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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회색빛 세상

by 고전을 마시다

지금으로부터 십구 개월 전, 겨울은 유독 춥고 길었다. 가장 오래 산 노인마저 혀를 내둘렀다.

몇몇은 겨울이 혹독한 만큼 봄은 더 화사할 것이고, 여름과 가을이 길고 풍요로울 것이라 장담했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더 이상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추위는 여전히 숲을 포위하고 있었다.

아무리 날짜를 넉넉히 헤아려 봐도 만물이 생동할 만한 봄은 오지 않았다. 다들 이상하다며 작게 동요했다.


사라진 온기의 행방에 궁금해하면서도 그들은 불평하지 않고 땅에 씨앗을 뿌렸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뒤숭숭한 상황일수록,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다. 아직은 자신이 마을에 필요한 사람임을.

늦어질지언정 세상의 흐름은 그대로일 것이다. 견디면 해결될 일이다.

오늘 밤만 보내면, 한 주만 더 흐르면, 한 달만 더 버티면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들 그렇게 느긋한 마음으로 때를 기다렸다. 부족한 식량은 어쩔 수 없이 짐승들의 살코기로 대체했다.

어차피 동물도 먹여야 했으므로, 그것들을 잡아 사람을 먹이는 게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행정관과 장로들은 판단했다. 모진 상황은 잠시일 뿐이고, 이게 지나면 그간 못했던 일까지 밤새워해야 하기에 사람들을 기운 차리게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결정이라 확신했다. 예전보다 마을축제가 좀 더 잦아졌다. 모인 자리에서 다들 가벼운 걱정이야 소곤소곤 주고받았지만 그 누구도 앞날에 관한 불안감을 심각히 표현하지 않았다.


몇 개월이 더 흘렀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안의 싹이 틔기 시작했다.

한 번 드러난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쑥쑥 자라났다. 이야기가 오갈수록 허무맹랑한 추측만 쌓였다.

불길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할수록 인내심은 줄어들었다. 밀농사꾼들은 기다리다 못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봄을 잡으러 사방팔방 쏘다녔다. 서리가 빈틈없이 뒤덮인 땅은 디딜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하며 큰 소리를 냈다. 초록은 자취를 감췄다. 회색이 내려앉은 세상이다. 사람들의 아침인사 소리가 사라졌다. 종교 집회가 예정된 날은 제사장이 요구한 시각에 평소보다 종이 다섯 번 더 점잖게 울린다. 오늘은 옅게 깔린 안갯속 공기가 유난히 더 스산하다. 경직된 표정의 사람들은 사방에 뿌려진 어수선함을 뚫고 한 곳으로 걸어갔다. 마을에서 가장 큰 공간이 마련된 그 장소, 열두 번의 종소리가 끝나기 전에 모든 이들은 그곳에 모여 질서 있게 놓인 의자에 차례로 앉는다. 반쯤 감겨있는 눈, 부릅뜬 눈, 완전히 감긴 눈, 그들이 향한 쪽으로 한 남성이 여유 있게 등장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걸음의 계단만큼 높은 단상은 앉은 사람들을 내려다보기에 적당했다. 갈라지는 제사장의 목소리를 빌려 밤새 묵혀둔 언어들이 찬 공기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강림한다.


“여러분, 다들 평안한 밤 보내셨겠지요. 평범한 이들에게는 고요한 시간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제게 지난밤은 천둥이 쉴 새 없이 쳐대고, 번개는 번쩍였으며 늑대와 곰이 울부짖은 날이었습니다. 마침내 두 짐승은 격렬히 상대를 물어뜯어 둘 중 하나는 상대의 가죽을 부욱 찢고 생살을 씹어 댔습니다. 가느다란 신음이 지독히 흘러나왔습니다. 그 소리가 살을 씹는 입에서 나오는 것인지 씹히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 생지옥을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무섭고 괴로웠습니다. 저 짐승의 뱃속이 채워지지 않아 내게 그 송곳니를 찍으려 달려든다면 난 과연 어떻게 저항할 수 있단 말인가. 심장이 요동치고 땀은 온몸을 적셨습니다.”


