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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달궈진 칼

by 고전을 마시다

새카만 입자들이 고요히 머무른 공간. '덜커덕', 쇠경첩에 맞물렸던 육중한 나무문이 방 안쪽으로 밀린다. 바깥으로부터 공기와 인형(人形)들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쿵' 하는 소리로 비밀의 방은 세상과의 단절을 고했다. 완전한 암실 속에서 감지되는 건 상대의 불길한 숨기척뿐. '탁탁' 부싯돌이 부딪치고 하나 둘 푸른색 불이 켜진다. 잠잠했던 주변 공기들이 촛불을 중심으로 조용히 소용돌이친다. 어둠을 매개 삼아 뻗어가던 빛이 열명 남짓한 사내들의 두꺼운 얼굴에 가로막혔다. 목 주변에 일정하게 둘러진 옷매무새가 그들의 지위를 표시했지만 그들이 감추려 한 야만성과 포악함, 폭력성을 가리기엔 한계가 있었다. 웬만한 여자의 허리만 한 목둘레가 두터운 가슴팍으로 이어졌고, 우악스럽고 굳은살 여기저기 박힌 손에 들린 초에서 뚝뚝 떨어지는 진한 물방울에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담대한 이들을 긴장케 하는 이가 어둠 저편에 우뚝 서있다. 모든 시선이 보이지 위협이 버틴 쪽으로 몰렸다. 사내들의 표정은 사방에 깔린 밤보다 더 어두웠다. 그들의 눈 밑은 고동색으로 짙게 물들었고, 두려움과 초조함을 띠고 있다. 양쪽의 긴장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중년남자의 맑은 목소리가 담담히 흘러나오자 조금은 경직이 풀렸다.


“난 지금 이 자리에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지체해선 안 됩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신중함으로 포장한 비겁함이요. 관조자가 아닌 적극적인 공범자입니다. 결국 우리는 심판대를 지켜보는 군중이 아닌 심판대에 직접 오르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나서야 합니다. 자 여기서 나와 뜻을 함께하지 않을 사람은 손을 드시오.”


르 뱅살, 얼굴이 창백한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단검을 뽑아 앞에 놓인 나무 탁자에 내리꽂았다. 곧이어 그의 왼쪽 뒤편에 섰던 까무잡잡한 피부 빛을 가진 남자, 먀듀가 가죽 두루마리를 끌러 박힌 칼 옆에 펼쳐 놨다. 거기에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당장 날 욕해도 좋소이다. 하지만 난 평소에 존경했던 당신들의 목에 처형의 올가미가 쓰이는 꼴을 두고 볼 순 없소. 내게 동조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내 손에 죽으시오. 나는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누구도 나서기 싫어하는 일을 할 뿐이오.”


그의 눈은 매의 눈동자보다 까맣게 차오르고 날카로웠다. 병약해 보이는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누구라도 제압할 수 있는 그의 안광은 사람들의 호흡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의 의지는 등 뒤로 이글이글 피어올랐다. 사내들은 저자에게 맞서선 승산이 없음을 단박에 깨달았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은 방패는 무엇이든 꿰뚫어야 살 수 있는 창에게 맞서기보다 그 옆에 서고 싶었다. 저마다 살고 싶다는 욕망이 합치된 결과물, 상황은 순리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니는 이단자들을 볼 때마다 난 온몸으로 전율합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부끄러운 줄 모르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장차 이 죄를 다 어찌 감당하려 하십니까. 그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이 세상이, 우리가 모래를 물처럼 마셔가며 쟁취했던 그분을 위한 영광이 유린되고 더럽혀지는 걸 묵인하고 있다니요. 내일이 될지, 어쩌면 문 밖을 나서자마자일지 모를 최후의 날, 그분을 당당히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힘차게 울려 퍼지는 북소리에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온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부터 숨을 수 있겠습니까? 낱낱이 밝혀지는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죄를 피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운명의 날은 머지않아 찾아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를 지은 우리는 참회해야 합니다. 주변 사람에게도 그 사실을 일깨워야 합니다. 개인의 깨달음은 용서받는 것에 그칠 것이지만 주변의 뉘우침을 이끄는 자는 낙원으로 들어갈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당장 천당에 발을 들이지 못할 자들이 있다면 적어도 더 이상의 죄를 짓게 놔두진 않을 겁니다. 그들은 지옥도 극락도 아닌 늪지대에서 기거하게 될 것이나, 백만 년쯤 뒤에 다시 한번 낙원에 들어갈 수 있을지 시험받을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없소.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참회의 사역자가 될 것인지 움직이는 시체가 될 것인지 둘 중 하나 반드시 선택하시오.”


