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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살아갈 자격

by 고전을 마시다

나무꾼이 오늘 처음 분류 될 자를 행정관들 앞으로 데려왔다.

농사꾼 쟈빈, 그는 공손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누굴 만나던지 따스한 인사를 먼저 건넸고, 늘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씨를 가졌기에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손 내미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방 입구에서부터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양손을 몸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들어섰지만, 그리 긴장한 표정은 아니었다.


일 곱명의 사람들은 방 정가운데 놓인 꺾인 탁자에 일정 간격을 두고 앉아있었다. 오래되고 허접한 물건이긴 하나 인원들의 서열을 추측할 수 있도록 가운데 두 명 양쪽으로 각각 두 명과 세 명이 나눠 앉도록 짜였다. 행정관들의 의자에서 대여섯 발자국 떨어진 맞은편 가장자리에는 한 사람이 겨우 서 있을 공간이 있다. 영문 모른 채 불려 온 한 인간은 등진 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자신을 주목하는 다수에게 짓눌리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기록관 사무엘은 자신이라도 시선을 피해 그의 부담을 덜어주려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이 선량한 사내는 입이 바싹바싹 탔고, 등줄기를 따라 쓱 내려오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억지로 짓는 입가의 미소가 애처롭다. 당장 눈물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방 안의 모든 것이 한 인간을 억압했다.

흄은 어제와는 완벽히 다른 압도적인 말투로 쏘아붙였다.


“여기는 생과 사를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린 지금 이 상태로 단 몇 달도 버티지 못합니다. 이 마을을 위해 누군가는 거룩히 희생해야 합니다. 물론 아무에게나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지요. 살아남아야 하는, 아니 이 마을이 식량을 내어서라도 먹여 살릴 가치가 있는 사람은 가려내야 하겠지요. 쟈빈, 당신은 어떤 사람이며 마을을 위해 무슨 일을 합니까? 그리고 지금과 같은 불행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을 희생할 의향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타인의 입으로 들어갈 소중한 음식을 뺏어서라도 자신이 꾸역꾸역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보시오.”


농사꾼의 얼굴엔 당황이 역력했다. 아마 어제 먹고 마시며 상대의 말을 가볍게 흘려 들었던 자신을 떠올렸으리라. 아무리 무지렁이라도 알아차린 것이다. 이 자리가 절대 녹록한 자리가 아님을. 살기 위해 당장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예···. 저는 쟈빈이라고 합니다. 농사꾼입지요. 아···. 살면서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봤습니다. 평소 이런 생각을 해 볼 일이 없었지요.”


“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걸로 알고 당신의 살아갈 자격을 판단하도록 하겠습니다.”


쟈빈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이고르가 차갑게 대꾸했다.


“아니, 아닙니다. 이 자리가 짐작했던 거와는 달라서 놀라웠을 따름입니다. 아까 생과 사라고 말씀하셨지요? 제 나이 벌써 쉰다섯입니다. 삶이 너무나 행복해서 미련이 남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얼른 끝나버렸으면 하지도 않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삶인 탓에 저 자신에게 한 번 물어봤을 뿐입니다. 답해보고 싶습니다. 과연 내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인간인지 말입죠.”


사무엘은 십 수년간 쟈빈과 수백 아니 수천 번을 마주쳤건만 그와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없었다. 엷게 미소 지으며 모자를 벗는 게 그의 인사였기에 목소리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솔직히 이 농사꾼의 뇌가 보통 사람보다는 덜 들어차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도 몇 번이나 품었다. 그러나 오늘 그의 대답은 진솔했고 마음을 울렸다.


“제 손 주름 구석구석에는 미처 벗겨내지 못한 흙이 남아 있습니다. 손톱 밑에도 그 고운 흙이 오랫동안 자리 잡았지요. 가끔 손을 씻긴 하지만 전 손에서 흙을 말끔히 닦아낸다는 게 도리어 어색합니다. 처음 들판에 나간 건 40년 전이었을 겁니다. 지금 앞에 앉아계신 행정관님 아버님의 땅이었습죠. 그때의 기억은 촉감으로 남아있습니다.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곱디고운 흙, 애써 힘주지 않아도 바스러지는 그것들은 제 손바닥 엷은 주름들 사이로 파고들었고 그 부드러움에 기분이 참 좋았지요.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그렇게 저는 흙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대끼며 살고 있는 아내를 아끼기는 하지만 흙에 대한 제 사랑은 열렬하고 조건 없고 순수합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에게 애정을 갈구합니다.”