그는 지상에서 가장 부드러웠던 공간을 숨쉬기 어려울 만큼 긴장시켰다. 그리고 부릅뜬 눈으로 말을 이어갔다.


“숨고 싶었으나 숨을 곳이 없었고 몸을 보호하고 싶었으나 공기의 떨림마저 느껴지는 알몸일 뿐이었습니다. 사방을 분간하고 싶었으나 태초의 암흑이 제 눈에 씌어 모든 것은 시커멨습니다. 그러나 제 이 두 귀는 짐승의 씹는 소리, 풀 밟는 소리까지 선명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씹는 소리가 잦아드나 싶더니, 신음이 멈췄습니다. 짐승은 푸르르하며 입을 풀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셨습니다. 몸을 웅크릴 때 접히는 뼈마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사방 그 어느 곳에서도 그걸 볼 수 없었습니다. 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 짐승은 내달리지 않고 한 걸음에 나의 고환을 물어뜯고 그 구멍 난 곳으로부터 나의 내장을 꺼내 먹겠구나. 이 잔혹한 짐승은 내 신음을 마치 식욕을 돋우는 음악처럼 들으며 날 파먹겠구나. 나에게 죽음이라는 선물이 내려지지 않도록 혐오스러운 오장육부를 조심스레 씹어가며 ‘자, 너의 기분은 지금 어떠한가, 이 부분이 떼이니 고통스러운가?’라며 침묵의 대화를 나누겠구나!라고 직감했습니다. 현실을 부정하려고도, 상황을 피하려고도, 맞서 싸워보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게 부질없었습니다.”


그는 아직 숨을 내 쉬지 않았고, 자리에 앉은 이들 또한 편하게 숨을 쉬지 못했다.


“짐승이여, 그대 내 몸이 그리도 필요했단 말이냐. 내 어머니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나와 많은 것들을 입으로 삼켜 이룩한 이 몸이 한낱 저 미천한 생물의 유희거리가 되기 위함이었단 말인가. 내 미처 몰랐구나. 내 삶이, 내 운명이 짐승의 위장 속에서 서서히 녹아 사라질 것인지. 난 미처 몰랐구나. 왜 꼭 삶의 이유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알게 된단 말이냐. 내 진작 고깃덩이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을 알았더라면 내장을 미리 깨끗이 하고, 내 정액을 고환에 가득 채워 네 입에 즙이 가득 흐르도록 했을 텐데. 푸르고 청량한 음식만 입에 넣어 몸속에 기생충 한 마리도 머물지 않게 만들었을 것을. 아니다. 사랑스러운 아내 조세프 앞에 무릎을 굽혀 아래로부터 그녀를 올려다보고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에 내 양손을 끼워 들어 올리며 그대를 만나 행복했음을, 그 누구보다 축복받았었음을 그래서 감사했음을 한 번이라도 더 얘기해 주었을 텐데.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돌이켜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제 그만 포기하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습니다. 무릎부터 정강이로 풀잎과 흙의 촉촉함이 스며들었습니다. 저는 머리를 땅에 처박고 엎드려 짐승에게 가장 취약한 자세가 되었습니다. 심장이 몇 번이나 더 뛰게 될 수 있을지 모를 짧은 시간, 전 보이지 않는 눈을 감았고 손을 머리 앞으로 모았습니다. 내 운명은 비록 이리 맺어진다 하더라도 남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겠다. 그리고 내 그간의 삶을 반성해야겠다. 최후의 시간에 기도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겠다.”

