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은 늦은 밤까지 짧은 양초하나에 의지하여 낮에 겪은 일을 소상히 기록했다. 일을 마친 뒤에도 한참을 의자에 기대 멍하니 앉아있었다. 입으로 바람을 후 불어 일렁이는 불꽃을 껐다.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어둠에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눈을 떠보니 창밖은 진한 남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창 안쪽은 옅은 먹색으로 뒤덮여 구별됐다. 혹여 바깥에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을까 유심히 쳐다봤지만 하나의 통 면으로 이뤄진 배경은 그대로였다. 한창을 지켜보니 별안간 아른아른 움직이는 아지랑이 같은 게 보인 듯했다. 그게 분명 오른쪽으로 스멀스멀 움직였는데도 다시 보면 제자리였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 같아 기다렸는데도 사무엘과의 거리는 그대로였다. 자신을 홀리는 이 정체 모를 것이 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그는 눈이 뻑뻑해 잠깐 눈을 감기로 했다. 아뿔싸, 그가 옳았다. 그 요사스러운 기운은 어느새 그를 덮쳤다. 그건 그를 감싸 올리더니 어디론가 데려갔다. 세계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조용히 터졌다.
눈을 뜬 사무엘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성안에 서 있었다. 사방이 불타올랐다. 절규하는 비명이 다양한 화음을 이뤘다. 생명을 쥐어짠 목소리가 세상 그 어떤 악기의 음색보다 화려했다. 불꽃은 신들린 기교와 세상을 병들게 하는 마력으로 멸망을 지휘한다. 마왕이 작곡한 이 곡은 군데군데 말발굽 소리와, 사람들이 짓이겨지는 효과음을 적절히 보탰다. 사람의 발걸음으로는 절대 도망치지 못할 재앙의 현실감과 급박함에 온몸은 전율했다. 사무엘은 분명 이쪽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쯤 되니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닌 적극적인 참여자가 돼야 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심각히 받아들인 사무엘은 이 위급함에서 일단 벗어나려 몸을 웅크렸다. 정확히 어딘지 모르겠지만 들려오는 비명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건 분명했다. 의지는 뚜렷했으나 몸은 연신 공중에서 헛돌았다. 천정으로부터 이어진 실에 묶인 꼭두각시 인형이 각본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거역할 수 없는 숙명, 바닥에 깔린 돌과 마찰을 일으키며 다그닥 다그닥 하는 굉음이 사무엘의 아랫배로 흘러들어와 온몸을 마비시켰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제발 움직여야 한다며 다리에게 애원했다. 집 반쪽만 한 거대한 물체가 지척으로 다가왔음을 드리워진 그림자로 알았다. 그는 너무나도 무서워 말 위에 올라탄 자를 쳐다보고 싶지 않았지만 목에 걸린 실이 위로 당겨져 그 자의 얼굴을 바라보게 했다. 붉은 얼굴,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이 아래로 쳐진 입꼬리, 양쪽 모서리가 넓은 이마, 가운데만 섬처럼 남은 짧고 붉은 곱슬 머리카락, 빽빽하고 거친 콧수염과 턱수염, 잔뜩 찡그린 미간, 말을 빗어주는 솔보다 뻣뻣하고 길게 뻗은 눈썹, 검푸른 불이 켜진 눈, 살아 있는 것에 죽어있는 것을 쉬이 꽂을 사람으로 보인다. 분명 처음 봤지만 마을의 온갖 거친 일을 도맡아 하는 나무꾼 비시가 떠올랐다. 그는 눈에 불을 켠 지옥의 처형인으로서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찾아다녔다. 사무엘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빨리 뛰었다. 공포의 병사는 붉게 달궈진 칼의 손잡이에 천을 덧대어 쥐었다. 손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연기가 보일 정도로 사무엘은 가까이 있었지만 그는 말을 돌려 마을 안쪽 돌벽에 난 쪽문으로 들어갔다. 사무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리 노련한 이가 이미 수색을 마친 곳에 다른 이가 번거롭게 또 돌아오진 않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타인의 지독한 비명이 자신의 안전을 확인시켜 주는 신호처럼 다가왔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이 조여질대로 조여졌다 한계 없이 풀렸다. 몸 안에서 맴돌던 묵은 숨이 드디어 출구를 찾아 탈출했다. 이 지옥에서 살아남았다고 안도했다.