다소 가빴던 숨을 고르며 그는 안정을 되찾았고, 점점 더 확신에 찼다.


“남자분들이라면 다들 아실 거 아닙니까. 같이 사는 마누라에 대한 호기심은 일, 이년이면 사라진다는 것을. 그래서 제가 얘기하는 욕구가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어치의 재잘거림밖에 안 들리는 새벽에 나와 부엉이 소리가 울리는 밤까지 저는 흙을 어루만지고 때로는 속살을 파헤치고, 뭔가를 채워 넣고, 물을 주고, 보듬어 덮어주고, 날이 선선한 날이면 그 위에서 달콤한 꿈을 꾼 적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완결이라고 봅니다. 전 앞으로도 이 땅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누구보다 땅을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언제 씨를 뿌려야 할지, 얼마큼의 물이 필요할지, 어느 깊이로 땅을 파야 할지, 어떤 풀은 그대로 둬야 하고 어떤 풀은 재빨리 뽑아내야 할지, 저는 앞으로도 땅을 돌봐야 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녀가 마음을 돌리고 다시 씨앗들을 따스하게 품어 우리에게 그 자식들을 내어줄 준비가 된다면 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감싸 안고 싶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삶과 죽음의 자리라고 하셨지요? 네, 저는 살아야겠습니다. 이 땅을 사랑하기 위해서, 땅을 사랑함으로써 나오는 것들로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전 살아야겠습니다.”


싱글싱글 웃고 있던 게라드, 그는 쟈빈이 말하는 동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쟈빈의 발언이 끝나기 도 무섭게 호통쳤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 땅은 당신의 애정과 관심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의 발걸음을 귀찮아하고, 숨결만으로도 몸서리친다는 걸 모른단 말입니까. 자신의 쾌락을 위한 학대를 사랑으로 착각하는 건 아닙니까? 그녀가 당신을 외면한 지 오래입니다. 따라서 농사꾼이란 이름은 살아남을 이유가 안 됩니다. 당신 입으로 들어가는 곡식 낱알이 몇 홉이나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게 몇 마리의 닭을 먹여 살릴 수 있고, 또 그 닭은 몇 명의 생명을 살게 할지 모른단 말입니까? 가장 사랑하는 대상에게조차 버림받은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거기다 당신에게 분명히 타인을 위해 희생할 의지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쏙 빼놨군요. 평소에는 어수룩해 보이더니 보기와는 영 다르십니다. 오늘 당신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말을 한 걸로 보이는데, 전 한 가지만 기억에 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됐든 나완 상관없다. 난 오십 년 넘게 잘 먹고 잘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더 살고 싶은 욕심뿐이다. 다른 존재는 하찮은 것이다.’ 나가세요. 타인을 위할 줄 모르는 파렴치한과 더 이상 말을 나누기 거북합니다.”


쟈빈의 입은 누군가 억지로 벌린 것처럼 열렸으며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순간 다시 말하려는 듯했으나 그는 이내 입과 눈을 닫은 채 돌아섰다.


이고르가 앞에 놓인 종이에 찍하는 소리를 내며 사선을 그었다.


하루 동안 일흔 명의 사람들이 삶과 죽음의 심판대에 섰다. 대부분은 가볍게 넘겼으나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도 이렇다 할 만한 답변을 못 했다. 쟈빈에게 격렬한 분노를 표출했던 게라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우물쭈물하는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친절히 대했다. 그리고 별일 없을 거라며 그들을 타이르고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어두운 밤, 지칠 대로 지친 모두는 집을 나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부엉이조차 울지 않는 밤. 그날 희한하리만큼 어느 집에서도 말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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