외침에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뱅살 백작, 지금 당신의 분노와 사명감은 우리에게 너무 잘 와닿고 있소. 당신의 말은 우리 의지를 충분히 고양시킵니다.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에 우리 모두 동조합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얼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소. 그 선택에 따라 해야 할 행동과 뒤따르는 책임은 대체 뭐란 말이오? 당신은 우리 가슴속 의기(意氣)를 거의 다 채웠소. 이제 단 몇 마디로 그것을 흘러넘치게 만들어 주시오. 당신의 말대로 우리는 이미 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이 오시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소. 그 정도도 안 된 인간들로 우리를 우습게 만들지는 마시오. 우리는 참된 사역자요. 당신과 생각이 다르지 않다 그 말이오. 다만 뭘 어떻게 할 것인지는 알아야 될 것 아니오?”


“그릇 안에 출렁출렁 찬 정화수, 그 위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꿀과 한 방울의 독,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끝나자마자였는지, 아니면 말이 이어지는 도중이었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행동은 번개처럼 번쩍였고, 단말마의 비명은 천둥처럼 뒤따랐다. 바통 남작 목에서 솟구치는 피를 보고 나서야 남자들은 탁자의 칼이 남작의 동맥에 깊숙이 꽂혔다 빠져나왔음을 알았다. 백작의 창백한 얼굴 반쪽은 피로 뒤 덥혔다. 새하얀 반쪽 얼굴에는 눈물이 흘렀고, 핏빛의 반쪽에서는 악귀가 흘러내렸다.


“진리를 따르는데 옳고 그름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아마 그분께서 '나를 따르겠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예'라고 답하실 겁니다. 그럼 '그걸 증명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해야 만족하나이까?' 라며 반문부터 하실 겁니까? 내 왼팔을 바치라고 하시면 어쩌지? 내 전재산을 내놓으라 하면 내 아내와 자식들의 몫까지 포함되는 것인가? 맹목적인 사랑이라고 외치고 싶긴 한데 내가 내놓을 수 없는 걸 달라고 하시면 어쩌지?라고 고민하실 겁니까? 그리하고도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건 거짓입니다. 기망입니다.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자의 임기응변입니다. 지금 당장 이 쏟아지는 피로 맹세의 서약을 하세요. 진리를 따르겠노라고, 사랑을 증명하겠노라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축복만 내리실 수 있도록 준비해 놓겠노라고.”


그는 남작의 머리를 잡고 오금을 발로 밟아 그를 무릎 꿇렸다. 그리고 목에서 솟구치는 피를 손가락에 묻혀 가죽 두루마리에 쓰인 자기 이름 아래에 표시했다.


“다시 문이 열렸다가 닫히면, 그 뒤에 산자는 없을 것입니다.”


라 매도를 선두로 하여 모든 이들은 앞 다투어 억지로 세워진 남자의 목을 쓸고 나가 각자 이름에 표시했다. 어떤 이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남작의 피를 묻히기 위해 손가락으로 상처를 헤집어댔다. 가죽 두루마리에 피로 표시한 사람들은 모두 아홉 명, 그 방안에는 열두 명의 사람이 있었지만, 붉은 인주를 제공한 남작의 이름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고 나머지 두 명의 이름은 애초에 적혀있지 않았다.


“내 어린 시절 열병에 걸렸을 때 바통 남작이 소중한 얼음으로 날 살린 적이 있소. 그 감사함을 어찌 잊을 수 있겠소. 남작은 비록 우리와 함께 낙원으로 갈 순 없어도 백만 년 뒤에 다시금 선택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가 당장 유황불에 떨어지지 않도록 돕는 것뿐이오.”


그들의 숨소리는 낮게 깔렸다. 부릅뜬 눈 속에는 사자도 뒷걸음치게 할 의지가 실려 있다. 죽음이나 고통, 두려움, 연민, 온정, 망설임, 번민 따위는 전혀 없는 그런 눈빛. 그 누구도 그 빛을 깜빡이지 않았다.


