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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죄의 고백

by 고전을 마시다

제사장이 사라진 걸 안건 그 집회 후 꼬박 한 달이 지난 뒤였다.

이전에도 두문불출한 경우가 더러 있었기에 아무도 그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약속의 날 사람들은 꾸역꾸역 자리를 채웠다. 사무엘은 제사장이 교단 뒤 작은 문을 통해 정면에 등장할지, 아니면 정문을 통해 뒤쪽에서 접근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래도 지난번 큰 소동이 있었던 만큼 그걸 무마하려 들 거야. 그러면 하해와 같은 은총의 손길로 그들의 등 뒤를 어루만지며 들어오는 게 맞겠지. 아니야. 잠시 흔들렸던 권위를 재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저 작은 문으로 들어와 우리를 내려다보는 게 더 합당한 행동이야.'


나름 합리적으로 사고하던 사무엘, 그러나 인간의 예측만큼 어리석은 게 또 있을까? 인간의 확신을 철저히 깨부수 걸 유희하는 변덕쟁이가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는 이상, 헛된 일일 뿐이다. 오늘 이 순간에도 숲 속 깊이 숨겨진 가비뇽의 초라한 기록관이 품은 작은 기대마저 어그러뜨리고 박장대소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교단 쪽 작은 문이 조용히 열렸다. 뜻밖에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기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 집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여인, 제사장의 부인이 나타난 것이다. 사무엘은 대체 무슨 일일까 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흰색 단발 머리카락이 삼분의 일, 회색이 삼분의 이, 검은 부분은 조금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모든 머리카락은 죽은 자의 것처럼 영양분이 쫙 빠져있다. 사시사철 갈아입지 않아 누리끼리하고, 여기저기 올 풀린 잠옷차림. 파리한 볼따구니, 이 세상이 아닌 저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 초점 없는 눈동자, 축 늘어진 어깨, 앙상하니 굵고 퍼런 핏줄만 불뚝 솟아난 팔목과 발목, 수수깡처럼 위태위태 한 쇄골, 무엇보다 지하에서 온갖 미물들로부터 수탈당한 것 마냥 석회의 원형태만 간신히 유지하는 양발이 가장 충격적으로 눈에 꽂혀다. 그나마 그녀가 유령이 아님을 확인시켜 준 유일한 신체였다. 세상에서 가장 볼썽사나운 늙은 여인을 인형으로 만든다면 저 모습이 아닐까 마음으로 그려봤다. 그녀의 느린 걸음은 마치 썩은 고목이 걷는 것처럼 어색했다.'


“제사장은 죽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전언은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쉬워하거나 슬퍼할 일은 아닙니다. 이 마을에 믿음이 아직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존재가 사라진 것에 좌절하지도 마세요. 무엇보다도 그 괴물의 사멸을 누구도 애도해선 안 됩니다. 오늘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이 선언된 날입니다. 선을 따르지 않을 거라면 적어도 악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건 잡귀의 박멸을 애석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 또한 악의 행동에 눈감고 동조한 또 다른 죄인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부디, 죄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마저 무조건 부정한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말은 주변을 잠시 조용히 만들었다가 강당 내 모든 입 틈에 파고들어 위아래로 쩍 벌렸다. 지난번 집회 때 방황했던 영혼들은 갑작스러운 폭로를 접하자마자 그 구멍들로 부리나케 복귀했다. 상황판단이 정확히 이뤄지기에는 설명이 부족했다. 많은 이들은 잊힌 고대문자를 드문드문 지문으로 인식해 갔지만 부족한 해석 능력에 답답했다. 사람들은 지식에 굶주려 갈망하는 학자처럼 그녀에게 해답을 갈구했다.


“그 괴물의 죽음은 초라했습니다. 너른 선반에서 고기를 끌어당기는 쇠꼬챙이에 찔리고 두들겨 맞아 피를 쏟았습니다. 뜨거운 것들이 몸에서 깡그리 빠져나오는 시간이 부디 짧지는 않았어야 했을 텐데, 최대한 고통스럽고 기나긴 시간이었어야 할 텐데,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혹시 그에게 너무 평온한 죽음을 선사한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만 남습니다.”