순간, 달궈진 칼이 등으로부터 파고들어 사무엘의 명치를 뚫고 나왔다. 심장 박동은 즉시 정지했다. 고통스러운 영혼은 쉰 소리를 내며 입 밖으로 빠져나가고 어깻죽지가 뒤쪽으로 확 젖혀졌다. 찔린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타들어가는 통증은 지독했다. 사무엘은 천천히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남자도 친절히 같은 방향으로 얼굴을 맞대어 줬다. 회색의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외쳤다.
“신의 결정을 피할 수 없다.”
그의 육성은 크다 못해 칼처럼 내 왼쪽 귀를 후벼 들어 오른쪽으로 뚫고 나갔다. 인간의 가죽 벗겨진 속살이 그대로 나온 듯 붉은 하안검이 겹겹이 주름 잡혀 있고 안에 녹색눈알이 박혀있었다. 사무엘은 뜬 눈으로 숨이 멎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슴팍에 손을 갖다 댔다. 다행히 상처는 환상이었다. 누군가 양동이채로 나를 향해 물을 끼얹은 것처럼 사방이 축축하게 젖어있다. 얼핏 눈에 들어온 검은 얼룩에 흠칫 놀랐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그림자에 물든 땀이었다. 혹시나 하여 몸 여기저기를 더듬더듬 만졌지만 구멍은커녕 생채기도 없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푸른 달빛이 놀란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은은한 광선을 즐기던 난, 문득 집구석 어두운 한 편에 뭔가가 자리 잡고 있음을 눈치챘다. 분명 실재하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내 가슴에 방망이질을 해댔다.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검은 형체는 벌떡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가까워진 낯익은 얼굴에 잠시나마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그런데 이 남자가 어째서 날? 심장 박동마저 둔해질 냉기가 날 엄습했다. 이 마을의 유일한 광대, 그 남자가 나만의 어둠에서 날 응시하며 기다렸다. 이유가 뭘까. 나와 이 남자는 그간 어떤 대화를 나누지도 교감을 형성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날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 그만 알고 있는 목적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나의 세계로 복귀했음에도 몸은 마비된 것 처럼 둔했다. 제발 그가 집을 착각한 것이기를 바랐다. 단 한번 들어본 적 없던 그의 목소리가 내가 틀렸음을 알려줬다.
“꿈은 다른 세계에 있는 나 자신과 영혼이 뒤바뀌는 시간이란 얘기가 있지. 그곳에서 험한 일을 당하면 이쪽 세계의 자신에게도 곧 불행이 닥칠 거라더군. 자넨 그곳에서 어떤 일을 당한 겐가.”
씨알 굵은 성대가 동굴에서 울리는 메아리 소리를 냈다. 장년의 목소리가 내 온몸을 짓눌렀다. 다른 이의 관심만으로 먹고사는 광대의 태도는 절대 아녔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위엄이 내 고개와 양 어깨를 자연스레 낮추려 한다. 그는 달빛의 은총이 미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허연 분칠을 한 그 얼굴은 여전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그가 어떤 심경을 겪었는지는 짐작할 만했다. 눈에서부터 볼을 관통하는 자국의 흔적이 또렷했다. 분노였을까, 슬픔이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고독함이었을까, 연민이었을까. 눈물은 회백색 가면 뒤 본모습을 보여줬다. 마음이 진정됐다. 적어도 날 이유 없이 헤칠 것 같지 않아서이다.
“당신은 어째서 내 집에 있는 겁니까.”
