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왕에게는 꿈이 있다. 온 세상을 그의 영향력 아래 두어 눈에 보이는 전부를 지배하는 것이다. 태초 이전부터 품어 온 이 염원을 이루기 위해 그는 수십억 년째 부단히 활동 중이다. 십일 년에 꼭 한 번, 호기심 가득한 이가 나타나 태양왕에게 그 이유를 묻는데, 그는 늘 같은 답을 내렸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세상을 정복하려 하십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짐은 신성한 존재이니.'
'만일 위대한 과업이 다 이뤄지고 나면 그들을 어찌하려 하십니까?'
'정해져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영원한 빛을 내려줘야지.'
'만일 그 빛이 세상을 불태우기 직전이라면 그들을 위해 멈추시려 하나이까?'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짐은 그저 할 수 있는 걸 할 뿐일세.'
그는 평소 내부에서 무한히 뿜어 나오는 순수한 이들을 빛과 열로 무장시켜 전 우주로 출병시키는데, 질문자의 궁금증을 인자하게 풀어준 때만큼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스스로를 부추겨 평소보다 조금 더 무리하게 된다. 태양왕은 자신을 드높이기 위해 잠시도 멈춰서는 안 된다. 물론 인간은 감히 상상조차 못 할 긴 세월 뒤일 테지만, 그 역시 종국에는 무능한 몸뚱이로 전락함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만만하게 떠벌린 숙원을 이루지 못해 허풍선으로 길이길이 남을지 모른다는 불안함을 감추고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계속해서 용맹한 부하들에게 진격을 명령하는 것이다. 그들은 황제의 존엄을 상징하는 보라색 천을 꿴 돌격 창을 꼬나들고, 등에는 붉은 방패를 메고 있다. 그들은 대지를 샅샅이 정복하며 얼마간 흥한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강대할지라도 세상의 근간인 어둠을 몰아내진 못한다. 어둠은 우주의 바탕이요. 허무이자 공허, 무형의 흐름이다.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세상 전부를 담고 있고, 아무 활동도 하지 않으면서도 온갖 것을 압도한다.
그 불변의 물질 앞에선 아무리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태양왕도 결국 쇠하기 마련이다. 석양은 한나절 동안 온 세상을 지배했던 강렬하고 강대했던 절대군주의 세력이 그 위세를 물리는 시간이다. 약속된 시간이 되면 널리 퍼졌던 충직한 부하들은 퇴각한다. 어둠의 마왕에게 쫓기는데 급급하여 등을 더욱 움츠린 만큼 그들의 퇴로는 붉게 물든다. 뜨거운 기세는 사라졌다. 단지 후퇴의 흔적만 남는다.
이걸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은 무거워진다. 지상으로 내리쬐는 태양에 제멋대로 의미 부여를 했기 때문이다. 밝음은 어둠을 몰아내어 인간들을 지켜주고 어리석고 미숙하게 태어난 자신들이 필연적으로 저지르는 허물을 일정 부분 사함 받을 수 있다는 징표로 믿는 것이다. 그 착각 덕분에 일시적으로 지난 과오가 묽어질 수 있었으나 빛의 패색이 짙어지는 시점부터 오로지 죄책감을 홀로 짊어질 걱정에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저리 위대한 존재도 때가 되면 물러나거늘 하물며 한낱 필멸자가 어찌 버틸 수 있겠냐며 인생의 헛됨을 논하고, 시답잖은 성찰에 빠진다. 태양의 몰락으로 가련한 인간은 마침내 거울 앞에 선 벌거숭이가 된다. 망각했던 잘못이 깊은 의식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대며 기화한다. 그것은 기체 상태이기에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손에 잡힐 만큼 딱딱하지도 눈으로 확인할 만큼 선이 뚜렷 치도 않으니 이 답답함을 타인에게 어찌 공감해 달라 할 수 있으랴. 거기다 그 뒤틀림은 개인의 양심이 세운 고유의 법에서 비롯됐기에 그것에 맞춰 행동하지 못한 찜찜함은 결코 남에게 이해받지 못할 꺼림칙한 형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분명 어떤 도리의 어긋남을 낳은 것과 아직 그 대가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것,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 결과가 두 발로 뚜벅뚜벅 소리를 내며 날 찾아와 문을 쾅쾅쾅 두들기리란 것을 똑똑히 안다. 가장 두려운 것은 그 징벌의 시기가 언제일지 가늠조차 안 된다는 것이다. 행복한 시기에 나타나 불행을 개시할지, 절망의 시기에 나타나 고통을 가중할지 모를 일이다. 당장 이 붉은 기운을 피해 어딘가로 몸을 숨겨야 한다고 심장이 요동치며 알린다. 어둠이 이 세상을 집어삼키게 되면 끓어오르던 죄들이 차게 식어 다시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되길 바라면서.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석양으로부터 언제까지 완벽하게 도망칠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린 숨겨둔 죄를 직면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거짓말을 했어.”