사람들은 제사장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됐다. 사무엘도 머릿속으로 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과정을 확실히 그렸다. 그럼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했던 이유와 그 집행인이 누구였는지 알고 싶었다. 다들 그녀를 열렬히 바라봤고, 그녀는 그날 일에 대해 세세히 화답했다.


“어리석은 가축 같으니라고, 무가치한 것들을 왜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거지? 지금 가진 것을 어째서 소중히 여기지 않냔 말이야.”


제사장은 그날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성질을 부렸다.


“대체 그것은 어딨어? 다락방에 가져다 놨어? 내 이번에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겠어.”


집안사람들은 숨죽인 채 그의 분노가 얼른 한 곳으로 향하길 바랐다.


“집안 단속 똑바로 하란 말이야!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고나 있어? 이 밥만 축내는 버러지들아.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재앙은 이유가 뭐가 됐건 하늘이 내리는 벌이야. 그건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지. 언제 끝날지 얼마큼 더 혹독한 상황이 펼쳐질지 오직 하늘만이 안 단 말이야. 난 내 위엄과 영향력을 발휘하여 이 집안 모두를 먹여 살리고 있어. 저 가련한 여인도 내가 거둬주고 있는 거야. 살 사람은 살아야 해. 저기 밖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동정심 같은 싸구려 감정은 큰 죄악이야. 가치 있는 인간들만 살아남을 수 있고, 난 그중에 하나야. 너희들도 나의 선택을 받은 행운아들 이라고. 다시 이따위 짓을 한다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그는 고개 숙인 이들에게 최후의 경고를 날렸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집안의 식량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이따 저녁 먹는 시간에 내게 샅샅이 말해. 상황에 따라서는 더 쥐어짜 내야겠어. 우리는 대비를 해야 해. 얼마나 최악의 광경이 펼쳐지더라도 난 반드시 살아남겠어.”


여기까지 외친 그는 다락으로 올라갔다. 다락에는 신비한 여인이 매가리 풀려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그 자는 여인을 뒤에서 힘겹게 들어 억지로 일으켜 세웠어요. 힘에 부쳐하면서도 그녀를 창문가 책상에 기대놓고 뒤에서 그녀를 범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들에게 믿음의 음성을 전달할 때 갖춰 입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짐승처럼 헐떡거렸습니다. 그리고 때에 이르러 그녀의 뒷덜미를 깨물었습니다. 그녀는 육체의 고통인지 영혼의 괴로움 때문인지 소리를 질렀고, 그 자 또한 소리를 길게 지르며 그나마 남아있던 인간성을 분출해 냈습니다.”


“전 그 모든 걸 지켜봤지만, 감정이 크게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너덜거리고 오래된 가구, 창 밖 너머로 보이는 떡갈나무들, 습하고 곰팡내 나는 공기, 안에 있는 구성원이 바뀌긴 해도 익숙하고 변함없는 풍경이었습니다. 지저분한 일상도 지속되면 평화롭게 느껴질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 순간 그 더러운 작자가 엉덩이를 바짝 추켜올리고 부르르 떨면서 말합디다.


‘그래 오늘 어차피 해줄 말도 마침 떨어졌는데 잘 됐어. 다음에는 너희 가족들이 어디 갔을지 걱정하면서 인류애를 강조하는 거야. 짐승들이 인간처럼 꾸미려면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역시 난 타고났어. 당신도 내 말에 동의하지?’


그 물음에 전 여느 때처럼 영혼 없이 답 하지 못했습니다. 제 마음속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양심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제게 소리치는 걸 들었습니다.


‘넌 언제까지 모른 체할 거야? 이 집안에서 가장 큰 죄를 시험받고 있는 인간은 바로 너 일지도 몰라.’