“내 이름은 르 바르토 일세, 마을에서 광대로 불리는 동안 나는 내 피에 새겨진 이름을 잊을 수 있었어. 이 삶이 끝나기만 하면 그 무시무시한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이 지독한 놈을 나무상자에 담아 굵은 사슬로 칭칭 감고 끝 모를 심연으로 가라앉혔는데, 이제 조금만 더 그대로 두면 숨이 끊어지리라 믿었는데, 이 끈질긴 저주는 자신을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가져가더군. 어제의 반나절이 수십 년을 수포로 만든 거야. 돌아와서는 안 될 것이 돌아왔어. 이제 어쩌겠나. 이 처절한 운명에 따라야지. 자넨, 좋건 싫건 간에 나와 깊숙이 연관된 사람이야. 우린 지금까지는 이 생애서 아무런 연이 없었지만 이 전 생에서는 꽤 긴밀한 관계였지. 그 인연이 지금부터 다시 시작되는 거야.”
아직 잠에서 덜 깬 탓이 아니다. 가늠조차 안 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늘어뜨리는 그를 난 절대로 뿌리치지 못함을 직감했다. 어느새 보이지 않는 족쇄가 내 온몸을 옥죄고 있었다. 꿈의 연장일까 싶었지만 확실히 전해지는 그의 냉기에 난 무의미한 저항을 포기했다. 앞으로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르겠으나 난 복종의 눈으로 그를 천천히 바라봤다.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어 그에게 순응할 것을 내비쳤다.
“어떤 꿈을 꾼 겐가.”
나는 빠르게 정리하여 핵심만을 전했다.
“달궈진 칼이 내 가슴을 뚫었고, 얼굴이 창백한 사내가 내게 소리쳤습니다.”
그의 외침은 똑똑히 들렸지만, 내가 제대로 기억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고, 평소에도 신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길 꺼렸기에 회색 남자의 문장은 함구했다.
“신의 결정을 피할 수 없다. 뚫린 자네 가슴은 인간의 타락에 대한 하늘의 응징일세, 다른 세계의 자네는 그 대가를 치렀으니 이제 이쪽의 자네가 치를 차례군.”
그는 내 속을 투명한 유리창 너머처럼 훤히 들여다봤다. 내 어떤 죄가 그리 끔찍한 분노를 샀는지 궁금했다가, 대체 무슨 기준으로 그리도 끔찍하게 처형당했는지, 갑작스레 분노가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눈앞에 서 알짱거리는 개미를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렀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 잠시 침묵했다. 살생당하는 쪽이야 억울하니 납득할만한 이유라도 속시원히 알고 싶겠지만, 그 동기라는 건 보통 심판자들에게 들려줄 목적으로 꾸며지는 경우가 다수였다. 살해의 목적은 개인의 감정이나 욕구의 발산 또는 능력의 발현에 지나지 않기에 목숨 잃은 자가 살인자에게 자신을 왜 죽였느냐를 물으면 되돌아오는 건 생명의 무가치를 재확인하는 것일 따름이다. 즉, 따져봐야 죽은 자만 억울할 일이다. 그럼에도 난 물어야 했다. 뭐든지 알고 있다는 이 오만한 표정의 남자에게 제대로 따지고 넘어가야 했다.
“창백한 남자가 내 귀에 대고 뭐라 소리치긴 했지만 정확지 않습니다. 하나 당신의 말이 맞다면, 저쪽 세계의 난 왜 그런 벌을 받았어야 합니까? 그리고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당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게 꿈이라면 어서 깨고 싶군요. 당신은 진실을 알고 계십니까?”
“지금 자넨 분명히 원래 속했던 세계로 돌아왔어. 말했지 않나, 이 세계와 꿈속 세계는 이어진 거라고. 동떨어진 환상이나 망상 같은 게 아냐. 저 세계가 분노의 흐름에 올라탄 이상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거야.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지. 시작된 이상 결코 멈추지 않아.”
그는 진실을 알거나, 망령된 생각을 놓지 않는 광인 둘 중 하나리라. 난 섣불리 휘말리지 않기 위해 단어를 신중히 선택했다.
