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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날붙이가 실현하는 평등

by 고전을 마시다

하얀 남자는 북쪽 비탈로 곧장 나아갔고, 나는 그의 들썩이는 등을 쫓았다.

한 집에 이르러 제법 큰 문짝에 달린 손잡이를 간단하게 내리쳐 파괴했다. 어둠을 틈탄 비겁한 침입임에도 그의 걸음은 당당했다. 그 누구라도 들을 수 있도록 흐름의 서막을 알린 웅장한 소리를 내며 그는 행정관 헨데의 집안으로 들어섰다.

두 명의 여인이 현관에 접한 거실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손에 들려진 촛대에 떠받힌 빛이 그녀들의 어두운 얼굴을 비췄다. 그녀들은 칼을 든 하얀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연스레 우리를 안내했다. 괴한들의 습격을 예상했거나 아니면 이 세상에 자신들을 놀라게 할 일은 더 이상 없다는 것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집안에서 호들갑스러운 건 나뿐이었다.


거실 한편에 놓인 낡은 의자에 피와 땀으로 범벅된 남자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아직 쇠하지 않은 푸른 달빛이 그에게 남겨진 얼마 안 되는 시간을 더욱 빠르게 앗아가는 듯했다. 인간에게 칼은 여러 의미가 있는 도구이다. 그녀들은 우리가 가진 칼의 의도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의지가 무엇이든 간에 얼른 실행해 줄 것을 바란 것이리라. 거실에는 우리 셋만 남았다. 시간은 더 과감하고 빠르게 흘러갔다.


“이제 와서 자네는 무엇을 위해 그 칼을 빼어 들고 온 겐가. 수십 년 동안 무엇 하나 되찾고 싶어 하지 않았으면서.”


죽어가는 헨데는 달빛만 바라보며 물었다.


“무엇을 위한 게 아니네. 이렇게 될 운명이 더뎌졌을 뿐.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내려진 업보가 더 이상 후손에게 이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헛된 것임을 오늘 깨달은 거지.”

하얀 남자 역시 푸른 달빛을 향해 답했다.


“난 콘스탄틴이 내 아들이라 생각했어. 그래서 우리 집으로 거둬 길렀네. 결국 오늘같이 끔찍한 재앙을 겪었지만 내게 후회는 없네. 나는 날이 갈수록 약해지는데, 나를 대신할 사내가 나날이 강해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거든. 내가 사라져도 또 다른 내가 계속해서 이 세상을 누릴 것이라 확신했네. 비록 오늘 그의 영혼은 날 앞장섰지만 나의 꿈이었던 자의 육체가 유린되는 꼴마저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난 또 실패했다네. 제발 부탁하네, 어서 가서 자네의 핏줄인 동시에 내 삶의 의미였던 자의 존엄성을 지켜주게.”


푸른빛에 잠식당한 남자의 말은 뒤로 갈수록 느려졌다. 이내 그의 말은 낭떠러지 사이 삭은 나무다리처럼 뚝 끊겼다. 죽음이 육신의 활동이 멈춘 상태를 의미한다면 내 눈앞의 그 사내는 진즉에 시체였어야 했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을 남기려고 최후까지 발악한 영혼이 우리에게 진심을 전한 것이다.


창백한 남자는 그의 귀에 잠시 속삭이더니, 절도 있고 신속하게 뒤돌아섰다. 나는 우리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몰라 집밖으로 나가는 몇 안 되는 발자국에서도 방황했다. 그에게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이 어디든 거침없고, 얼마나 걸리든, 어떤 난관에도 전혀 주저하지 않는 자의 움직임이었다.

행정관의 집밖으로 나가자마자, 나는 이 마을에 존재했던 또 다른 창백한 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아직은 무너질 때가 아니라는 굳은 입술로 우리를 맞이했다. 남자는 그녀를 가련한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봤다. 칼을 들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왼쪽 머리에서부터 뺨까지 가볍게 쓸어내리며 많은 감정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녀와 그는 한 곳을 바라보고 향했다. 그들의 의지는 굳건했다. 내 꿈에서 들려온 말발굽 진동이 몸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우리는 곧장 마을의 또 다른 행정관 비시의 집에 당도했다. 현관으로 이어진 입구에는 이미 핏자국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남자는 검을 뽑아 드는 동시에 문을 밀어재꼈다. 집안 응접실로 들이닥친 우릴 보고 휘둥그레 눈동자는 여섯 개였다.


