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뇽에는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법이 있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법을 외우고 있어야 했다.
어떤 조항이 됐건 간에 위반할 경우 반드시 거기에 걸맞은 벌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들이 말귀를 알아들을 때부터 그것을 잊지 않도록 무섭게 주입시켰다.
한 세대가 그 법을 배웠고, 그들이 기억하는 것이 그다음 자식에게 전해졌을 무렵,
그건 더 이상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고 주민들을 보호하며, 공정과 정의를 보장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 법이 어떤 배경으로 만들어졌으며, 왜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도 사라졌다.
그들 마음에는 오로지 법을 위배한 자에게 처해지는 가혹한 벌에 관한 두려움만 깊이 새겨지면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법이라기보다 위험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지침서처럼 남아있었다.
사람들을 인도할 유일한 길잡이는 흐릿한 공포만을 등에 업고 자신의 민낯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 저항 못할 기운에 짓눌린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마음 졸이며 쫓아갈 뿐이었다.
깊은 숲 속 알려지지 않은 마을,
태고의 기운이 사납게 뻗쳐 어둠과 음산함이 넘치는 그곳에 그들만이 터를 잡았다.
마을은 누구도 찾지 못할 곳이라기보다 아무도 찾지 않을 곳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한낮의 햇살마저도 허락된 일부에만 얌전히 들어가는 이 숲은, 안으로 몇 발짝 들이기에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하물며 사흘 밤낮을 꼬박 걸어야지만 도착할 수 있는 마을에 가려면, 아주 먼 옛날, 용을 죽이고 반지를 차지한 영웅의 담력을 빌려야만 했다.
낮에는 그나마 몸을 숨긴 짐승들의 울부짖음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칠흑 같은 밤이 찾아오면 공중에 또렷이 박힌 수십 개의 주황 점들이 가만가만 숨을 내쉬며 사락사락 다가오다 멈췄다. 그 공포는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도끼나 칼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무찌를 수 없다. 거기다 육중하고 거친 바위들은 평소 땅속에서 잠자코 있다가 침입자의 발걸음에 반응한 거인들처럼 우뚝 솟아났다. 그 위에 뒤덮인 축축한 이끼는 내딛는 발걸음을 미끄러지게 하여 불청객의 턱이나 코를 으스러뜨리기 충분했다. 거꾸로 꽂아둔 기병창처럼 하늘을 찌르는 나무들은 무수히 늘어져 성벽 역할을 했다. 이것들은 매우 심보가 고약한데, 일부러 공간을 군데군데 비워 둠으로써 희생양을 더 깊숙한 곳으로 꾀어냈기 때문이다. 먼 옛날 황소 머리를 한 괴물의 고른 치아에 되새김질당한 미궁 속 제물들처럼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이들을 말이다.
지금은 몇 남지 않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고대의 존재들을 쇳덩이로 쪼개고, 불로 태우고, 땅 속 뿌리까지 파내어 평평한 터를 세웠다. 그 질기고 무시무시한 것들을 어떻게 퇴치했는지 일일이 설명하긴 어렵다. 아마도 무엇이든 아낌없이 희생하고 물샐틈없이 일치단결 했으리라.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을 사람은 서로를 깊게 신뢰하고 의지했다. 삶과 죽음, 즐거움과 슬픔을 통틀어 함께했다. 갓 태어난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면 며칠 내 가장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운명했다. 이 기막힐 정도의 우연은 마을의 총인원을 늘 칠백 칠십 명으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먹을 것도 잘 곳도 균형을 이뤘다. 그들은 겨우 부쳐 먹을 손바닥 만한 땅을 갖고 있었다. 경작지를 개간하기 위해 소만큼 든든한 우군도 없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 덩치를 이곳까지 산채로 데려오기란 불가능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그들은 초라한 늙다리 당나귀를 부려 좁은 흙만을 일굴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은 만족했다.