“오늘 의회는 이 도시에서 이교도들과 우리가 공존할 수 있다는 법을 승인했습니다. 이 도시의 원칙에 따라 우린 그걸 받아들이고 이교도들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합니다. 같은 수로에 입을 대 물을 마셔야 하고 즐거움과 신실함을 함께 나눠야 합니다.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법보다 그분을 향한 진리가 우선 해야 합니다. 이 도시에서 그 이단을 허용한 자들을 남김없이 교화시켜야 합니다. 이 도시가 세상 곳곳에서 퍼지는 악에 맞서기 위한 성소가 될 것을 선언합니다. 악을 정화합시다. 악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간악한 것들은 심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달궈진 칼로 그들의 심장으로 찔러 악을 멸해야 합니다. 새벽닭이 울리기 전까지 일을 끝마칩시다.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걸 하루라도 앞당기는 게 이로울 것입니다. 그대들은 세 패로 나뉘어 짜인 지시에 따르도록 하시오.”


그의 오른편 뒤쪽에 서있던 남자가 다시 세 개의 두루마리를 자루에서 꺼내 들었다. 하나는 비시 가(家)에게, 하나는 클레 가(家)에게, 마지막은 라 매도의 무리에게 전달됐다.


“명심하시오. 그 두루마리에 적힌 일을 반드시 순서대로 해내야 하오. 우선 각자 집으로 돌아가 사내들을 최대한 모은 뒤 기다리시오. 곧 사람을 보내겠소.”


마침내 잠겼던 문은 열렸고, 죽은 자만 홀로 남겨졌다.


비시 가의 가주(家主)는 집에 오자마자 집사에게 집안 내 하인, 그리고 농장에서 일하는 가문 소속의 남자들을 신속히 부르라 명령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아들과 함께 두루마리를 펼쳐보았다.


'남자들은 신발을 벗고 단검만 든 채 동문으로 가서 수비병들을 몰살시킬 것. 참나무 언덕에 불길이 솟으면, 곧장 병영으로 달려가 그곳을 차지할 것. 지체 없이 장검을 지니고 군마(軍馬)에 올라타 참나무 언덕으로 돌진해 올 것.'


또렷이 적힌 ‘참나무 언덕’을 보고 두 남자는 서로를 잠시 쳐다보았다. 둘 다 충격과 두려움을 느꼈다. 사내들은 집안으로 속속들이 들어왔고 어느새 서른 명 남짓이 모였다. 그들은 단검만 움켜쥐고 신발을 벗었다. 조금이라도 소리가 날 만한 것들은 모두 집안에 두고 날쌔게 동문으로 떠났다. 사내들은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지만 자신들을 오랜 기간 돌봐준 가문의 명령을 기꺼이 따랐다.


백작은 따르는 이 대여섯을 데리고 집안의 문을 요란스럽게 열어젖혔다. 잠들지 않았던 몸종 몇은 한 손에는 횃불을 또 다른 손에는 붉게 달궈진 칼을 들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경악했다. 백작은 망설임 없이 서재로 들어갔다. 나이 든 남자는 벽난로 옆에 서서 들어오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는 말을 나누지 않았다.


백작은 얼마 뒤 서재에서 나와 소리쳤다.


“유모, 여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바통 남작 집으로 피신하시오. 서둘러야 합니다. 마듀는 모든 남자들을 데리고 앞문으로 집결하라.”


어느새 화염은 구덩이에서 기어오르는 악마처럼 뾰족한 손을 위로 뻗치고 옆으로는 긴 다리를 쭉 뻗었다. 아수라장이 되었음에도 백작의 지시를 받은 두 사람은 침착하게 움직였다. 불길이 치솟기 얼마 전, 세 개의 각 성문으로 향한 세 패거리들은 막상 목적지에 다다르니 두려움에 몸을 움직이기 주저했다. 그러나 백작으로부터 행동의 개시를 알리러 온 전령이 그들을 공포로부터 해소시켰다. 거사에 관한 회합이 있기도 전에 동문과 서문, 남문의 수비병들에게 백작은 저녁식사를 보냈는데, 그걸 먹은 병사들은 약에 취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거라 하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용하고 은밀히 접근하여 철제 투구 안으로 단검을 과감히 찔러 넣으라며 방법까지 친절히 가르쳐주었다. 모든 이들은 용기를 내 행동을 개시했다. 구원자의 음성대로 대부분은 인사불성 상태였기에 손쉽게 처리했으나 비교적 멀쩡한 몇몇이 애를 먹였다. 맨발의 남자들도 피를 흘리지 않을 순 없었다. 그들의 발바닥에 뜨끈하고 진득한 것들이 쩍쩍 들러붙었다. 드디어 우뚝 솟은 언덕 저택의 꼭대기까지 붉은 거인이 올라섰다. 피 묻은 자들은 이제 이 성은 저 악마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 직감했다. 그러나 누구도 절규하지 않았다.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가문의 수장들은 성 중턱에 위치한 병영으로 사내들을 몰아쳤다. 그곳을 지키는 병사는 적었고, 세 갈래에서 올라온 남자들은 많았다. 짧은 비명소리는 이내 한 곳으로 향하는 둔중한 말발굽 소리로 뒤바뀌었다.