식량을 구하러 마을을 떠났다가 갖은 고초를 겪고 생환한 남자, 쟈쟈. 그가 풀이 우거진 늪 너머 붉은빛에 홀려있던 사무엘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한동안 마을에서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의 집에서 틀어박혀 있었을 것이다. 생환의 날, 나무꾼의 아들이 간곡히 처벌을 바랐으나 근신의 명령이 내려졌다. 언젠간 내려질 처분을 줄곧 기다렸으리라. 초점 잃은 눈동자, 거칠고 까맣게 변해버린 얼굴, 가죽이 뼈와 딱 들러붙은 몰골이 그간의 생활을 미뤄 짐작하게 했다. 회색의 세상, 석양의 불길함은 더욱 빛난다.
“우리는 숲을 떠나 큰 마을로 들어갔어. 하지만 그곳은 이미 망자들이 머무는 곳이었어. 다른 마을을 찾아갔지만, 그곳도 별반 다를 바 없었지. 세 번째인가 네 번째 마을은 달랐어. 거긴 침울함도 절망도 보이지 않았거든. 우리가 그 마을에 도착한 건 한밤중이었어. 오히려 컴컴한 어둠이 아니었다면 찾기 어려웠을 거야. 숲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부터 일렁이지 않는 안정적인 불빛이 그곳에 있었거든. 우리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겠다며 얼른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거든.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거든.”
그는 자신이 겪은 특별했던 꿈을 그리듯 묘사했다.
“일반적인 마을은 아니었어. 오히려 환상의 나라라고 하는 게 맞았지. 암흑 끝에서 발견한 밝은 빛과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오롯이 희망에만 사로잡히게 했거든. 다른 감각이나 사고는 사라졌어. 술집이었을까 여관이었을까? 어쨌건 피어나는 열기와 사람들의 신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무작정 들어섰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 안에 있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어. 부끄러움이나 이상하다는 생각보단 이곳에 들어가야지만 우리가 아직 살아있음을 실감할 것 같았으니까. 잠시 침묵이 있었지만 이내 다들 자신들의 대화를 이어갔고, 우릴 의식하지 않는 듯했어.”
사무엘은 그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려고 더욱 몰두했다.
“안쪽에선 누군가 우릴 반갑게 맞이하며 자리로 안내하더군. 여기는 세상의 종말을 피해 달아난 최후의 즐거운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며. 이곳을 찾은 우리들 또한 유쾌한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즐거움을 만끽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어. 이상한 풀과 기름기가 떠 있는 죽을 내주길래 우린 기꺼이 들이켰지. 역시나 맛은 이상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그곳에서 함께할 자격을 갖추려면 역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니까. 탁자 가운데 작은 촛불 하나가 켜져 있었고, 우린 둘러앉아 몽롱함과 나른함을 느꼈어. 그간 긴장된 바깥 생활에 너무 지친 나머지 그 손톱만 한 불볕 앞에서도 포근한 따스함을 느끼게 된 거야. 그렇게 하나 둘 우린 탁자에 엎드려 휴식을 가졌어. 그때 난 꿈을 꿨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잠시 말을 멈췄다. 미간을 찌푸려가며 그때의 기억을 더듬더듬 되살리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 애쓰다 보니 표정이 엄숙해졌다. 사무엘은 어차피 사실도 아닌데 그걸 정확히 전달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도통 몰랐다. 그래도 그의 진지한 태도엔 무시하긴 어려운 힘이 서려있었다.