시작이 어딘 지 모를 지류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 군데군데로 흘러내렸기에 목마를 일은 없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혹여 호기심에 멀리까지 이어진 물줄기를 따라갈까 염려했기에 무서운 이야기를 지어냈다. 이 물은 산 정상에 겨우 머리만 내놓은 외눈박이 괴물이 배고픔에 흘리는 눈물이라고 진지하게 알려줬다. 그리고 가까이 가면 당연하게도 조금은 자유로운 거대한 팔이 사람을 덥석 집어 들어 한입에 잡아먹을 것이라고 겁박했다. 그렇게 되면 괴물의 눈물은 잠시 멈추겠지만 아이를 잃은 부모의 눈에서는 핏물이 흐를 거란 말도 실감 나게 덧붙였다.
마을에는 구백 마리의 닭이 있었으며, 오십 마리의 돼지가 있었고, 스무 마리의 당나귀가 있었다.
이 짐승들은 마을이 가진 전재산이었으며, 이것은 마을이 확실히 뒤틀리기 바로 두 해 전의 집계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이 시험에 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외부 사람들과 접촉은 피해야 할 문제였다. 거기다 일부러 이리 으슥한 곳에 숨어 살게 된 이상 외부 마을과의 정기적인 교류도 우스운 일이었다. 어차피 가장 가까운 이웃마을이라 해봤자 질리도록 빽빽한 전나무와 가문비나무들을 밤낮으로 따돌려야지만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예 왕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을에 필요한 물품은 대부분 직접 만들었지만 전문 장인이나 장비가 필요한 것들은 밖에서 들여와야 했다. 이 년 내지 삼 년에 딱 한 번, 동물 가죽을 지닌 몇몇은 동쪽 마을과 서쪽 마을을 번갈아 다녀왔다. 옷을 만드는 데 사용할 천 쪼가리와 재봉도구, 한 뼘을 조금 웃도는 칼이나 나무 할 손도끼, 추수용 낫, 땅을 파낼 곡괭이 같은 철물, 그리고 때때로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종이와 잉크, 펜촉, 아니면 햇볕을 피해 집안에 머무는 안주인들의 환심을 살 작은 물건들이 슬며시 들어왔다. 숲 밖으로 나간 이들에게는 마을에 대한 비밀을 지켜야 하는 무거운 임무도 함께 부여됐다.
열다섯 살이 넘은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역할을 가졌다.
다만, 자신의 능력이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주어진 업에 종사해야 했다. 겨우 먹고사는 수준인 마을이기에 일의 종류가 극히 한정적인 탓이다. 직업은 간단하게 분류된다.
우선 가장 많은 인원이 밀농사를 짓는다.
그들은 이른 봄부터 토양을 갈아엎었다. 아무리 험한 곳이어도 봄은 땅에 발붙이며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사람 역시 이때 가장 생동한다. 그들은 맨발로 흙을 밟아댔다. 조악한 신발에 대한 착용감도 문제긴 했지만,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땅이 드디어 마음을 연다는 기쁨을 촉감으로 만끽하기 위해서였다. 그다음 작년부터 꾸준히 모아 햇볕에 적당히 말려 독기를 뺀 분뇨들을 잘게 부수어 거름으로 주었다. 그 누구도 자신이 배출한 이 냄새나는 것들이 우리 입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인간이 땅 속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듯, 우리 몸속에 있던 것도 토양의 일부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초여름이 되면 그들은 씨앗을 뿌렸는데, 참으로 유별나게 굴었다. 그 작은 종자들이 모두 친자식이라도 되는 양 무릎을 꿇고 세심하게 심었다. 모든 과정은 맨손으로 이뤄졌으며,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일정한 간격을 엄격히 지켰다. 혹여 너무 얕으면 밤새 얼어 죽을까 봐, 두껍거나 무거운 돌 부스러기라도 섞여있으면 숨 막혀 죽을까 봐 마음 쓰고 애를 태워댔다. 안개가 늘 끼어있어 수분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들은 여름 내내 잡초를 뽑고, 물을 길어다가 흩뿌렸다. 노릇노릇한 이삭이 열리고 황금빛 물결이 잔잔한 바람에 춤추면 그보다 더 감격스러운 장면은 없었다. 변덕스러운 비바람에 대가 휘어지지 않도록 돌보는 것 역시 파종을 한 어버이가 맡았다. 추수는 낫을 잘 다루는 남정네들을 따로 뽑아 한날한시에 해치웠는데, 아마도 돌본 사람에 따라 수확량이 다른 것에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최대한 뿌리에 가깝게 잘라낸 대에서 낟알을 털어냈다. 그리고 남은 짚은 한 데 모아 당나귀의 사료로 주거나 푹신한 침구로 썼다. 어디 그뿐인가, 밀기울은 돼지나 닭의 먹이가 되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태양과 땅, 그리고 물과 함께 힘을 합하여 이뤄낸 결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 작은 것이 쑥쑥 자라는 광경을 본 인간들은 자연과 그것을 창조한 존재에게 커다란 경이로움을 가졌다. 따라서 가장 신실한 자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중간중간 빈 땅을 활용하여 순무와 당근, 양배추를 재배했고, 겨울에는 담비나 토끼, 눈먼 부엉이 같은 동물들을 사냥했다.