그제야 그는 겨우 한 번의 숨을 내뱉었고, 사람들도 눈치를 봐가며 숨을 반절 정도는 내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날 노려보던 짐승이 웅크린 지 적잖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가 아직 살아있다니. 절 휩싼 불안에서 벗어나 주변을 의식해 보니 더 이상 낮게 깔린 울음소리도, 그 어떤 위험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전 눈을 떴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봤습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첫 번째 종소리. 제 눈에 들어온 빛은 티끌마저 보이게 밝았고, 소리는 감미로움을 품어 세상 어느 것 하나 거스르지 않으며 넓고 멀리 퍼져나갔습니다. 뻗어나가는 공기가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손길과도 같았습니다. 저는 여느 때와 같이 세 번째 종소리가 퍼져나가는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빗고, 옷을 갖춰 이곳으로 나섰습니다. 오는 발걸음은 어린아이처럼 발랄했고, 설렘으로 가득 찼습니다. 점잖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애썼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평소 제 발자국이 뒤꿈치부터 찍혔다면 오늘은 분명 앞부리부터 찍혔을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지난밤 제 일을 말씀드리게 됐습니다. 늙은이의 괴상망측한 꿈이 대체 머가 신기하다고 저리 호들갑이란 말인가. 네, 다행히도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꿈꾸는 도중에 꿈과 현실을 구분해 낼 수 있단 말입니까? 정녕 꿈속에서 불에 타는 자신의 냄새를 맡아본 적 없고, 지글지글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며, 고통을 느껴보신 적이 없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꿈과 현실을 구분할 정도로 현명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 꿈속에 있는 동안에는 말입니다. 꿈은 상상이지만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 낼 수도 조정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형틀에 묶여 고문받는 죄인처럼, 그래서 중요한 건 말입니다.”


이 장광설에 관한 결론을 지으려 그는 목소리를 재차 가다듬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감사함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쓰임을 타고났기에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운명이 우리를 직접 찾아왔을 때,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젯밤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죽음을 맞이할 뻔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더 이상 무엇이 아쉽겠습니까.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전 죽음의 문턱에서 남은 이를 위해 기도했고, 자신을 되돌아보았고,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다가올 운명이 어떤 것인지는 오직 그분만이 아십니다. 그러니 오늘을 충만하게 사십시오. 가족을 안아주고 땅을 어루만지러 나가십시오. 여러분 어서 일어납시다. 태양이 여러분을 비추고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매달 열린 집회에서 연설을 했다. 늘 똑같은 안부인사로 시작해 한 달 동안 병아리 몇 마리가 알에서 깨어났는지, 갓 태어난 새끼돼지가 얼마나 빨리 네 발로 딛고 일어섰는지, 한 마리 당나귀를 하늘의 예정된 부름보다 앞당겨 올려 보낸 게 누군지 아냐는 둥, 마을 내 일어나는 소소한 일에 수상스러운 자신의 공헌을 포장하여 사람들을 현혹했다. 아둔한 사람들은 그에게 감사했고, 순박한 사람들은 일상에 감사했다. 후자는 제사장의 억지 또한 순리대로 흘러가는 세상의 일부라 여겼기에 굳이 반감을 갖지 않았다. 이처럼 그의 설교에 관한 인상은 사람마다 달랐어도 그의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은 확실히 통일됐다. 오늘은 그나마 꽤 준비된 궤변이었다. 하지만 역시 듣는 이의 어마어마한 호의가 발휘되지 않는 한 알맹이가 미약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를 갸륵히 여겨 그가 알리고자 한 것을 굳이 헤아려보자면, 마음을 병들게 하는 의심을 걷어내고 부지런히 움직이자. 아니면 최악의 상황은 아직 안 왔으니 벌써 낙담하기는 이르다가 아닐지 싶다. 그의 속마음은 나르시시스트 특유의 황홀함으로 차올랐지만, 겉으로는 왕의 자리를 세 번이나 거절한 자처럼 공손히 숙였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살펴봤다. 대부분 만족스럽거나 감격한 듯했다. 더러 결의를 다지는 얼굴도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도 있었다. 이 옹졸한 남자는 그 불경한 얼굴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실 오늘 그의 노력은 나름 의미가 있었다. 사람들은 경건함 마음을 다소 회복했고, 다시 무엇이든 해볼 용기를 얻었다. 깊은 땅 속에서 잠자는 두더지를 잡으려 시도했고, 커다란 나무를 쓰러뜨려 그 안에 숨은 딱따구리를 찾으려 했다. 그들은 다시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진 희망은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았다. 긍정적인 기대를 지속할 근거나 징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현실에 맞설 의지는 제쳐두고, 도피나 망각을 택했다. 허깨비는 그들을 태우고 지상의 참혹함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솟아올랐다. 그러나 어떤 환상도 위장을 채우지 못한다. 지상에 두고 온 아이들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정신이 번쩍 든 사람들은 거짓된 천상에서 추락한다. 높이 올라갔던 사람일수록 추락의 충격은 컸다. 그 고통은 영혼마저 산산조각 낼 정도였다. 이젠 어른들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엉엉 울어댔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뿌렸던 씨앗마저 파내 먹어치웠다. 씨앗이라고 착각한 흙더미를 집어삼켰는지도 모른다.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사라졌다. 마을을 지탱하던 수십 년의 체계가 무너진 것이다. 가장 많은 인원을 차지하는 밀농사꾼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 권력자들은 아직 집안 깊숙한 곳에 쟁여놓은 것들이 있어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밤낮으로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그들을 괴롭혔다. 그들은 종지기에게 사람들이 모이도록 종을 울리라 지시했다.