“백번 양보해서, 당신 말이 사실이라 합시다. 그럼 그 흐름을 일찍 알고 늦게 알고에 따라 달라질 게 있습니까? 단순히 기다릴 시간이 늘어날 뿐이지 않습니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없고 결국 삶은 정해진 대로 흘러갈 뿐인데, 열심히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묻자면 내가 받을 심판까지 확정됐다면, 어려운 도덕심은 버리고 욕망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게 훨씬 현명한 것 아닙니까? 내가 보기에 인생은 즐거운 운명보다 씁쓸한 운명이 더 많습니다. 그러면 차라리 정해진 흐름 따윈 모른 채 사는 게 속 편하지 않겠습니까?”
질문하다 보니 세상이 참으로 얄궂어 보였다. 한 순간에 거대한 엄지손가락에 무력하게 눌려 온몸이 터지는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질문이 틀렸네. 이 정해진 흐름 속에서 주어진 내 역할은 과연 무엇인지가 중요한 거지. 자넨 그걸 물어봤어야 했어. 이 세상은 아주 넓어. 그곳에는 우리가 평생을 바쳐도 알지 못할 진실들로 가득 차 있지. 광대한 진리의 세상에 비하면 인간은 우리가 무심코 밟아버린 개미나 마찬가지야. 자네란 존재가 세상에 이렇다 할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내가 존재하지 않음이 세상에 소소한 어긋남도 야기치 못한다네. 그럼에도 우리가 벌레들과 구분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을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걸 일찍 깨달을수록 삶의 막바지에 후회보다는 벅찬 환희를 거머쥘 가능성이 커진다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불태울 수 있는 신기한 동물이거든. 다만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것일지는 죽음이 지척까지 찾아왔을 때만 스스로 판단할 수 있기에 조금은 아쉽지만. 어쩌겠나, 우리가 그 정도의 자질밖에 부여받지 못한 것을.”
나의 불손함이 주머니 속 송곳처럼 삐져나왔음에도 그는 인자하게 답했다. 아무리 배움이 짧은 나라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아무리 위대한 개인일지라도 세상의 물줄기를 바꾸기엔 너무도 미약하다는 걸. 하지만 그 위에 떠있는 내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후회를 남기지 않는단 말에 저항하고 싶었다. 가라앉을 때까지 초라한 물장구나 쳐대다가 머저리 같은 거짓만족으로 자신을 위로해야 한다는 한계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의 숙명론에 수긍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질수록 난 질풍처럼 반항했다.
“나는 어둠의 사신에게 추하게 애걸복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따위 같잖은 자기기만 따윈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필사적으로 거스르겠습니다. 욕하고 저주라도 퍼붓겠습니다. 이 땅의 선은 모조리 부인하고, 철면피로서 다른 피조물들을 모조리 딛고서라도 순리의 종착지에 최대한 늦게 도달할 것입니다. 나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진 실에 매달려 움직이는 인형 따위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 자는 평범한 사실을 내게 알려주는 선지자일 뿐인데, 내 안의 증오심이 용암보다 무겁게 끓어올랐다. 그는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으며 날 이끌었다.
“그 심술은 자네가 진정으로 원한 선택이 아닌, 어리고 유치한 감정에 휘둘리는 것뿐일세. 자네는 평소에 더 숭고한 신념을 갖고 있지 않았나.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넨 삶을 후회하게 될 테지. 내 진실 하나 더 말해줌세. 인간이 죽어 육체에서 혼이 분리될 때 어둠은 묻는다네, 너의 선택에 만족했느냐고. 명계의 심판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있다고 할지언정 스스로도 충족하지 못한 존재를 영원한 안식처로 보낼 리 없지 않은가? 자네 말대로 인간은 내적 자유를 지닌 유일한 피조물이야. 따라서 자신의 삶에 대한 심판을 직접 내려야 하는 걸세. 지난 과거에 후회와 불만만 품은 영혼이 설령 창조주도 속을만한 의지로 거짓 판단을 고한다 해도 오로지 고요한 평화와 사랑, 행복만이 가득하고 욕구나 욕정, 충동이 사라진 곳에서 견딜 수 있을까? 일찍이 그런 자들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울고불고 손을 싹싹 비비며 제발 자신을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했다네. 그들이 다시 어디로 갔을 것 같나. 바로 이 지긋지긋한 흐름 속이야. 내 다시 말하지, 자네의 판단력과 신념을 속이지 말게. 이미 자넨 내 말을 납득했어. 거기서 비롯된 무기력감이 자넬 짜증 나게 하는 거야. 이젠 자네의 가치관에 따른 행동을 선택할 일만 남은 걸세. 부디 나와 함께 이 가혹한 굴레를 끊도록 하세.”