다음은 닭을 기르는 사람들이 있다.
닭은 꽤 많았기에 집집마다 한편에 공간을 마련하여 나눠 길렀다. 그들은 가장 먼저 닭장에 들어가 새벽에 낳은 달걀을 행정관에게로 가져갔다. 두 명의 행정관은 각각 그것들을 세어보고 수가 일치하면 다섯 명의 장로들에게 넘겼다. 다섯 명은 일일이 달걀을 들어보고 색깔을 면밀히 관찰했다. 여느 것보다 묵직하거나 빛깔이 고르고 고운 것들은 따로 골라내 병아리로 부화하도록 사람들에게 도로 배분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몇 개를 누구에게 내려주었는지 기록해 나중에 깨어난 것들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확인했다. 그 검산과정은 자신들이 분류한 기준이 합리적이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미닭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나머지는 다시 행정관에게 보내졌고 그 최고 권력자들은 정당한 셈법을 거쳐 달걀을 온 마을 사람들에게 배급했다. 주민들은 받은 것을 곧바로 깨 날것으로 흡입했다. 비릿한 맛이 나긴 했지만 그 상태가 가장 영양가가 풍부한 것이라 믿었기에 반드시 그렇게 먹었다. 다시 닭을 돌보는 사람들의 일과를 살펴보자면 그들은 하루 한 번 밀을 빻고 남은 찌꺼기나 채소 따위들을 잘게 썰어 뿌렸다. 그러면 모든 닭은 정신이 팔려 사람 손에서 뭐가 떨어지는지 분간도 하지 않고 달라붙어 쪼아댄다. 그때야 비로소 이들의 진짜 일과가 시작된다. 닭은 온종일 푸드덕 날갯짓을 해대가며 다리를 바삐 움직인다. 인간이 던져 준 먹이 말고도 땅바닥에 기어 다니는 벌레나 지렁이를 찾기 위해 분주한 것이다. 꼬꼬꼬 하는 소심한 놈도 있고 꼬끼오하며 목청을 뽐내는 녀석도 있다. 이들은 아직 이 닭장에서 자리를 차지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반면, 한 자리만 차지한 채 그 흔한 울음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놈들이 있다. 돌보는 이는 그 닭 옆으로 가 유심히 그놈의 눈을 살펴본다. 보통 닭의 눈알은 짙은 주황 바탕에 검은 동그라미가 가운데 박혀있다. 그러나 울지 않는 닭은 회색 암막이 덧씌워져 색깔과 경계가 흐리다. 거기에 푸석푸석한 털들이 듬성듬성 한 움큼씩 빠져있다면 더는 고민거리도 아녔다. 그놈의 볼품없는 날개 죽지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나와 행정관에게 가져갔다. 그리고 행정관이 신중한 숙고 끝에 처분 결정을 내리면 닭은 순식간에 목이 비틀어지고 끓는 물에 들어가 털이 몽땅 뽑힌다. 다리 한쪽은 그걸 골라낸 사람의 몫으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정오의 수프’를 끓이는 데 사용됐다. 그래서 닭장에서 처량한 놈을 움켜쥐고 나오는 사람은 자신에게 떨어질 닭다리를 상상하며 건강한 잇몸을 드러내 활짝 웃는다. 하지만 신중해야 한다. 행정관의 거절판정이 내려지면 핀잔을 들어야 했고, 너무 많은 닭을 꺼냈다간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밀농사를 짓는 사람만은 못하지만 닭을 기르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마을에 톡톡히 기여한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고, 때때로 얻을 행운이 있었기에 나름 만족하며 살았다.