비시 드 오르, 가장 나이 많은 행정관이며 이 마을이 세워질 당시부터 크게 기여한 집안의 가장이다.

모든 자리에서 우선적인 발언권을 가진 그가 이번 모임을 주관했다.


“오늘은 이 비시 드 오르가, 다른 행정관 클레 본 헨데에게 요청하여 만든 자리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밀의 싹이 전혀 자라질 않습니다. 언젠가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건 분명하지만, 당장 우리 마을은 굶주려 있습니다. 돼지는 불과 이 주 전에 잡았고, 닭에게 줄 모이가 없어 달걀도 더 이상 나오지도 않고 있소. 픽픽 쓰러지는 당나귀로 버틴 것도 지난 주로 끝났습니다. 이에 좋은 의견을 모아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우선 행정관과 장로께선 현명한 의견을 주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행정관인 헨데가 머뭇거리자, 마을의 으뜸 장로인 알레르 메로빙이 나섰다.


“우리 장로들은 이곳에 나오기 전에 미리 의견을 나눴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아 좋은 생각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평소 적지 않은 특혜를 누려온 건 이런 중차대한 일에 더 앞장서기 위함인데 역할을 제대로 못하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저는 집에 있던 말린 고기 다섯 포와 곡식 두 자루를 마을에 내놓고자 합니다. 미약하나마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 그들의 흐느낌이 가셨으면 합니다. 지금은 허울뿐인 믿음을 지킨다며 방관할 때가 아니란 건 확실합니다.”


메로빙의 말에 장로 라 이고르가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메로빙 장로는 지금 감정적이고 독단적인 행동을 하려 하십니다. 분명 장로회의에서도 말했지만 개인의 식량을 내는 건 결코 현명한 방법이 아닙니다. 당장 한 끼를 해결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도리어 이제 막 허기에 익숙한 위를 혼란스럽게 할 뿐입니다. 육체에 해를 끼치고 정신까지 피폐하게 할 겁니다. 그러니 그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말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것을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저와 제 처는 적게 먹기 때문에 저희 것을....”


가장 연로한 장로의 말은 가장 어린 장로 게라드에게 막혔다.


“어찌 그리 경거망동하신단 말입니까? 제가 알던 총기 넘치는 제 일의 장로가 맞는지 의심됩니다. 저는 이고르 장로님의 말씀에 적극 찬성합니다. 메로빙 장로가 하려는 그 방법 자체가 마을을 진정으로 위한 것인지 아직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우린 이 자리에 일개 범부가 아닌 책임자들로서 임하고 있습니다. 독단적으로 결정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을의 재산이 언제 개인만의 것인 적이 있습니까? 공평하게 나눠 각자 집에 보관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공동의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집에 있었다고 해서 그걸 맘대로 처분할 권리는 없단 말입니다. 너무 나이가 드셔서 그런지 판단력이 많이 흐려지셨나 봅니다?”