난 지금껏 감정이나 의견을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기록관으로서 내 눈과 귀로 확인한 사실을 옮기고, 그에 따른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적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내 양피지들을 읽지 않았기에 무용하고 사장된 것에 불과했다. 이 마을 존립에 전혀 도움 되지 않고, 있으나 마나, 아니 오히려 음식을 축내며 살아간다고 손가락질받아도 묵묵히 견뎌야 할 내게, 한 사람이 섬세히 설득하고 있다. 물론 마을에서 가련하고 무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의 위안을 받는다는 점에서 찜찜한 건 사실이다. 내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비슷한 처지이기에 그의 말이 더욱 진심으로 다가오지만, 솔직히 난 마음 한 구석에서 그보다는 나은 인생이라 여기기에 그의 공감이 자칫 불쾌한 동정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내 삶이 통틀어 저하되는, 즉 비슷한 급으로 엮인다는 저열한 생각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이런 비겁함은 스스로를 혐오케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에 얼른 멈춰야 한다. 어쨌든 나는 앞으로 펼쳐질 내 숙명을 그와 함께 하기로 했다기보다 열린 마음을 갖기로 했다. 우선 난 그 흐름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당장 이 질문에 답해달라고 하고 싶다가도 그리 몇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하찮은 것이 아니길 바랐기에 내 호기심에 대한 해결을 전적으로 시간에 맡기려 했다. 몸으로 침투하는 뾰족한 냉기가 꿈인지 생시인지에 관한 의구심을 깨부쉈다. 확실한 건 눈앞에 펼쳐질 그대로를 받아들일 마음을 굳게 다졌다는 것과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는 것이다. 이런 나의 각오가 눈에 깃들자, 그는 온몸으로 비장미를 뿜어냈다.
“달궈진 칼이 상대의 가슴을 뚫을 땐 나 역시 달궈진 손잡이의 열기를 견뎌야 하네. 이 밤부터 나는 이 칼을 쥘 걸세. 그때부터 흐름은 하늘에 떠 있는 달처럼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되겠지. 자네의 사명이 자네가 말한 대로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라 판단된다면, 이 칼의 손잡이를 잡아 나의 가슴을 뚫어야 할 걸세.”
그는 기다란 막대를 두 손으로 교차하여 움켜쥐곤 가슴 높이로 들어 보였다. 낡은 가죽집에 꽉 물린 검은 절대 풀려나선 안 될 흉악한 물건처럼 여러 개의 가죽 끈으로 꽁꽁 동여매여 봉해져 있었다. 그의 강렬한 인상과 분위기에 사로잡혀 뒤편에 놓여 있던 검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그는 왼손을 뻗어 손잡이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별다른 갈등은 일지 않았다. 다시 그의 눈을 쳐다봤다. 역시나 진실된 빛을 띠고 있었고, 아마도 내가 검을 집에서 빼어 들어도 납득했을 대인배의 표정이었다. 난 고개를 가로저음으로써 앞으로 그와 뜻을 함께 할 것을 표명했다.
“당신은 손잡이를 잡아 누군가의 가슴을 뚫을 것이라 했는데, 그럼 제 역할은 당신에게 가슴을 내어주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내게 설명한 것으로 미뤄 짐작할 때 내 질문이 괜한 것임을 알면서도 만일을 위해 물어봤다.