저는 괴로웠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문틈에 기대어 흐느꼈고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그 순간 제게 의지할만한 것이 나타났습니다. 바깥벽에 세워져 있는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가 만져졌습니다. 그것은 썩어 문드러진 저와는 다르게 곧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괴물의 추악한 짓을 묵인하는 게 전부인 제 무능과 다르게 해야 할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었습니다. 그건 원래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인데 절망의 순간 제게 쥐어진 것입니다.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환희, 찬사, 찬미, 구원, 속죄, 천벌! 저는 그 쇠꼬챙이로 과감히 그의 머리를 내려쳤습니다. 곧이어 뾰족이 구부러진 부위로 그의 척추를 과감하게 찍어버렸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 괴물을 처단하기 위해 내려진 ‘신기’였던 것입니다."


여인은 보이지 않는 신기를 꼭 쥐어 들더니 그날의 광경을 회상하며 통쾌한 몸짓을 해댔다.


"지옥으로 끌려가길 거부하는 악마가 힘겨운 신음을 내며 저를 향해 돌아봤습니다. 목이 뒤로 꺾여 제대로 가누지 못해 뒤집힌 눈으로 저를 보려 애썼습니다. 두 손을 제 어깨높이로 뻗어 제 목을 조르려 할 때, 다음 천벌이 그자에게 내려졌습니다. 저와 똑같이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의 손에 들린 그 신기는 그 괴물을 사정없이 내려쳤습니다. 결국 구역질 나는 그 짐승은 허망하게 퇴치되어 버렸지요. 우리는 감당키 어려운 짓을 저질러 진이 빠져있었는데, 다행히 노파와 딸이 소리를 듣고 올라와 그 더러운 것들을 재빠르게 치웠습니다. 처참한 광경에 놀라지도 않고, 사방에 뿌려진 피와 진득한 뇌수들에도 입 한 번 안 열며, 마치 고양이나 쥐 시체를 치우듯 어디론가 그걸 갖다 버리고 핏자국을 닦아냈어요. 거기다 우릴 위로하고 안심시키며 옷까지 갈아입혀줬습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집안 모든 사람은 서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도 이제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받아야 할 죄명은 살인이 아닙니다. 제가 행한 죄는 악의 존재를 알면서도 침묵함으로써 그 악이 더 자라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입니다. 비록 이 자리가 추악한 자에 의해 껍데기는 더럽혀졌을지언정 여러분들은 그분을 향한 믿음으로 온 것이기에 여전히 성스러운 곳입니다. 이곳에서 저는 저의 죄를 고하며, 달게 처벌을 기다리겠습니다.”


심판의 진술이 쉴 새 없이 끝났다. 사람들은 여전히 입을 다물었고, 더러 기도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 나무꾼 빈센은 재빠르게 집회장을 나갔다. 행정관과 원로원들에게 이 사실을 고하러 간 것이다.


사무엘은 찬찬히 이 사태에 대해 정리하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마을 법으로 정해진 한 달에 한 번 집회 참여에 행정관과 원로원은 해당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무엘은 그동안 왜 그걸 한 번도 의식 못했는지 신기했다. 잠시 후 호들갑 떨며 집회장으로 들어오는 두 명의 행정관과 세 명의 원로원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멧돼지 같은 흄의 목덜미에는 턱받이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늙은 행정관이 다짜고짜 소리쳤다.


“그보다 얼른 시체를 찾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한 달이나 됐다고요? 이거 큰일입니다. 빈센, 어서 당장 시체를 찾아내 처리하게. 그것보다 더 시급한 일 따위는 없어. 모든 것은 그 이후 문제라고. 자 여기 있는 모든 분은 이제 자신이 속한 곳으로 돌아가 우리가 전달할 내용을 기다리시오. 조만간 또 식량을 배급할 것이니 고마움을 잊지 마시고.”


흄은 과감하고 자신 있게 사태를 지휘했다. 빈센은 교단에 널브러진 유령노파에게 향했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뭐 물론 우리가 엄정하고 지극히 합당한 검증과 절차를 거쳤겠지만, 이 제사장이 대체 언제부터 우리 마을에 들어온 건지 기억하시는 분 계십니까?”


