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숲으로 사냥을 떠났던 일행 중 한 명이 황급히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나이 든 행정관 집으로 찾아가 자신이 겪은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때마침 그의 집에 있던 다른 행정관과 제사장, 나무꾼은 남자를 앞장 세워 길을 나섰다. 바람처럼 몸이 가벼운 사무엘도 함께 따라갔다. 가는 도중 들은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 마을로부터 꽤 떨어진 장소에서 세 명의 외지인을 발견한 것이다. 서둘러 도착해 보니 여러 마을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고, 포위당한 이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작은 수레에 웅크려 누워 와들와들 떨고 있는 남자, 의기소침하게 움츠려 등이 굽은 노파, 머리에 두건을 쓴 여자가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내는 모두 그 묘한 여인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사무엘도 마찬가지였다.
'뺨은 쏙 들어갔고, 살짝 솟은 광대에 조금은 사가진 턱, 작은 얼굴, 자두 같은 코와 사자같이 우뚝 선 이마로 이어진 콧대, 갈라진 두 턱, 그 위에 관능적으로 반짝이는 입술, 헤퍼 보이게 벌어진 윗니, 파랗고 커다란 눈, 이성적인 남자마저 능히 무너뜨리고 마는 이 여자의 마력에 고혹적이라거나 매혹적이다와 같은 진부한 수사(修辭)는 어울리지 않았다. 여자에게 연정을 품어본 적 없는 나조차도 이 여인의 눈빛에 홀려 그녀를 소유하고 싶고, 마음대로 욕보이고 싶은 욕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괴롭히고 슬프게 하여 눈물을 흘리게 한 다음 보듬어주고 싶은 여인이 숲에 있었다.'
마을 일에 좀처럼 나선 적 없는 제사장이 웬일로 먼저 말을 꺼냈다.
“어디서 온 분들인지는 모르나 이 분들 역시 그분께서 보내주신 인연입니다. 어서 마을로 안내해 드립시다.”
“제사장님, 여기 수레 위 남자는 몸 어딘가가 아파 보입니다. 함부로 마을에 들여도 괜찮을까요? 저주를 받았거나 죄를 지은 자라면 어쩌지요? 우리 마을같이 악을 모르는 곳이 더럽혀지건 한 순간일 겁니다.”
“아닙니다. 그분들의 눈에 악의가 전혀 보이지 않아요. 몸이 아프다는 건 곧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좋은 일이 우리 마을에서 일어나면 우린 덕을 쌓게 되는 것이고, 그리 되면 마을에 곧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주변 남자들이 머뭇거렸기에 빈센이 토를 달아봤지만, 제사장의 단호한 태도와 행정관들의 침묵에 그들은 따르기로 했다.
“Nous ne pouvons pas vous suivre.”
파란 눈의 여자가 다급히 소리쳤다.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제사장은 다 이해한다는 온화한 표정으로 그녀를 어르고 달랬다. 손이 그녀의 팔을 감쌌다가 등을 어루만졌다가 바삐 움직였다.
“Laisse-nous tranquille. Pas pour nous, mais pour vous.”
여자는 절박하게 호소했고, 제사장은 어느새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의 눈빛은 어떤 목적에 사로잡혀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었다.
“자, 얼른 남자가 실린 수레에 노파를 함께 태우고 가세요. 거동이 불편한 둘을 모시느라 힘들었을 이 분은 제가 직접 데려가 특별기도를 드리려 합니다.”
“Une terrible maladie se propage actuellement dehors. Mon mari avait aussi la maladie. Laissez-nous tranquilles. Si vous souhaitez donner une bénédiction, partagez de l’eau et de la nourriture.”
여자는 이번엔 손바닥마저 비비며 간절히 뭔가를 설명하는 것만 같았다. 미지근한 습기가 가득 찼을 것만 같은 제사장의 손을 뿌리쳐가며 파란 눈으로 사람들을 번갈아봤다. 갑작스레 늙은 행정관이 얼른 이들을 데리고 돌아가자 말했다. 그러자 다들 망설임 없이 행동했고, 여자는 포기한 듯 제사장의 손에 이끌려 터덜터덜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행정관은 빈센에게 어떤 말들을 넌지시 건넸고, 그는 영혼 빠진 눈동자로 호응했다. 마을 남자 몇 명이 패를 갈라 쓰러져있는 남자, 노파를 따로따로 데려갔다. 여자는 제사장이 집으로 데려갔다. 여자는 더 이상 저항도 말을 하지 않았다. 두 명을 계속 이끌어 가기엔 그녀의 몸이 너무 지쳐버렸다. 모든 것을 외부의 힘에 맡겼다. 세상의 의지대로 하루가 흘러갔다.