“아닐세. 자넨 여기서 일어난 일을 더하거나 빼지 말고 적어야 하네. 인간들에게 삶의 무상함이 전달되어 다른 사람을 상처 주고 파괴하면서까지 이 세상에서 지켜야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아니함을 일깨웠으면 하네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소양에 따라 알맹이는 달라질 테지. 여하간 자네의 역할은 자네 할아버지 때부터 정해진 것일세, 피에 새겨진 과업이지.”
잊고 살았던 할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걸음마를 떼자마자 글을 가르쳤다. 낡은 헝겊으로 감싸 밤이나 낮이나 애지중지 품고 다니던 책으로 말이다. 그는 나에게 배워야 하는 이유, 먹을 수 있는 자격 등 삶에 관한 전부를 기록관의 의무와 결부 지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전에 마을에서 사라졌다. 그간 적은 기록 모두와 함께. 어떤 이유인지는 당사자에게 듣지 않는 이상 짐작조차 못 할 것이기에. 그냥 현상 그대로 받아들였다. 다만 내게 작은 집과 이어갈 가업을 남겼기에 그럭저럭 살아갈 기반을 마련해 준 셈이다. 그와 함께 지낸 시간이 강제와 강요의 나날인 탓일까, 그리운 감정 따윈 생기지 않았다.
“팔십 년 전 나의 할아버지 르 뱅살은 신의 뜻이라는 거짓으로 살인을 자행했네. 우리가 원래 살던 곳은 신의 권능과 은혜로 가득 찬 곳이었지. 때론 어긋남과 충돌이 있었지만 그렇기에 조화로움과 이해가 존중되었지. 유일한 분이 남긴 지침에 따라 살다가 약속의 때가 되면 영원한 행복을 만끽하러 떠나면 됐고, 감히 악이 자리 잡기는커녕 그것들의 존재조차 모르는 세상이었지.
그렇지만 인간은 타인의 순수함을 그대로 두지 않도록 타고났다네. 저기 수백 년을 살아가는 나무들은 자신만을 돌보며 살아가지만, 이 간악한 생명은 다른 생명을 양분 삼아 생존해야 해. 건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에 끼어들어 깨우치려 하고 옳고 그름을 가르치려 들지. 모든 것은 목마른 나그네들에 대한 관대함으로 시작됐어. 그들은 붙임성 있고, 감사함에 보답할 줄 알고, 상냥한 사람들이었지. 오갈 데 없는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준 게 실수였던 거야. 사람들은 단호하게 그들을 내쳐야 했어. 미소와 겸손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산 이들은 어느덧 우리가 알던 신의 음성을 다르게 해석했어. 처음에는 다름을 대수롭지 않게 조곤조곤 말하던 이들이 언제부턴가 하늘과 인간이 함께 노할 정도의 틀림이라며 설파했네. 그들에게 호의를 베푼 자들은 그 간사한 음성이 자신들의 단단한 세상을 결코 파고들지 못할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했지. 인간에 대한 지나친 믿음은 엄청난 배신을 낳지. 믿음이 부족한 이들은 흔들렸고, 우매한 이들은 속아 넘어갔어.
순수함이란 때론 무지함과 같아. 해야 될 일과 안 될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용인해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 자신이 원하는 것과 그분의 뜻을 착각한 무리들이 나타났어. 악은 언제나 연약한 부위를 파고들 줄 알지. 신성한 아침 햇살을 받기 위해 일찍부터 산과 들로 나가며 하루하루를 성실함으로 가득 채우던 농노들의 잔잔한 삶에 던져진 의심은 널리 널리 파문을 일으켰네. 잔잔하지만 얇은 그들의 수면 속으로 부패한 것은 끝을 모르고 가라앉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껏 속았다고 생각했어. 성실함은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감사함도 사라졌지. 삶에 불만이 가득 차자 그들은 자신과 다른 자들이 원인이라고 단정 지었어.