하늘의 의지를 그대로 전달하는 사자(使者)로 접신한 듯 그는 소리쳤다. 석양을 보며 몰락하는 맞수를 조소하듯이.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 인류가 죽을 뿐이다. 많은 사람이 죽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또 살아남는다. 원인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전부 우연의 결과일 뿐 어떤 인과관계도 성립하지 않는다. 인류가 살아가는 세상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다. 탈피하고, 갈라지고, 깊숙이 파이더라도 새롭게 뒤덮이고 채워진다. 인간이 품고 있는 용기와 지혜는 자연의 변덕과 권능 앞에서 하찮을 뿐이다.’
한 인간으로 돌아온 그는 꿈 얘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좀 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눈이 빛나고,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사무엘은 그가 미쳐버린 것이거나 인격의 교체가 이뤄졌으리라 짐작했다.
“불길한 먹구름이 뒤덮은 하늘 아래 천둥이 세상을 뒤흔들고 벼락이 지상의 존재를 낱낱이 밝히고 있었어. 난 언덕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집채만 한 바위가 위태롭게 자리 잡고 있었지. 이상하지 않나? 벼락이 대지를 찍어대는 말도 안 되는 날씨에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는 이상 하늘과 가까워지길 바라는 인간이 어딨느냔 말일세.”
사무엘에게 대꾸를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닐 것이다. 그 또한 자신이 저항할 수 없는 미지의 힘에 좌우되고 있을 따름이다.
“난 예전부터 꿈을 꾼다는 건 또 다른 세상의 나에게로 빙의되는 것이라 확신했네. 그리 따지면 다른 세상의 나란 놈은 무모한 미친놈이거나 숭고한 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할 의인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게 분명하네. 어쨌건 난 그 몸뚱이로 들어가 그가 가려던 곳으로 향했네. 그때까지 내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지. 이상하게 지치기는커녕 힘이 샘솟더군. 아마 평소에도 그 언덕을 자주 오르락내리락했던 모양일세. 어느 정도 올라섰을까, 바위가 더욱 또렷이 보일 즈음 그 거대한 것이 흔들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
“그 큰 덩어리가 내쪽으로 굴러온다면 난 발아래 뭉개지는 무른 사과처럼 으스러질게 뻔했어. 바위의 움직임은 느리지만 조금씩 날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네. 피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지. 하지만 말했듯이 다른 세상의 나와 이곳의 나는 몸을 함께 사용한 덕분에 기억도 공유했지. 내가 피하면 이 바위의 도착지는 저 아래 마을임이 떠올랐지. 그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집들이 들어서 있었어. 내 마음속에서 사랑스러운 인간들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어. 그걸 깨달은 이상 난 속력이 붙기 시작하는 바위를 외면해선 안 됐어. 이 말도 안 되는 선택이 꿈이란 걸 알면서도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했지. 바로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온 그 바위에 난 양팔을 쭉 뻗어 떠받치듯 버텼네. 언덕 아랫마을을 지키고 싶어서. 근데 희한하게 버틸 만한 거야, 아니 도리어 바위를 밀어 올려 언덕 정상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어. 난 바위를 밀어붙였네. 힘이 안 든 건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어. 인간을 사랑하고, 자손들이 번성하길 바란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고된 과업이 내게 부여되다니, 거기다 내겐 그 일을 능히 해낼 권능이 있다니, 이건 일종의 축복 같았네. 그 순간만큼은 내 몸에서 선한 기운이 마구 뿜어져 나옴을 느낄 수 있었지. 모든 것이 잘될 것만 같았어. 세상을 위해 나만이 할 수 있는 헌신과 앞으로 그들과 함께 할 새롭고 활기찬 계획들이 마구 떠올랐네. 어느새 바위는 정상으로 올라와 있었지. 하마터면 바위가 자신들을 깔고 지나갔을 거란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자신들에게 주어진 평화가 당연한 것으로 여길 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했어.”