오른쪽 세 걸음만큼 떨어진 곳에 한 사내가 다른 남자의 피 흘리는 팔뚝에 천을 동여매고 있었다. 하얀 남자는 오른 다리를 대각선으로 크게 한 발자국 내딛고 재빠르게 양손으로 꽉 잡은 칼을 하늘 높이 들 그들을 갈랐다. 비스듬히 날려진 칼은 순식간에 치료받던 자의 몸통을 가로로 동강 냈고 그 칼 끝은 동강 난 남자의 오른팔에 붙어있던 자의 손을 날려버렸다. 둔탁해진 칼의 속도는 하얀 남자의 과감한 발걸음으로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제 서야 왼편에 있던 남자는 도끼를 들어 한 걸음을 내디뎠지만 이미 불의 검이 남자의 가슴을 뚫어버렸고 하얀 남자는 그대로 멈추지 않고 그 남자에게 악착같이 들러붙어 벽의 끝까지 밀고 나갔다. 벽 가에 있던 낡은 가구들이 산산 조각나며 도끼든 자도 물건처럼 바닥에 나뒹굴었다.


처음에 동강 난 사내들이 지른 비명 때문인지 가슴 뚫린 자가 벽에 부닥치는 소리 때문이었던지 간에 숨겨진 이들이 뛰쳐나왔다. 깊숙한 거실 안쪽 방문에서는 늙은 행정관과 둘셋의 남자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뒤엉켜 있었기에 정확히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긴 어려웠으나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았으므로 마을의 숨겨진 법을 아는 자들이 분명했다.


또 한 무리가 지하에서 올라왔다. 앞장선 검은 사내는 나무꾼 빈센이다. 손이 잘려 울부짖는 자가 아들임을 확인한 수놈은 짐승처럼 포효하며 짧지만 날이 넓은 칼을 힘껏 들어 젖혀 달려들었다. 하얀 남자는 침착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칼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자신의 머리 위로 곧게 치켜세운 검으로 짐승의 머리를 정확히 내려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의 칼도 과감했다. 창백한 왼쪽가슴에 무디지만 둔한 칼이 얕고 강하게 파고들었다. 눈 한 번 깜박할 사이 다음 행동을 결정한 사내는 지하를 향해 무섭게 돌격했다. 서너 계단 아래 돼지 잡는 게 업인 부쳐가 얼빠진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육중한 그는 곧장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칼을 몸으로 움켜쥐었다. 그는 들고 있던 날이 두껍지만 끝은 뾰족한 칼로 자신을 밀어붙이는 몸체 어깨 죽지에 찔러 넣었다. 몸통과 팔이 붙어있게 해주는 바로 그 이음새를 끊어놓으려 한 것이다. 하얀 남자는 그 자의 칼이 아래로 주욱 그어지지 않도록 이미 제 역할을 다한 자신의 검을 놓고 도살자의 양손을 붙잡았다. 단호하면서도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남자의 오른팔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돼지 잡던 이의 몸속에 있는 칼은 이미 여러 장기를 뚫고 지나갔기에 아주 잠시의 시간만 흐르게 하면 됐다. 내장과 선지를 쏟으며 뭉개져있는 고깃덩어리를 내팽개치고 하얀 남자는 지하실로 뛰쳐 들어갔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계단 밑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려는 찰나, 무서운 목소리가 지상으로 뻗어 나왔다.


“이 집안의 어떤 것도 나가지 못하도록 하라.”


지상에서의 누명으로 불명예의 가시 멍에를 짊어진 채, 지구에서 가장 무거운 물질이 액체가 되어 소용돌이치는 깊이의 지옥에서 증오와 용서를 번갈아가며 곱씹던 자가 내면의 갈등을 마치고 끝내 악마로 변해버려 온 세상을 멸할 각오로 지하에서 탈출할 때 낼만한 괴음이었다. 나는 몸이 얼어붙었지만 또 다른 하얀 여자는 바깥으로 나 있는 유일한 탈출구를 막아섰다. 하얀 남자는 더욱 날랬다. 자신의 어깨에 쑤셔져 있던 칼을 뽑아 들더니, 이 일이 있기 전까진 마을에서 가장 안전했을 공간으로 들이닥쳤다. 늘 두려움이 대상이 되었던 자들이 이번만큼은 엉성한 문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을게 분명했다. 짐승의 포효에 사지가 마비되어 허벅지를 적시는 실수를 했음에도 그들은 창피함을 느끼기보다 그 안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어떻게든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으리라. 하지만, 역시 하늘은 스스로를 돕지 않는 자는 철저히 외면하는 법. 타인의 힘에만 의존하던 유약한 자들이 요청한 기적은 불발되고, 약자에게만 으스대던 비겁한 자들은 숨기에 바빴다. 이들이 할딱거리며 숨 쉬는 소굴로 들어가는 공간은 사람 한 명이 겨우 어깨를 펴고 들어갈 수 있는 계단 옆 복도였다. 남자는 깊숙이 들어갔다. 그 안에 있던 자들이 몇 명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살려달라던지, 도와달라던지, 자비를 베풀어 달라던지, 신에게 호소한다던지 인간의 음성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악마에게 유린당할 두려움만 남은 영혼들의 처절한 절규만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흉악한 것이 나서서야 마을의 모든 인간은 비로소 같은 모습을 띄었다.