한편 백작과 마듀, 그리고 집안의 남자들은 저택 초입의 문에 늘어섰다. 부닥치는 철갑들이 어둠 속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나타난 이들은 철투구의 마스크를 들어 올렸다.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중 한 명이 서너 걸음 더 나섰다. 백작도 거기에 응해 그에게 나아갔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공작께서는 무사하신 겁니까?”


성의 수비대장은 전장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적과 아군을 구별하고 선수(先手)를 쳐야 하는 상황을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그는 지금 성내에서는 말을 몰 수 없단 규율을 지킨 것이 큰 실수라고 확신했다.


“폭도가 잠입했네. 여기 있는 우리가 그들을 처리했으니 그대들은 안심하고 병영으로 돌아가게.”


백작은 침착하게 명령했다. 왼손을 들어 검지에 낀 반지를 내비쳤다. 그것은 가문의 수장을 의미하여, 성내 모든 병사들을 지휘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 인장의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더욱 그것이 어떻게 백작님의 손에 들어갔는지가 중요합니다.”


처형당할 정도의 불손한 행동임을 잘 알지만 그는 검에 손을 갖다 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늦었단 걸 전장의 경험이 말하고 있었다. 그는 옳았다. 불길을 등진 이들의 행동은 재빨랐다. 그들은 팔을 들어 무언가를 치켜들었다 아래로 힘차게 내리쳤다. 땅바닥에 부딪치는 마찰음 대신 부웅부웅 매섭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병사들 귀에 꽂혔다. 가까이 다가와 대화를 시도했던 남자는 정면으로 그것을 받아내 절명했다. 잘 갈려진 양날 도끼가 여기저기서 날아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병사들은 뒤죽박죽 질서를 잃어가면서도 잘 훈련된 자들답게 방패를 앞세우고 스르륵스르륵 칼을 꺼내 들었다. 무장한 병사들은 견고한 방진으로 전열을 가다듬고, 눈앞에 적을 해치워야 한다는 목적 말고는 다른 생각은 지운채 안정적으로 나아갔다. 바로 그때, 대적할 수 없는 굉음들이 뒤쪽에서 들이닥쳤다. 외길이긴 했으나 좌우로 탁 트인 완만한 오르막은 잠시나마 정신을 차렸던 이들을 가르고 짓밟았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 우릴 막을 것은 없다. 어서 빨리 이곳의 신성함을 회복하자. 한 손에는 횃불을, 한 손에는 검을 들어라.”

백작 뒤편의 남자가 어느새 다시 두루마리를 펼쳐 사람들에게 향할 장소를 일일이 설명했다. 제자리 구르는 말발굽 때문인지,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살욕(殺慾) 때문인지, 그들은 이제 어떤 말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냥 인간을 도륙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을 뿐, '누구를?', '왜?"는 아무래도 좋았다. 폭발하는 기운에 고삐를 내키는 대로 거칠게 잡아챘다. 마구마구 뛰쳐나갔다. 몇 시간 뒤, 성스러운 장소로 변했어야 할 도시는 지옥의 절규로 가득 찼다. 말발굽 아래 무언가 짓이겨지는 소리에 비명은 나오다 그쳤다. 칼에 베이는 고통은 아주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불에 달궈진 칼이 몸속으로 파고들 때는 찔리는 고통보다 몸속 장기들이 타들어 가며 무뎌진 칼의 둔탁함을 온전히 느껴야 했다. 고통받는 인간은 빨리 죽기만을 바랐으나 불행히도 목숨은 질겼고, 정화를 실현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임무로 마음이 조급했다. 그들이 어설프게 찔러 제대로 죽지 못한 대상들의 울부짖음은 세상을 더욱 사납게 만들었다. 고귀한 목적은 사라졌다. 당초 대상이었던 자는 칠십 명, 가족들이나 하인, 따르는 이들을 모두 합하여도 오백 명이 되지 않을 터인데 아홉 명과 그들을 따르던 백오십여 명은 그날 동이 틀 때까지 너무도 많은 사람을 죽였다. 태양이 떠오르자 지옥에서 악을 실행하고 있는 그들 자신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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