이고르는 질문은 모두에게 하면서도 눈으로는 게라드를 쳐다봤다.


“제 아들이 태어나는 해에 그와 그녀가 모습을 비췄으니, 올해로 딱 28년이 되는군요.”


“이 십팔 년 전이라·····”


나지막이 되뇌는 행정관 헨데, 그는 뜻 모를 인상을 지었다.


“우리 마을은 규율에 따라 한 달에 한 번 종교집회가 열려야 하는데 제사장이 죽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우리에게는 아직 29일이라는 날짜의 여유가 있어요. 그러니 얽힌 실타래처럼 복잡한 문제는 잠시 젖혀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야 좋은 생각이 나는 법이지요.”


낙천주의자 흄은 역시나 이 사달을 가벼이 흘려보냈다. 사무엘은 속에서 신물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단 한 명의 주장에 지나지 않긴 하나 스스로 살인자임을 고백하는 자에게 거짓이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살인이 일어나기까지의 배경은 말 그대로 추악했다. 영혼을 구원한다고 믿어 온 인간의 더러운 위선, 거기에 짓눌려 억압된 영혼, 더럽혀진 믿음, 허망하게 흘려보낸 시간, 이를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 역겨운 자들. 태양이 하늘 정가운데 떠있는 밝은 날처럼 모든 것을 명명백백히 밝혀내는 것이 옳은 게 아니냔 말이다. 하긴 저 회색 가림막에 가려져 푸른 하늘과 눈부신 태양을 본지가 대체 언제란 말인가. 설마 그래서일까? 이 마을 전체가 뿌옇게 보인다. 인간에 대한 옳고 그름을 함께 나눌 사람이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다. 갑자기 고독함이 밀려온다.'


“시체는 일하는 하인과 딸이 치웠기에 자신은 모른다 합니다. 아들과 함께 알아보고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을 돼지들의 충실한 개, 빈센, 참으로 군더더기 없는 말과 행동으로 돼지들을 만족시킨다. 아니 저 돼지들은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냥 하나의 귀찮은 일을 당연히 해야 할 수족이 당연한 짓을 할 뿐이라는 듯 굴었다. 그나마 인간적인 면모 하나쯤은 보여줄 참인가, 영혼이 빠져나간 텅 빈 그릇을 수습하고 안식을 취할 자리를 마련해 줌으로써 괴물로 살았을지언정 그 작자도 인간이었음을,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우리도 인간임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일까. 괴로움이 날 지배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다. 최소한의 인간을 느낄 수 있어서.'


남은 자들마저 휑하니 돌아가버렸다. 문을 나가는 와중에 제사장 집에 묵었던 여인에 관한 얘기가 잠시 오고 가며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커다란 집회장에 사무엘과 유령만이 남았다. 사무엘은 마주한 여자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살인에 대한 처벌은 논의되지도 않는 것에 분통이 터졌다. 정의를 부르짖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의 죽음을 이리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생각했다.


'이미 빈센에게 그 괴물이 심판받은 이유를 들었던 탓일까? 만일 그게 지어낸 얘기라면? 어설펐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그가 신실한 인도자가 맞았다면? 그 힘겨운 집회를 끝내고 어두운 공간에서 창문을 통해 내리꽂는 한 줄기 빛을 희망 삼아 우리의 영혼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더라면, 아니면 다음 집회에 전달하려 인간이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냈던 미담을 찾느라 몰두한 나머지 쇠꼬챙이가 뒤통수에 꽂히는 것도 몰랐던 것이라면? 진창에 빠진 우리의 영혼을 구해줄 한 토막의 문장을 발견하여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진리의 깨달음을 외치던 찰나였더라면? 그렇다면 우린 정말이지 구원받을 유일한 길을 잃은 것이다. 이건 나의 억지임을 잘 안다. 하나, 더 이상 하늘의 가호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위선자들은 마을의 세 번째와 다섯 번째 법에 따라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을 외면했다. 만일 죄인들이 그 규율에서 벗어날 특별한 존재가 된다면 그것을 우매한 우리에게 이해시켰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것으로 이 마을을 지탱한 원칙과 질서는 물에 잠겨버리고 수호해야 한다는 정당성은 사라진 것이다. 또한, 그 괴물이 그간 우리를 농락해 대며 갉아먹게 된 정황을 제대로 밝혀내지 않은 것. 마지막으로 당장 지옥문턱에 다다른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또 다른 방법을 찾고 있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으로 우린 스스로를 끝장 내버린 셈이다. 세상이 회색이 되어버렸기에 이 마을의 인간들도 회색이 되어버린 것일까? 아님 원래 회색이었던 인간들이 회색의 세상에 맞춰 본모습이 드러나 버린 것일까?'