그리고 돼지를 돌보는 사람이 있다.
돼지는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공동사육장에서만 기른다. 마을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므로 다섯 마리당 한 사람이 맞붙어 키우는데, 그러다 돼지가 새끼라도 밴다면 한 명의 밀 농사꾼이 보충되어 배정된다. 돼지는 매우 깨끗한 동물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기 집안은 청소하지 않을지언정 돼지우리는 매일 쓸고 문질러 댔다. 사방을 열어놔 신선한 공기가 통하도록 했으며 썩은 낙엽이나 지푸라기들은 재까닥재까닥 갈았다. 먹이는 하루에 두 번 음식찌꺼기나 겨, 채소 부스러기들을 모아줬다. 그것들은 씹을 수 있는 것은 무엇도 마다하지 하지 않고 던져 주는 대로 삼켰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론 콧구멍에 쑤셔 넣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하튼 그것들이 킁킁대기만 하면 뭐든지 삽시간에 사라졌다. 추운 겨울 얼어 죽은 쥐를 던져줘도 여름내 울다 지쳐 땅바닥에 떨어진 매미를 던져줘도 좋아했다. 별미를 줘서 고맙다며 꿀꿀거리는 소리가 유독 정겹게 들린다. 돼지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동물이다. 그렇기에 사육사들은 진심 어린 애정을 갖고 헌신했다. 돼지들이 근심걱정 없이 하루를 편히 보내기만을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평온함은 따뜻하다. 따뜻한 건 부풀려진다. 결국 돼지가 평온함을 가져 살이 뒤룩뒤룩 찌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다만 그들은 도축은 직접 하지 않는다. 정으로 돌본 돼지를 직접 찔러 죽이는 것까지 맡겨버리는 건 도저히 인간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최후의 순간 돼지의 마음에 배신감이 끼어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배신감은 차갑다. 차가운 건 금세 딱딱해지고 수축된다. 그렇게 되면 애써 부풀려놓은 고기가 줄어들어 버릴게 분명했다. 때문에 자신의 돼지가 잡히는 날이면 사육사는 집밖으로 나오는 것이 금지됐다. 도축행위는 경건한 의식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두 명의 행정관은 번갈아가며 몇 명의 도살자들과 짝을 이뤄 사체를 해체한다. 그리고 그 수고로움을 인정받아 누구보다 가장 많은 고기를 가져간다. 돼지를 직접 잡지 않은 행정관도 과정을 감시한 노고가 있기에 다음으로 많은 고기를 가져간다. 나머지는 관대한 행정관이 가정마다 손수 방문하여 나눠줬다.
그다음은 목수이다.
목수는 마을의 집이나 집기, 농기구, 창고, 가축우리같이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제작하고 수리한다.
세 집안이 이 일을 도맡아 하는데, 온 집안 식구들이 함께 일했다.
제사장은 한 달에 한 번 행사를 주관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을 제공하며, 그들의 성실함과 진실함이 충분히 보답받고 있음을 일깨운다.
또 빵을 만들고 수프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한꺼번에 빵을 굽고, 수프를 끓여낸다.
야경꾼이 있다. 야경꾼들은 행여 있을 들짐승들의 습격을 방지하려 순찰을 돌고, 치안을 책임진다.
법을 어긴 이가 있다면 판결은 위정자들이 내렸고, 실질적인 집행은 이들 몫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 마을 유일의 종 치는 사람, 당나귀 전용 마구간지기, 나무꾼, 그리고 높으신 분들의 집안일을 하는 하인들이 있다. 마을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뽑혔다.
행정관과 장로 직책은 아버지 세대부터 아들에게 세습됐다. 아무래도 집안의 가풍에서 비롯된 덕목들을 무시할 수 없고, 교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소한 공백을 피할 수 있어서이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두 명의 행정관이 서로 상의하여 해결했으며, 다섯 명의 장로가 그들의 판단을 도왔다. 하지만 마을은 대체로 평화로웠기 때문에 딱히 그들이 나설만한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윗사람들의 헌신에 늘 감사했다. 대를 잇는 직업에는 기록관도 포함되는데, 지금은 유일한 단 한 명이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어떤 일이든 적어댔다.