다음날, 오랜만에 활력 있는 웅성거림이 들렸다. 몇 달 전 마을을 떠나 식량을 구하러 떠났던 사내 둘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을 맞이하던 반가운 소란은 곧 불행을 부인하려는 몸부림으로 바뀌었다. 귀환자들에게 등짐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양손에는 무언가 들려져 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희망이라는 가벼운 것을 갖고 돌아왔다기엔 그들의 발걸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마을 사람들은 부풀어가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남자들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남자들은 유령처럼 다가오는 무리를 외면하며 북쪽 언덕으로 나아갔다. 현관으로 나온 늙은 행정관 비시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한 동안 뽐내지 못했던 위세를 이 기회에 부렸다.
“그대들은 한 달 전, 사람들이 모은 귀중품을 들고나가 식량과 맞바꿔 올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지금 그대들은 불운을 온몸으로 겪고 온 마냥 무겁게 쳐져 있고, 눈은 불길함과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이 마을로 가지고 돌아온 것이라곤 그것들밖에 안 보이는데 내 눈이 틀린 것인가? 그리고 셋이 떠나 왜 둘만 돌아온 것이냐?”
두 명의 사내 중 빈센의 아들이 잠시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우리는 동쪽 큰 마을로 가기 위해 사흘 밤낮을 걸었습니다. 도착해 보니 그곳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습니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불길한 검은 연기와 역한 탄내들이 우릴 괴롭혔습니다. 무엇보다 여기저기 파헤쳐진 땅 속에는 미쳐 흙을 덮지도 못한 시신들이 들어있었습니다. 마을 어귀로 들어섰는데도 통곡은커녕 수군거림도 들리지 않아 냉큼 돌아섰습니다. 괜히 저런 저주받은 곳에 들어갔다가 어떤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린 다른 마을로 가고자 강을 따라 더 내려갔습니다. 예전 같으면 가는 길에 수레 짐꾼이나 여행자를 만났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이번 여정에선 그림자조차 안 보였습니다. 스산한 바깥 날씨 탓인지 싶기도 했고, 어쨌건 우린 막중한 책임이 있었기에 다음 마을을 찾는데 열중했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두 번째 마을은 비교적 작았습니다. 하지만 거기도 이상하리만치 조용했습니다. 마을로 들어섰지만 그 누구도 우릴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굳게 닫힌 문들, 창문 틈사이로 우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결국 아무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여관 문을 아무리 두들겨도 그 어떤 대꾸나 인기척도 안 들렸습니다. 당연히 시장이나 물물교환을 할 장소가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렇게 우린 두 번째 마을에서도 떠나야 했지요.
아무 마구간에서라도 하룻밤 보내자 했던 슬랭에게 ‘너는 당장이라도 우리 몸을 찌를 듯한 저 날카로운 시선들이 느껴지지 않냐’고 다그치곤 부랴부랴 다른 마을로 가는 숲 속 오솔길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날따라 달도 뜨지 않아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한창을 걷는데 어느새 정체 모를 여러 발자국 소리가 우리를 에워쌌고, 갑자기 제 얼굴에는 뜨겁고 끈적한 것들이 흩뿌려졌습니다. 곧바로 사람만 한 것이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습니다. 뒤이어 여러 남자의 거친 말소리가 들렸기에 저는 소리쳤습니다. ‘뛰어!’, ‘살고 싶다면 뛰어!’ 저는 누굴 챙기지도 못하고 그 어두운 곳을 빠져나오기 위해 마구 달렸습니다. 제 뒤통수 바로 뒤로 가쁜 숨소리가 들려오는데 그게 누군지 확인한 겨를 조차 없었지요.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겠지만 숨이 턱에 닿아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졸졸졸 흐르는 물가가 눈앞에 보여 멈췄을 때, 구름 걷힌 달빛 덕분에 제 뒤를 뒤쫓던 자가 저 놈이란 걸 알고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설령 늑대가 제 목덜미에 대고 으르렁거린다 하더라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공포에 떨었으면 온 머리카락들이 빠져 버린 건 아닐까 걱정했겠습니까. 저와 쟈쟈는 힘겨운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다음날 저희는 숲길을 피해 멀리 돌아 다른 마을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반나절쯤 걸었을 때, 사람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는 폐허를 발견하여 거기서 잠시 쉬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삶과 죽음밖에 안 떠올랐는데, 역시 몸이 편해지니 여러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바로 그 숲에서 함께 나오지 못한 슬랭이 생각났습니다. 옷 여기저기에 얼룩진 피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숲 속에서 제 얼굴에 뿌려진 진하고 비릿한 게 그의 피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안쓰럽다는 감정보다 우리의 임무를 위해 그가 몸에 지녔던 귀중품의 비중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다행히 우린 공정하게 무게를 나눠 짊어지고 있었고, 가치가 더 나가는 건 제가 지니고 있었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이 개만도 못한 놈아, 널 믿고 따라나선 슬랭이 가엾다는 생각은 안 들고 잃어버린 물건의 가치만 따졌다고? 이 악마 같은 자식아!”