그 기세를 이고르가 받았다.


“사실 전 이 모임이 열리는 것 자체를 반대했습니다. 땅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땅을 향해 의심하는 마음을 갖는 순간 진정한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끊임없이 물을 길어다가 땅을 촉촉하게 할 것이며, 순번을 정해 대지에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를 합시다.”


장로 게라드는 그의 주장에 격렬히 호응했다.


“그 방법에 동의합니다. 땅은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아요. 배반한 것은 하늘입니다. 별자리 위치가 변하면 저 위에선 찬 공기를 거둬가고 뜨거운 공기를 내려 보내 날씨를 바꿔야 하는데 지금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겁니다. 수십 년이나 변함없던 계절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이유가 분명 따로 있을 겁니다. 우리 중 누군가가 해선 안 될 행동을 하여 노여움을 샀거나, 반대로 마땅히 해야 할 무언가를 하지 않아서 기분 상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이 원인을 찾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한 농부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고, 행정관은 그에게 발언권을 허락했다. 그는 건장한 체격에 얼굴 대부분을 수염으로 뒤덮은 사내 중의 사내였다. 일 년 농사를 마친 뒤, 숲에서 사냥할 때면 늘 앞장섰다가 맨 마지막에 돌아오는 책임감 강한 남자였다. 공손이라는 단어를 쓸 줄은 몰랐어도 늘 상냥한 말투와 조심스러운 행동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저는 아침마다 엎드려 땅에 볼을 가져다 대 봅니다. 땅 속 밀알이 느끼는 포근함을 알고 싶어서 말입죠. 하지만 여전한 냉기만이 제 얼굴을 마비시켰습니다. 벌써 오래도록 봄은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더 걱정되는 건 어디서 늑장을 부리는지, 아직 우리를 향해 출발조차 안 했을 것 같다는 겁니다. 마누라는 창피한 짓이라고 말렸지만, 수십 년간 땅에 의지하여 먹고 산 우리가 못 할 짓이 무엇이겠습니까. 제 단벌옷을 벗어 밤새 땅을 덮어둔 적이 있습니다. 혹시나 힘겹게 움튼 싹이 제 더러운 바지에 깔려 뭉개지지는 않을까 방정맞게 들락날락했었지요. 알몸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땅을 돌봤습니다. 제가 아는 숫자로는 더 이상 셀 수 없는 날만큼 옷을 벗어놨습니다. 그러나 어떤 변화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을을 둘러싼 저 거대한 나무들은 여전히 저렇게 버티고 있는데, 우리가 먹는 그 작고 얇은 쭉정이가 자라지 않는다니요. 이건 누군가 우릴 골탕 먹이거나 시험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됩니다. 이제는 하다 하다 땅이 토끼나 사슴들마저 내놓고 있지 않아요. 우린 땅으로부터 버림받은 겁니다. 고마움을 모르고 파헤치고 헤집고 그 안에서 무엇이든 끄집어내려 하고, 몸속에서 나오는 부정한 것들만 그들에게 줬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요. 아마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이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건 하나입니다. 땅을 어르고 달래서 그들을 그렇게 만든 원인들을 밝혀내야 합니다. 그걸 죽이거나, 잡아다 바쳐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진지하게 얘기해 볼 것을 요청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단어가 많지 않습니다. 생각이란 것도 거의 해본 일이 없지요. 그래서 여기 계신 똑똑한 분들의 지시를 바랍니다.”


여느 때였으면 땀이 흘러내렸을 계절, 그러나 사람들의 입과 코에서는 분명히 보이는 새하얀 것들만 뿜어져 나왔다. 모든 것이 무겁고 낮았다. 이 차가운 것을 누가 어떻게 깨뜨릴 수 있을까. 얼굴에 조바심이 피어오르는데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여기 모인 이 많은 사람 가운데 그 누구도 이유와 방법을 모를까 봐 겁 난 것이다. 제발 아무나 좋으니 헛소리라도 해주길 바랐다. 침묵을 와장창 깨뜨릴 그 어떤 진동이라도 간절했다.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부정한 아이, 콘스탄틴. 그가 손을 들며 물었다.