거실에서 손을 잃고 나뒹굴던 남자는 저 어둠 속 영혼들에 비하면 자신의 처지는 너무나도 다행스럽다 생각했을까 울음을 멈추고 손목밖에 없는 팔을 바닥에 딛고 일어섰다. 하지만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를 막아선 여자를 보곤 나가기를 쉽사리 포기했다. 그가 이 지옥을 탈출하기 위해 어떤 무기라도 들고 악으로 밀어붙였다면 승산이 있을 법도 했을 텐데, 웬일인지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녀린 양팔과 다리는 쭉 뻗어 몸뚱이로 문을 자처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몸이 산산이 토막 난다 해도 입으로라도 물어뜯어 누구든 저지했을 것이다. 그녀의 눈이 그렇게 증명했다. 그 남자 또한 그걸 알고 있었기에 잠시나마 살기 위해 쳐보았던 몸부림조차 압도당한 채 오들오들 몸을 떨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새빨갛게 물든 자가 드디어 거실로 나왔다. 뿔만 달리지 않았을 뿐 이 지상에서 태어난 생명이 아니었다. 그리고 존재해서도 안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두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지하계단으로 내려가 돼지의 몸에 꽂힌 불의 칼을 빼내고 다시 올라와 떨고 있던 자의 다리를 동강 냈다. 왜 죽이지 않았는지 이유를 묻지 못했다. 칼이 무뎌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할 겸 혹은 어디로든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를 절단하기 위함이라 추측했다.


하얀 이들은 망설이지 않고 정해진 흐름에 다시 올라탔다. 나는 그들을 따라가려다 양손과 한쪽 다리를 잃은 자에게 눈길이 갔다. 감당 못할 거대한 흐름들이 더 펼쳐지기 전에 나는 확인해야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아니 지금 그러한 흐름에 희생된 자에게 그 흐름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남자는 빈센의 아들이자, 마을사람들을 위해 식량을 구하러 나섰다가 자신들을 돕고자 했던 가엾고 선량한 이들에게 해를 끼친 악인이었다.


"누구도 신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자네에게 내려진 벌을 그대는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 건가? 자신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간악하고 무거운 죄였는지 기억하냔 말일세."


격정적인 이 밤에서 처음으로 안정적인 침묵이 잠시 흘렀다.

"지금 나의 영혼은 몸 밖으로 빠져나가기 직전이지. 하지만 지금 내게 이뤄진 것은 올바른 신의 심판 따위가 아냐. 우리가 정녕 신의 아이들이라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했던 짓들은 동정받아 마땅한 것이지 벌을 받을 것이 아니겠지. 거기다 우리가 한 짓은 우리를 위한 것도 우리가 마냥 원해서 한 일도 더욱 아냐, 마을을 위해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잇게 하기 위해 괴롭지만 불가피한 행위였어. 살아남기 위해 한 짓이라고. 자네도 우리 덕분에 살아있지 않나."

난 그의 말이 생전 처음 들어본 언어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추악한 죄에 가증스러운 면죄부를 부여할 심산인 것만은 확실했다. 이 파렴치한에게 내 뇌리에 박힌 그의 추악함을 들춰냈다.


"그렇다면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푼 그 농아부인을 겁탈하고, 선하디 선한 남자의 영혼을 불로 짓이긴 것은 정녕 잊었단 말이냐?"


남에게 입힌 상처는 쉽게 잊어버리는 인간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그리고 오랜 세월 타락해 온 인간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난 도끼를 찾아들었다. 쟈쟈는 더욱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힘겹게 말했다.


"잠시 잊고 있었어. 그 광경을, 그간 너무나 모질어서 까맣게 더럽혀졌을 삶이었을게 뻔할 텐데, 백지장처럼 순수하게 세상을 대했던 그들이 그리도 서럽게 울던 그 모습을. 내 영혼이 마치 빗물에 젖은 종이처럼 갈가리 찢겨 가는 그 심정을 난 잊고 싶었어. 그래 내게도 죄가 있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천사들의 날개가 꺾이지 않게 그들을 말렸어야 했어. 내게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오늘 밤 칼들이 내게 향하기 전이 아니라 그 숲 속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리고 그 착한 여인과 남자를 지킬 수 있도록 내 동료들을 내 손으로 끝장내고 싶네. 난 용기를 내지 못하고 여자가 겁탈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지. 그것에 대한 심판이 오늘이라면 난 할 말이 없네."


그는 입으로 검은 것을 울컥 쏟아내더니 고개를 푹 떨궜다.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석양아래 내게 고해했던 자의 말과 지금 죽음 앞에서 죄를 인정하여 자신이 왜 심판받아 마땅했음을 받아들인 자의 말이 다름을 알았다. 남자는 몸속의 피를 깡그리 쏟아내 자신의 죄를 매듭지었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도끼의 넓은 면으로 내리쳤다. 겨우 정신 차린 내 몸뚱이로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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