신의 말씀을 범인(凡人)들에게 전해야 하는 부담에 잠 못 이루는 자들의 깨끗한 손을 미워하고, 마을의 법과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햇살을 바라볼 수 없어 그을리지 않은 피부를 증오했네. 역할의 다름을 깨닫지 못하고, 허울뿐인 삿된 말을 좇았지. 그들은 평등을 요구했지만 사명의 무게는 나누기 싫었고, 달콤한 권리만 얻길 바랐어. 지킬 게 많은 자들은 신의 목소리에 호소해 보고 적당한 선에서 타이르려고도 했지. 그러나 이미 퍼지기 시작한 들불은 세상을 깡그리 태워야만 끝나는 것이었지. 그들은 이상하리만치 자신의 믿음에 맹목성을 띄었네. 내면의 악마가 시키는 유희를 신의 뜻으로 포장하여 날뛰었지. 그 광기는 진작 결단했어야 할 일을 미룬 탓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어.
적막한 지하에 모인 아홉 명은 어그러지는 경건함을 더 이상 온건함만으로 지킬 수 없다 확신했지.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의지와 사명을 확인하고 슬픈 칼을 휘둘러야만 했어. 그들을 이끈 수장이 바로 우리 할아버지 르 뱅살 백작일세. 온 세상을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 채우길 꿈꿨던 그분은 누구도 하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맡으셨지. 그날 밤 백작과 피로 맹세한 자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선량한 이들의 마음에 파고든 악들을 파냈지. 단순히 제거만 할 게 아니라 뚫린 공간에 다시는 악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메워야 했기에 칼을 달궈 지졌어. 지옥에서 들릴 만한 비명이 가득 차고 유황불의 뜨거움이 온 성을 뒤덮은 이유는 악이 거기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맹세한 자들은 유일한 신실함이 세상을 가득 채울 수 있도록 필요한 만큼의 피를 흘리기로 했네. 그러나 그들의 의지는 도를 지나쳤지. 수 천 명이나 되던 사람들이 쓸려나갔어. 아침 햇살이 온 세상을 다시 순수함으로 뒤덮을 것이라 믿었건만, 자신들이 저지른 잔악무도한 짓거리들에 반박 못할 면죄부가 주어지리라 상상했건만, 피와 오물을 뒤집어쓴 인간들에게 허락된 건 괴로움과 부끄러움이었지.
실제로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비명이 끊임없이 들리고, 타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의 살 냄새가 계속 코를 짓이겼어. 그들은 그 지옥의 폐허에서 더는 살아갈 수 없었지. 그래서 칼의 손잡이를 잡았던 이들은 집에서 함께 묵었던 사람들과 함께 다시 한번 신의 경건함이 가득한 장소를 세우기로 결심했네. 다른 이들이 도달하지 못할 곳. 바로 지금 이 마을일세.”
나는 미처 그의 말들을 다 적지 못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이 강렬한 얘기를 결코 잊지 못할 테니까. 나는 이 과거에 얽힌 할아버지와 나에 관해 궁금했다.
“그럼 제 할아버진 뱅살 백작의 도살자 중 하나였던 겁니까? 언제부터 그는 칼 대신 펜을 집어든 겁니까? 무슨 연유로 그리 됐습니까?”
나의 질문은 여럿이었지만,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내가 목격한 유일한 피붙이가 과연 살인을 저지르고도 그리 태연하게 살아갈 인물이었는지.
“뱅살 백작에겐 언제나 두 개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네. 그중 하나는 험한 일에 칼로 앞장섰고, 다른 하나는 지혜로 곤란한 상황을 해결했었지. 그날의 학살로 용감한 자는 가장 무도한 인간으로, 슬기로운 자는 가장 간사한 인간으로 거듭났지. 자신들이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변해버린 그들을 위해 백작은 괴물에게는 칼 대신 도끼를 들게 하여 타인을 위해 그것을 휘두르도록 명하셨지. 그게 현재 나무꾼의 할아버지였어. 그리고 자네 할아버지께는 다시는 남을 해할 궁리를 하지 말 것과 인간이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하길 명하셨지. 그때부터 두 집안의 역할은 달라졌네.”