그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그의 어머니를 설명해야 한다. 그녀는 이 마을의 세 번째 법을 어겼다. 함께 법을 어긴 남자는 광대로서 살아가고 있으나 그자가 콘스탄틴의 진짜 아버지라는 것은 확실치 않았다. 어쨌건 그녀는 아이를 낳음으로써 죄의 올가미에 더욱 단단히 걸려들었다. 그녀는 주어진 삶에 순응했다. 단 한 줌, 뭐든 상관없었다. 단 한 주먹의 무언가만 줄 수 있다면, 작디작은 그녀의 한 손에 옮겨줄 수만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괜찮았다. 처음에는 밀이었다. 어떤 이는 새알들을 모아줬다. 어떤 이는 무를 잘라 줬고, 어떤 이는 죽어있는 작은 새를 주었다. 그러다 어떤 이가 대담하게도 손바닥만 한 돌덩이를 줬다. 그런데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즐겼다. 아니, 즐겼다고 누군가 말했다. 어떤 이는 흙을 주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응했다며 자랑했다. 마을 남자 전부가 그녀를 거쳐 갔을 것이라 짐작한 부인들은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잘라내 버리고 싶다 말했다. 침 뱉는 것조차 아깝다고 했고, 마치 역병처럼 그녀를 피했다. 입에 담기도 힘든 모진 수모를 견디며 그녀는 수십 년을 살았다.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산 게 아니라 그냥 껍데기로만 늘어져 있었던 건 아닐까. 짐작조차 안 될 삶이었으리라. 그 존재 가운데서 태어난 게 콘스탄틴이다. 콩 심은 데 콩이 나야 한다는 말은 틀린 말인가. 그는 희한하리만큼 번듯하게 자라났다. 누구도 인정할 만한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부정한 존재의 자식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그가 말을 꺼냈다.


“비록 땅의 겉이 차갑기는 하지만 한 팔 만큼 파보면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땅이 우리를 배신했다기보다 성격이 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은 사람보다 훨씬 세고 큽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땅을 의도대로 바꾸긴 어려울 겁니다. 변해버린 땅을 이해해서 다르게 이용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평소에 반 뼘만큼 깊이에 씨를 뿌렸다면 이번에는 한 팔 깊이만큼 씨를 뿌려보는 건 어떨까요. 그 속에서 온기를 받은 씨앗이 자라기만 한다면 올해는 아니더라도 내년에는 그 싹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 따위 잡소리는 집어치워! 대체 누가 저런 인간을 이 모임에 참석하게 한 거죠? 우릴 먹여 살렸던 땅에 대한 정절은 내팽개치고 온갖 사내를 상대했던 네 어미처럼 천박하게 굴자는 거냐? 땅을 알아본답시고 아무렇게나 파헤쳐서 널 낳은 여자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것으로 만들자는 것이야?"


에드뉘, 행정관 헨데의 아내이다. 그녀는 콘스탄틴의 엄마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다. 그녀의 고함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어느새 토론장에 열기가 넘쳤다. 누군가 어떤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던 그들은 격렬한 미움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갑자기 땅의 배신이 부정한 존재들 때문이라고 내뱉기 시작했다. 인간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면 사고를 멈추고 천박한 감정에 휩싸여버린다. 활활 타오르는 감정의 불길 속에 이성과 품격, 예의 따위들은 모두 내던진다. 그게 자신을 연료 삼아 더 붉은빛을 띠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자연의 변덕 앞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무능을 숨기고 싶었다. 그리고 혹여 자신이 남몰래 저지른 잘못 때문에 이 땅에 저주가 내려졌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 죄의식을 감추려면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해야 했다. 같은 인간들이기에 이해될 수 있는 이 모든 안타까움이 괴악 망측하게 변하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그 청년을 비난하고 고함질렀다. 점점 수위는 높아졌다. 몇몇은 일어나 그를 당장이라도 심판대에 세우려 했다. 이 전대미문의 시련은 신실하고 성실했던 자들을 지하 끝까지 타락시켰다. 다수가 한 인간을 모함하여 얻을 수 있는 건 초라한 위안뿐이다.