괴로워하는 사무엘 곁으로 유령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리고 마치지 못한 고해를 이어나갔다.


“30년 전 어느 술집에서 그 자를 처음 만났습니다. 입담이 아주 좋았지요. 자신은 북쪽 어딘가 항구마을 귀족의 서자라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가문의 분위기상 서자도 일정 부분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고 적자들과 비슷한 교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훤칠한 외모에 넘치는 자신감,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들, 전 믿지 않을 수 없었지요. 동쪽나라에 가서 예절교육을 받고 온 어린 시절,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은 남쪽의 부드러운 빵과 달달한 올리브유, 석양이 아름답게 지는 언덕에서 열리는 귀족들의 밤샘 사교, 정말이지 꿈같은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저는 그가 하는 어떤 말도 머릿속으로 그릴 수가 있었어요. 그가 워낙 자세히 말하기도 했지만 제가 상상력 하나는 풍부하거든요. 어느새 그 상상 속 장면에 저를 끼워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술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며, 술주정뱅이들에게 희롱이나 당하는 현실이 소름 끼치게 싫어졌습니다. 그에게 여기서 제발 저를 데리고 나가달라고 애원했어요. 처음에는 안 된다고 말하더군요. 자신에게는 집안끼리 정해둔 약혼녀가 있다고요. 저는 하녀의 신분으로라도 좋으니 평생 그 자를 따라다니게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어요. 어느 비 오는 날 밤, 엄마라고 불렀지만 정 따위는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여자의 돈을 훔쳐 우린 달아나기로 했습니다. 술집에서 멀지 않은 큰 나무에 기대어 무엇이든 잔뜩 짊어지고 나올 그를 기대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행복한 날들에 설레기만 했어요. 천둥 속에서도 또렷했던 절규의 비명과 번개에 비친 남자 옷의 얼룩은 내게 아무런 의미를 전하지 못했지요. 그 길로 우린 끝없는 어둠에 들어서게 된 겁니다.


그는 말로 먹고살았지만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 끈적한 독인데 꿀처럼 보이는 말, 남들을 속이며 스스로마저 속는 말, 우린 그걸로 먹고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던 거지요. 어느 마을의 부자를 등쳐먹었는데, 그자가 불량배들의 우두머리였던 겁니다.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어떤 사주를 받았는지, 얼마만큼의 돈을 약속받았는지 몰라도 그들은 세상 끝까지 쫓아올 것만 같았어요. 어느새 들어간 자는 절대 살아 나오지 못한다는 숲에 다다른 겁니다. 그들은 멈추지 않았고, 우리는 전설을 잊은 채 마구잡이로 달렸습니다. 한동안 우릴 쫓아오는 소리가 멈추지 않아 얼마나 더 달렸는지 몰라요. 그리고 기적같이 이 마을에 당도하게 됐어요. 그 자는 외쳤습니다. ‘신의 축복이 우릴 이곳으로 인도했다’라고요. 그리고 그때 마침 지나가던 돼지 같은 작자가 신의 뜻을 아냐고 물었고, 거짓이 가장 쉬운 남자는 세상에 없는 거짓을 토해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이 마을의 제사장이 됐습니다.”


사무엘은 묻지도 않은 진실을 왜 자신에게 말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이내 이런 생각에 도달했다. 결국 ‘우린 신에게로 인도받은 적이 없었다.’라고, 그리고 허탈해하며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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