“내가 진짜 이 바위를 밀어 올려 죄 없는 이들을 지켜냈단 말인가? 그 순간,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업적에 감탄하며 그 거대한 바위의 겉을 살짝 쓰다듬었을 뿐인데, 그 바위는 쏜살같이 반대편으로 미끄러지듯 굴러갔네. 그 반대편 언덕 아래에는 무수히 많은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어. 야무지게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했지. 바위가 지상을 깡그리 휩쓸고 지나갔으니 말이야. 마을을 이루고 있었던 전부가 산산조각 나거나 짓이겨졌어. 본래의 형체와 쓰임을 전혀 분간 못할 잔해 속에 붉은 피들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지. 아뿔싸,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등 뒤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을 지킨 대가가 가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을 모조리 쓸어버린 것이라니. 대체 왜 그랬을까, 벅차오르는 기운을 절제하고 바위에 손을 갖다 대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재앙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난 내가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웠네.”
“괴로움에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던 난 감당 못할 광경을 또 마주했지. 그 바위가 언덕 위에서부터 쭉 미끄러진 힘을 주체 못 하고 어느새 다른 언덕까지 올라가 있지 뭔가? 뿐만 아니라 꼭대기를 아슬아슬 넘어가선 차츰차츰 다음엔 뭘 할지가 훤히 보이는데, 아주 미치고 팔짝 뛰겠더라고, 난 움직거리는 바위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갔어. 그 순간, 말발굽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더니 이내 또렷이 들렸지. 돌연 언덕은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나는 꺼진 바닥으로 곤두박질쳐버렸네. 아무리 꿈이었지만 고통이 너무 생생했어. 현실로 돌아온 거지. 몸이 아직 제대로 움직여지진 않았지만 난 우릴 밖으로 내팽개치고 떠나는 마차의 뒷모습을 똑똑히 봤어. 몇 시간이 지나서야 우린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네. 몸에 지녔던 전부를 뺏겨버린 채 버려진 몸뚱이들을 발견했네. 참담하고 참혹했네, 하지만 우린 셋은 속으로 똑같이 생각을 했을 거야.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다행이라고. 며칠간 구역질이 계속됐고 우린 흙을 삼켜가며 몸속에 남아있는 부정한 것들을 게워 냈네. 이대로 모든 게 끝나버린 듯했지.”
뜻 모를 꿈 이야기가 이어지더니 끝내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고백한 그의 얼굴을 사무엘은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잦아드는 붉은빛에 확실히 홀려있었다.
'나는 이 지긋지긋하고 불길한 숲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경계만 모호해질 뿐 금세 제자리다. 다시 말을 잇기 위해 입을 옴짝달싹 해대는 그의 입이 혐오스러웠다. 그가 전달하는 문장 하나하나가 꾹꾹 눌러 담은 듯 단단했고 날 무겁게 짓눌렀다. 가슴이 체증으로 답답했다. 이자는 대체 며칠간 무슨 생각으로 숨 쉰 걸까. 반성일까, 아니면 회상일까, 아니면 꿈과 현실을 구분 짓는 기준에 대한 탐구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삶의 의미에 도달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무언갈 알아간다는 건, 아무것도 몰랐음을 인정하는 것처럼 그의 표정에는 백지의 순수성마저 감돌았다. 아니면 이젠 세상 그 어떤 것도 자신과 상관없다는 의미일지도 몰랐다. 초연한 그를 바라보다 난 이제야 어둠이 세상을 완전히 집어삼켰음을 목격했다. 모든 게 다시 차갑게 딱딱해지고, 심연으로 가라앉는 시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