“소란을 멈추시오. 지금 이 젊은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겠소. 하지만 그것이 땅의 분노를 더욱 사는 일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것이오? 설령 이 젊은이가 땅의 노여움을 잠재울 제물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모든 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섣부른 판단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은 법에 따라 다스리겠소.”


콘스탄틴을 향한 미움의 방아쇠를 당긴 에드뉘의 남편, 헨데가 황급히 나서며 소리쳤다.


“법이라니 대체 무슨 법 말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법 중에 저 젊은이를 해코지하면 처벌받는 법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발라세가 비아냥대며 소리쳤다. 마을의 마구간지기이며 몸에서 나는 악취만큼이나 행동거지도 추저분한 인물이었다. 당나귀는 마을 모두의 것이며, 행정관 한 명과 장로 한 명의 허락만 미리 얻으면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저열한 자는 남은 나귀가 다리를 절고 있다느니, 배탈이 났다느니, 귀에 염증이 도졌다느니 하면서 앓는 소리를 해댔다. 사람들은 못 이기는 척 그의 못된 심술을 받아주었다. 그래 봤자 사람들도 딱히 그에게 줄 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말로 추켜세워 주는 것뿐이었는데 효과가 있었다. 다만 그 부작용으로 나눠야 할 대화가 길어지거나, 더 큰 칭찬을 준비해야 했다.


헨데는 최후의 법을 들먹였다.


“우리 행정관과 장로들만 알고 있는 법이 있는데 그걸 알고 싶은 게요? 그 법을 알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지 정녕 모르오? 그렇다면 깨닫게 해 드려야지. 궁금한 자들만 이 자리에 남으시오. 하지만 똑똑히 알아둬야 할 겁니다. 그걸 머릿속에 새기는 순간 그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것을. 지금부터 난 열을 세겠소.”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쳤다. 물론 발라세가 가장 빨리 문을 빠져나갔다. 공간에는 행정관들과 장로들을 제외하고 두 명밖에 안 남았다. 콘스탄틴과 마을 유일의 기록관 손다나 사무엘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대부터 그들은 유일한 기록관으로서 마을의 모든 말과 행동을 그대로 옮겼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떤 자리라도 머무를 특권이 있었다. 그만큼 고단한 자리임에도 분명했다.


헨데는 가여운 젊은이를 향해 소리 질렀다.


“너는 우리가 내리는 벌이 우습단 말이냐? 어째서 이 방에서 나가지 않았지? 썩 꺼지지 못해?”


콘스탄틴은 밝지만 매서운 눈으로 대꾸했다.


“제가 지금 받는 벌보다 더 가혹한 벌이 있단 말입니까. 저 자신을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제 어머니가 모욕받고 있습니다. 이걸 어찌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행정관님은 정녕 아무렇지 않게 넘기실 수 있단 말입니까?”


헨데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담아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그의 뒷덜미를 잡은 채 문 쪽을 향하여 발로 밀어 차버렸다. 청년은 울분을 터뜨리며 자리를 떴다. 또 다른 장로인 칼 레도가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마을 주민들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부정한 몸에서 나온 저 씨앗이 정확한 원인은 아니더라도 저 자를 감싸주는 것이 마을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늘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다면 뭐든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헨데 행정관이 얘기했다시피 그건 확신할 수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저 아이가 이 마을에서 자란 지 벌써 18년입니다. 그리고 그 부정한 여자가 이곳에 머무른 지는 수십 년이 지났는데, 우리에게 닥친 이 재앙은 재작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들만이 유일한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억지가 있습니다.”


알레르 메로빙, 가장 현명한 결론을 맺는 그가 말했다.


“만일 저 사악한 것들이 몇 년 전부터 땅에 원망과 저주를 내뱉어왔고 그게 이제 와서 발휘됐다면요? 그럼 말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설령 내키지 않거나 가슴 아픈 일일지라도 다수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결단해야 합니다.”