소리치며 달려드는 이는 슬랭의 아버지이다. 나무꾼 빈센은 어느새 그를 막아서더니 멱살을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슬랭은 자원해서 나간 거야.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어! 마을 사람들을 살릴 양식을 구하러 간 거라고. 그 탓을 누구에게 돌리는 거야? 네가 악마라고 욕하고 칼로 찌를 것들은 그 숲에 있어. 당장 쫓아가서 아들의 복수라도 해보지 그래? 이 겁쟁이 녀석아.”
아들을 잃은 아비의 비통한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빈센 역시 아버지였다.
나무꾼의 아들은 잠시 주눅 들었지만, 마치 어딜 가나 저런 훼방꾼은 있기 마련이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재주 많은 이야기꾼처럼 말을 다시 시작했다.
“며칠 방황 했지만 결국 우리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으로 들어섰고, 마차 한 대를 만났습니다. 마부는 왜소한 체구에 굽신거림이 몸에 베여있는 남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어디까지 가냐며 괜찮으면 태워준다 했습니다. 우린 마을을 나선 이후 줄곧 사람의 추악함밖에 보지 못했기에 잠시 망설였지만 천막이 씌워진 마차 안에 여자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신세를 지기로 했습니다. 여차하면 우리 둘이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계산도 섰습니다. 마차를 타고 가는데 제 뱃속인지 쟈쟈 저놈 뱃속에서인지 천둥이 치는 겁니다. 부끄러워 제발 멈춰달라고 배를 움켜쥐어도 소용없었습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상냥하면서도 사려 깊은 말투로 식사를 위해 마차를 세우라 말했습니다. 남자도 마침 때가 됐으니 그러마라고 답했지요. 적당한 곳에 마차를 세운 뒤 남자는 주변 잔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여자는 단지에 담긴 무언가를 끓였습니다. 하찮아 보이던 것이 차츰 걸쭉해지고 좋은 향마저 났습니다.
남자는 말에게도 먹일 꼴을 베어온다고 잠시 사라졌습니다. 부인이 뽀글뽀글 끓어대는 죽을 작은 그릇에 퍼 담아 건네는데, 우린 파렴치한이 되기 싫었습니다. 남편이 돌아오면 다 같이 먹자고 한사코 거절했지요. 근데 부인은 남편은 곧 돌아 올 테고 자신은 남편이 오면 함께 먹겠다고 했습니다. 착한 이 부부야말로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천사들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천사들의 축복을 거절하여 재앙으로 돌아오진 않을까 우린 허겁지겁 그 죽을 먹었습니다. 한 그릇, 두 그릇을 비우는데 여자는 남자가 왜 안 오는지 잠시 살펴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습니다. 양심껏 세 그릇까지만 먹으려 하는 순간, 갑자기 구토가 나오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목구멍이 한껏 부풀어올라 답답하고 눈앞이 노랗게 변하다 몽롱해지는데 전 끝까지 정신을 차리려 애썼습니다. 몸이 제멋대로 뒤틀려서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눈알을 부릅뜨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똑똑히 지켜보려 했습니다. 근데 한참 뒤 깨어보니 그건 모두 꿈속 저의 상상일 뿐이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역겨운 숨이 내 쉬어졌습니다. 몸이 여전히 뻣뻣했기에 전 흙 한 줌을 입에 털어 넣고 속 안에 모든 걸 게워냈습니다. 그리고 저 녀석 뺨을 때려 마찬가지로 뱃속을 비우게 했지요. 정신 차린 끝에 깨달은 것은 귀중품이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그들도 일말의 동정심은 있었는지 옷은 그대로 뒀습니다. 알거지가 된 우리는 악에 받친 분노보다 우릴 믿고 전부를 내어준 사람들에게 안겨줄 실망감이 더 크게 와닿았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한 줌의 식량을 마을로 가져오려고 꽤 큰 마을에 당도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동냥 질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여의치 않았고요. 그래 그냥 여기서 죽자. 우린 죽어 마땅한 인간이다. 그렇게 마음먹는데, 저 녀석이 우리가 여기서 죽으면 우릴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물었습니다. 우리가 마을의 귀중품들을 가져다가 내뺀 거라 의심받아 남은 가족들이 온갖 수모와 멸시를 당한다면 우린 또 다른 죄를 짓게 되는 것이라며 저를 설득했습니다. 저는 그 말도 옳다고 생각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시 이 마을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현명하신 행정관님, 저희는 마을의 귀중품들을 들고나가 무일푼으로 돌아온 자들입니다. 부디 저희를 처벌해 주시옵소서. 