내 할아버지에 대한 그의 대답은 명확했다. 수많은 인간을 살해한 살인마. 의지를 부여한 자, 방법을 마련한 자, 실행으로 옮긴 자 모두 동일한 벌의 무게를 짊어질 죄인일 뿐이다. 어떤 변명이나 참작도 궁색할 뿐이다. 나는 부끄러웠다. 내가 다른 이들보단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말끔히 사라졌다. 고개가 절로 떨궈졌다.
“고개를 들게나. 자네가 갖는 수치심은 거짓된 것이야. 우린 살인자들의 후손이고, 상황에 따라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자들이야. 저 밖에 있는 자들과 그 옛날 말을 타고 다닌 자들, 그리고 지금 자네는 같은 배에서 태어난 거야. 대체 무슨 기준으로 떳떳하고 아님을 판단한단 말인가? 여기는 살인자의 피가 흐르는 후손들이 만든 성(城)이야. 적어도 이곳에서 나고 자라는 자가 가질 부끄러움은 자신과 타인이 다르다고 믿는 거짓에서 비롯된 것뿐이야. 이제 그만 일어나세나. 움직여야 할 시간이 꽤 지났어.”
난 아직도 물어야 할 게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할아버지의 기록이 다시는 같은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길 위한 것이라면, 그것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어째서 이 세상의 고통은 끊이지 않는 것입니까. 그럼 우리는 선한 마음을 가지거나 새롭게 태어날 자격조차 갖지 못한단 말입니까?”
사내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잠시 주변을 고요히 잠재웠다. 그러다 신중히 입을 뗐다.
“이만 난 뒤틀린 진실을 바로 잡으러 가야 하네. 비록 우리를 둘러싼 흐름을 바꿀 수 없지만 그 속에서도 우린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어. 그 가능성을 위해 자네의 기록들은 존재해야 하는 것이지. 자네에겐 오직 시간이 해답이니, 조급해하지 말게나.”
신속하지만 무거운 그의 발걸음에 내게 내밀었던 칼이 함께 했다. 드디어 흐름이 시작될 참이었다.
나는 부리나케 그를 뒤따라 나섰다.
오래전 인간에 의한 인간의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먹을 걸 빼앗아 살아남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너지는 벼랑 끝에서 먼저 빠져나오기 위함도 아니다. 자신들이 추구했던 정의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정당화되거나 축복받지도 못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숨을 걸고,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것이다.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너무도 지나쳐서 스스로마저 쉽사리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지만 결국 죽은 이들만 불쌍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악행이나 피살자의 괴로움을 잊는 것이다. 살인자들은 시간이 흐르면 먹고, 자고, 웃고, 사랑이란 말마저 입에 올리게 된다. 아마도 그들이 가진 죄의식의 주된 사유는 자신의 손에 죽은 생명에 관한 존엄성보다 내면의 악에 굴복해 버린 부끄러움이었으리라. 그래서 태양으로부터 잠시 숨은 것이리라. 결국 인간의 생명이 참으로 하찮다는 게 밝혀진 셈이다. 그 사실은 소수의 깨어있는 자들에게만 아주 오래전부터 쉬쉬거리며 전해져 왔다. 살인은 결국 순간의 감정이나 대수롭지 않은 오인에 의해 충분히 벌어질 만한 우연한 일일뿐이다. 그건 최초의 인간에서 비롯된 최초의 살인자에 대한 처분을 봐도 납득할 만하다. 하늘은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반복되는 살인은 살해된 이를 기억하려는 자가 실행자에 대한 대갚음으로써 이뤄지는 인과관계 일뿐이다. 혹자들은 복수를 금하고 용서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일찍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이들의 기만이고 눈속임이다. 복수를 하지 않는 건 무능하고 비겁한 자의 어리석은 자기 방어이다. 하지만 그는 대체 무얼 바로 잡으려 하는 것일까. 저 움켜쥔 칼로 누구를 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