“네, 맞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야 하지요. 아까도 보셨다시피 저 무지한 마을 주민들이 문제를 해결하길 기대하긴 어렵지요. 아까 저들의 모습은 짐승과 같습니다. 그들의 추악함과 포악성을 통제하고 가르치기 위해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생각 없이 내뱉은 의혹을 그대로 받아들여 거기에 몰두한다면 저들과 우리가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닙니까?”


장로 레도가 재차 의견을 피력했지만, 이성을 되찾은 헨데는 단호하지만 부드럽게 자신의 의지를 표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제 말은 우리에겐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무의미한 대화의 반복, 진지한 고민이나 지식은 없고 체면과 허세만 가득한 이 대화. 이들의 아버지 대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지 싶다. 이 공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사육장의 모습과 흡사했다. 냄새나는 돼지들이 그득그득 들어차 꿀꿀대며 울어댄다. 그냥 목청껏 소리 질러 짐승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나는 돼지임을 알아달라고 주장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치도록 합시다. 우리는 하나의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물론 신중해야 하겠지만요. 그러니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임무를 충분히 달성했단 말입니다. 축복받아 마땅한 거죠. 암. 그렇고 말고요. 다들 저희 집으로 가십시다. 특별히 제가 조부 때부터 물려받은 술 한 병을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에 긴장이 가득하면 졸아들어 좋은 기운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딱딱한 불안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어요. 자 어서요. 지금 이 순간이 굼뜨면 내일도 굼떠지게 마련입니다. 얼른 일어나세요.”


공교롭게도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갈 것 같은 앤소니 흄이 적극 제안했으며, 다들 못 이기는 척 일어났다.

사람은 타인의 최저 수준 이하의 행동을 보면 금수보다 못한 짓이라 말한다. 인간은 적어도 짐승보다는 낫게 살아야 함을 알고 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정도는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정확한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온당히 옮겨야 한다. 오로지 그 점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길이다. 인간은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늘 입증해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 남은 인간들은 평소에 타인의 수고로 잘 먹고 잘 잤다. 따라서 그들은 마을에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큰 책임감을 가져야 마땅하다. 돼지는 그런 책임감이 없다. 그냥 먹고 자고 퍼질러 싸고 괴팍한 소리만 지르고 때가 되면 성욕이 동해 버둥거리나 그마저 뭉개져 버리는 살덩어리 때문에 하는 둥 마는 둥. 그래도 그것들은 죽임을 당함으로써 다른 종족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살덩이라도 된다.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은 그런 역할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시끄럽기만 한 소리를 꽥꽥 질러대고 자신이 돼지임을 타인이 수긍케 하는 것들. 이들에 대한 분노가 차오르는 찰나, 인간사에 대한 회의감과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사실 저렇게 사는 방식이 옳은 게 아닐까? 어차피 인간도 하나의 동물일 뿐인데, 왜 자신이 편할 대로 살면 안 된다는 것인가. 엄밀히 따져보면 우리 모두 원초적으로 살기를 바라면서도 알량한 가르침에서 비롯된 괘씸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니까 세상이 부조리하고 고통스럽고 지저분하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그 진리를 일찍 깨달아 괴로운 거짓은 과감히 버리고 부끄러운 진실을 앞세워 살아가는 게 참된 인간 아닐까? 타인의 마음을 이용하고, 짓밟고,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눈물과 웃음을 자유자재로 써먹어 얻은 무언가로 자신감과 확신을 키워가며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타인에게는 도덕과 선량함을 잃지 말라는 것을 빼먹지 않고 강조한다. 이리 생각해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면을 벗어던질 용기가 없는 겁쟁이 거나,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바보이거나 둘 중에 하나가 아닐까?


모두가 나간 텅 빈 공간, 사무엘만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는 아직까지 돼지가 못되었거나 가면을 벗어던지지 못한 겁쟁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적어도 그는 바보는 아니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두 옮겨 적었지만,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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