다만 저희는 절대 도망간 것이 아니므로 최소한 가족들만은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죄는 우리에게만 있으니, 남은 가족들에게는 생때같은 자식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것에 대한 동정심을 베풀어주시길. 여러분, 저희는 죄인입니다. 바깥사람들을 믿고 세상이 아직은 선량하다고 믿어 여러분들이 모아준 재물을 잃어 아무것도 갖고 돌아오지 못한 우리는 죄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실망감을 안겨드려 송구합니다. 저희를 벌하시고 남은 가족들에게는 친절을 베풀어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한 바탕의 고백이 끝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너희들은 마을의 마지막 희망을 무참히 깨뜨렸다.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안겨주고, 우릴 끝 모를 절망으로 떨어뜨렸다. 나는 이 마을의 문제를 판단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너희에게 반드시 합당한 벌을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상을 믿고, 사람에 의지한 게 어찌 너희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또한 너희를 처벌하면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해 온 빈센은, 돼지를 키워 우리를 먹인 쟈쟈 아비의 슬픔은 어찌한단 말이냐. 나는 괴롭고 혼란스럽다. 그래서 당장 너희들에 대한 처분은 내릴 수 없다.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너희는 숨어 지내라. 때가 되면 다시 불러 처분하겠다. 모두 물러가라.”
행정관은 단호히 말하곤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허탈함에 둘 곳 잃은 시선들로 여기저기 흩어졌다.
먼 옛날, 인간 세상이 날로 풍성하고 융성해지자 신은 불안했다. 인간들이 자신을 소홀히 여기고 덜 사랑할까 봐 두려웠다. 그 자는 인간의 번영을 축복하는 선물이라며 하나의 항아리를 지상으로 내렸고, 인간들은 그걸 소중히 받아들였다. 항아리는 엉성한 뚜껑으로 덮여있었다. 그리고 신은 이 항아리는 알과 같은 존재이기에 알맞은 때가 되면 겉은 알아서 깨지고, 그 안에 담긴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너희 인간들을 더욱 이롭게 할 것이라 덧붙였다. 그 음성을 직접 들은 필멸자들은 그걸 잘 지켰고, 그 자식들 또한 그걸 명심했다. 시간이 꽤 흘렀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조금씩 변했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도 변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일상에서 신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은 항아리도 이젠 신의 기물(奇物)이 아닌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뚜껑은 드디어 열렸다. 끈으로 봉해있지도 않았으며, 지키지 못한 것에 따른 엄중한 경고도 없었다. 뚜껑은 가볍고 아귀마저 잘 맞지 않아 너무나도 손쉽게 들렸다. 마치 원래 그러길 바랐던 것처럼. 그 순간 인간이 미처 몰랐던 온갖 재앙과 병균, 증오와 시기심, 과욕이 넘쳐 나왔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서로를 죽이고 미워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울어서 먹어야 했고, 커서는 싸워서 뺏아야 했다. 죄지은 인간을 위한 지옥이 땅 밑에 따로 마련되었지만, 지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이 항아리에 넣은 내용물은 지옥의 것을 본떠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다시 입으로 신을 찾게 됐다. 자신들이 신의 말을 가벼이 여겨 이리된 것이라 자책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신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은 흡족했다. 하지만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하나의 꾀를 더 냈다. 바람의 신을 시켜 누가 말했는지도 모르게 소문을 퍼뜨렸다. '그 항아리 맨 밑에는 미처 나오지 못한 희망이 남아있다고, 그러니 얼른 그것을 찾아내 이 어둠을 몰아내야 한다고, 그것이 매우 진귀한 것이라고.' 그러고는 몰래 항아리를 깨뜨려 버렸다. 인간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희망, 아니 항아리를 찾아 끝없는 다툼을 시작했다. 신에게 받은 최후의 축복을 놓치지 않으려 더욱 집착했다. 보지도 못한 희망을 찾으려 소중한 것들을 처분했고, 죽어 있는 것을 위해 산 것들을 희생시켰다. 그 모습을 본 신은 기뻤다. 앞으로 자신이 잊혀일 일은 없으리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