이 밖에도 대여섯 가지의 직업이 더 있었으나 더러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고, 나머지는 없어선 안 될 것이었다.
이른 아침 작은 종이 경박스럽게 일곱 번 울려대면, 모든 이들은 지체 없이 집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소리 높여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인사를 나눔으로써 여러 사람의 눈도장을 얻었다. 공동 경작과 사육이었지만 누구 하나 성실히 움직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게으른 자로 판명되면 그 가족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일주일에 빵 한 조각으로 버티는 걸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각자 일터로 가 맡은 일을 묵묵히 해냈다. 햇볕이 정수리에 곧장 내려 쬐면 종은 다시 세 번 울린다. 이때 모든 이들은 마을 회관 안과 밖에 모여 수프와 빵을 받았다. 수프는 닭뼈로 우려낸 육수에 이것저것 넣어 삶은 것으로 반 덩이의 빵을 잘게 찢어 숟가락 대신 퍼먹었다. 운이 좋으면 고기 같이 쫀득쫀득한 것도 씹혔다. 어떤 이는 받았던 날계란을 준비해 와 풀어먹기도 했다. 이 행동은 타인의 한심하단 시선을 받는 행위였지만 시비가 일지는 않았다. 이 정오의 성찬은 사람들의 체온을 유지하고 피를 원활히 돌게 만들었다. 포만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지만 단 하루도 거른 날은 없었다. 이후 해가 져 깜깜해질 때까지 모두는 맡은 일에 눈을 떼지 않았다. 숲의 밤은 길고 위험했다. 따라서 그들은 가족들과 집안에서 머무를 시간이 많다. 쟁여놓은 고기가 있으면 함께 삶아 먹으며 낮에 있었던 일에 관해 두런두런 이야기했다. 이 딱하고 순박한 사람들은 고유의 일 말고도 마을에 필요한 공동 작업에 종종 동원됐고, 짐승 사육자들은 밤에도 간간이 나와 봐야 할 경우가 있었기에 늘 고되고 지쳤다. 그나마 모두가 마음 편히 엉덩이 붙일 시간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집회뿐이었다.
마을사람들은 하루에 한 끼는 반드시 모여 먹었고, 저녁은 여분의 식재료가 있는 경우 가족끼리 알아서 해결했다. 그들의 주식은 밀이었는데 땅도 거칠고 워낙 서늘한 공기가 맴도는 지형이었기에 수확량이 얼마 되지 않았다. 겨울과 봄에 아껴먹고 이듬해 씨를 뿌리면 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추위가 가시는 절기에는 숲으로 가 무엇이 됐든지 간에 캐거나 잡아야 했다. 삼대를 이어 해마다 사냥과 채집이 이루어진 탓에 근방에선 더 이상 먹을 만한 것을 쉽사리 찾기 어려웠다. 그나마 삼 개월에 한 번 사람들의 원기회복을 위한 돼지고기가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당나귀는 늙어 죽을 때까지 부림을 당하다, 침을 질질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순간 잡아먹혔다. 한 짐승에게는 비참한 불행이었지만 온 주민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내려온 날이었다.
모든 집은 나무, 돌, 짚으로 지은 오두막이었다. 나무로 지어졌기에 집안에서는 작은 화덕에만 조심스레 불을 피웠다. 마을의 한가운데는 공동 작업을 위한 마을회관, 모임용 강당, 돼지우리, 마구간이 자리 잡았다. 북쪽 언덕비탈에는 큰 오두막 일곱 채가 남쪽을 향하고 있다. 그 언덕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에는 사람들이 사는 고만고만한 크기의 집들이 뺑 둘러져있다.
엉성하지만 나름 짜인 규칙 속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구성원들이 있었기에 마을에 큰 이변은 없었다. 그들은 신실하여 자신들을 다스리는 소수의 가르침에 순종적이었으며, 다수를 위한 희생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순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운명이라 굳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