의 끝까지 극렬히 퍼진다. 화끈거리고 욱신거린다. 피가 기둥을 타고 흘러내린다. 시간 얼마나 지났을까. 몸뚱이는 뿔 윗부분의 삼분의 일 지점에 멈춰있다. 구멍은 목숨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커졌다. 감각은 마비됐다. 날카로운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 몸 안에 자리 잡은 이물질과 맞닿은 살덩이들이 밀려나는 건 똑똑히 전해진다. 돼지의 살코기를 무딘 칼로 잘라낼 때 손에 전해지는 둔탁한 저항감, 기분은 이루 다 말 못 할 만큼 더럽다. 자신의 일부가 죽어버린 살덩이가 된 것 같아서 인지, 아니면 직접 볼 수도 어루만져 지지도 않는 상처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그 감각이 너무 몸서리 쳐질 정도로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몸에 힘을 꽉 주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덩이는 부드득부드득 밑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결코 땅에 닿을 수는 없다. 뿔도 함께 자라나니까. 떨어진 인간은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간다. 끔찍함과 불편함을 간직한 채. 낮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밤은 차가운 달빛 아래서. 쉬지도 잠들지도 못하고. 이 가여운 자에게 찾아가 자신이 짊어진 바위의 무게를 덜어 달라 요구하는 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자기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짐을 지고 험난한 길을 뚫고 나아가 자신이 입힌 상처를 진심으로 돌봐야 한다. 자신이 얼마나 잔인하고 혹독한 짓을 했는지 눈으로 직접 봐야 한다. 바닥에 고인 피가 얼마나 흥건한지 발을 담가보고, 기둥에 박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만져봐야 한다. 그 이의 삶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애써야 한다. 사과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이자가 내게 내뱉은 말들은 입에 넣지 말아야 할 것을 억지로 삼켰다가 토해버린 더러운 내용물일 뿐이다. 속은 잠시 편해질지 모르나 그 토사물은 이미 몸 안의 장기를 썩게 했고, 입으로 역행하며 경로의 조직들을 상처 입혔다. 곧 썩을 것이다. 자신만은 최악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짐승들의 행위를 방관한 게 최악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저자는 적어도 자신을 탐욕에 맡기지는 않았고 바른 용기를 내지 못했을 뿐이니 계속 살아갈 자격이라도 있지 않을까? 살아가면서 비슷한 상황에 또 처하게 된다면 그땐 다르게 행동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