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잠이 깼다. 어깨 통증이 심하여 왼팔을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1초 간격으로 이어졌다. 앉았다 눕기를 반복했다. 응급차를 부를까, 하다가 여자 혼자였으므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아침이 되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반 정거장 거리에 있는 정형외과를 찾았다. 오른손으로 왼팔을 유리그릇처럼 붙잡고 움직였다. 엑스레이 찍기를 기다리는 20여 분이 마치 두 시간 이상으로 느껴졌다. 진단은 간단했다.
“석회 건염입니다.”
통증에 비해 의사는 건조하게 말했다. 어떤 위로도 없었다. 석회란 일반 정형외과에서는 진통주사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할 때였으므로,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통증이 멎게 해 주세요.”
애걸하다시피 부탁했다.
“급하시면 MRI를 찍어야 합니다.”
“MRI를요?”
내가 망설이니, 의사가 일단 지켜보자며, 통증 완화를 위해 주사와 약제를 처방했다.
“내일까지 주사와 약으로 견뎌보시고, 모레 오전에 다시 봅시다.”
30분 후, 주사 덕분에 숨을 돌렸다. 진통제 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통증이 시작될 것이지만, 살 것 같았다. 힘든 일이 있으나 좋은 일이 있으나 가장 먼저 생각나는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신이 왔다.
“이제 다 AS 할 것뿐이야.”
문자 수신과 동시에 앞으로 20년이 안 되어 몸을 요양원에 의탁해야 할 수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14년 차 원장으로 요양원을 섬겼다. 그중 10년은 (친) 어머니와 함께한 세월이었다. 어머니는 2년 전에 코로나19에 걸려 별세했다. 차제에 어머니의 10년의 요양살이를 돌아보았다. 약 80퍼센트의 다른 이들처럼 어머니도 상세 불명의 알츠하이머를 진단받고 요양살이를 시작했다. 빗길에 넘어져서 갈비뼈 골절이 있었다. 낙상 사실을 잊었다. 며칠 후 실신하여 입원 치료 중에 갈비뼈 네 개의 골절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혼란이 극심한 섬망이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어머니도 요양원에서 혼란과 불안과 상실감, 분노, 슬픔, 의심, 좌절 등 알츠하이머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점차로 요양원이 집이 되었다. 홀로 집에 있을 때보다 안정적이었다. 혼자보다는 공동체에 함께 있는 것에 안심했다. 더 평안을 누렸다. 점차로 벗들을 의지하고 우애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모든 것을 기억해 주며 자녀들보다 더 많이 어머니의 삶을 듣고 보아서 알고 도와주는 종사자들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다. 그래서 확신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기억은 행복일 것이라고.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 대니얼 커너먼이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마지막 기억을 가장 중요시한다.”
“아무리 전반기 인생을 잘 살았다고 하더라도 끝이 좋지 않다면 그 사람의 삶은 좋지 않게 기억될 뿐이다.”
그렇다면 현재 부모님들이 살고 있고, 한 세대 후에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찾아가야 하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은 어떤 곳인가? 여러분이 마지막을 살아야 할 요양살이는 어떤 것일까? 꼭 치매가 아니라도 한 세대 후에 여러분은 요양살이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 건강관리를 덜 했다면 더 빨리 요양살이를 시작할 수도 있다. 건강이 모자랄 때 시작하는 삶이 요양살이니까.
이 연재의 글, 《망각에도 색깔이 있다》는 대한민국 우리나라의 요양살이를 수채화처럼 잘 보여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차제에 작가는 이 글이 요양살이를 소개하는 정도의 글이 아니길 염원한다. 그래서 기억상실, 언어장애,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 상실, 판단력과 사고능력 저하, 일상 수행 능력 상실, 정신행동 장애와 성격 변화 등등 주인공들의 일상을 그림으로 그리듯이 배열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여러분은 언뜻언뜻 보이는 주인공들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그 인생의 색깔을 보게 될 것이다. 단지 여러분보다 한 세대, 혹은 몇 년 더 인생을 향유하였을 뿐이나 담을 넘어온 ‘그것’으로 인해 자투리 여생을 살되, 거기에는 아름다운 색깔이 무지갯빛으로 펄럭이니까. 하여 여러분은 잠시 호흡을 멈출 것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볼 것이다. 인생의 옷깃을 여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