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화인가? 은총인가? 연륜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손님인가?
노화에 의해 기억이 약해지는 것은 누구나 노년에 겪는 신체와 정신의 현상이다. 그러나 뇌 손상에 의해 장마의 계곡 물살처럼 흙탕물을 일으키고 찾아오는 그것은 통로가 다르다. 주변 사람이 매우 놀란다. 가족이 허둥댄다. 정작 당황해야 할 당사자는 태연하다. 만약 당사자가 당혹스러워서 우울해한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오후 한가로운 시간, 4층부터 라운딩을 시작하여 3층 생활실에 이르렀다. 몇몇 어르신들이 TV를 시청하며 담소 중이었다. 어머니가 생활실 소파 한 귀퉁이에 따로 앉아서 건조된 빨래를 개켜 놓았다. 수건 몇 장을 제외하면 모두 당신의 옷가지들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당신의 옷을 개켜 놓을 뿐 챙기지를 않았다. 다른 이들 같으면 내 것을 챙기는 것은 물론, 내 것이 아니어도 내 것으로 알고 챙겨가는 것이 보통의 일상이련만. 어머니의 모습이 반갑기도 하고 예쁘기도 해서, 가만히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어머니, 누구 옷인데 이렇게 잘 털어서 반듯하게 개키셨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몰라. 여기 두면 옷 주인이 가져가겠지.”
순간 마음이 무너졌다. 다시 물었다.
“오늘 목욕하셨는데, 어머니 옷들은 어디 있을까요?”
어머니가 되물었다.
“오늘 내가 목욕했나요?”
어머니가 놀랄까, 싶어 소곤거리듯 말했다.
“제가 헷갈렸어요. 어머니가 목욕하신 게, 어제였나 봐요.”
3층 이쪽저쪽 라운딩을 마치고, 다시 중앙에 있는 생활실로 나왔다. 계단을 이용하여 2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몸동작을 크게 해서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르신들, TV 보시면서 오후 시간, 재미있게 보내세요.”
“네, 원장님. 잘 가요.”
소파와 창가 의자에 앉아 있던 네 명의 다른 어르신들이 손을 흔들며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어머니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달리듯이 원장을 향해 돌진했다. 보행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어머니인지라 뛰는 걸음이 위험천만했다. 맞은편에서 쉬고 있던 종사자 둘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장도 어머니가 넘어질까, 조마조마해서 마주 달려갔다.
“어머니, 제게 뭐, 할 말이 있으세요?”
어머니가 다급하게 말했다.
“내 아들 이름이 뭐지요?”
갑자기 한 대 맞은 것처럼 가슴이 먹먹했다.
“어머니, 아들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세요?”
“내가 아들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이 안 나요. 내 아들 이름이 뭐지요?”
일단 어머니의 두 손을 잡고 소파로 이동했다. 소파에 앉으면서 아들 이름을 또박또박 천천히 뇌었다.
“아들 이름이 안.○.○. 지요?”
어머니의 당황한 표정이 본래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안○○, 내 아들 이름이 맞아요.”
어머니를 응원했다.
“어머니가 잠깐 아들 이름을 잊으셨던 것 같아요. 저도 자꾸 잊어버리거든요. 딸들 이름은 기억하시지요? 제게 말해 주세요. 수첩에 적어 놓았다가 어머니가 기억이 안 나실 때, 가르쳐 드릴게요.”
어머니가 자신 있게 말했다. 딸들은 아들보다 비교적 자주 만나니, 어렵지 않게 기억했다.
“큰딸은 안○○, 둘째 딸은 안○○, 막내딸은 안○○.”
“어머니, 딸들 이름은 하나도 잊지 않으셨어요.”
어머니가 안심하듯 활짝 웃었다.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니,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래도 생각이 안 나는 것을 인지한 것은 희망이었다. 달려와서 질문해 준 것도 여유였다. 현재 어머니는 망각이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어 당신의 방도, 화장실도 못 찾을 때가 많으니까. 후에 어느 한 날, 어머니는 아들 이름이 생각 안 나는 것도 잊을 것이다. 더 후에는 아들의 존재조차 당신의 뜨락에서 사라질 것이다. 물론 딸들 이름과 존재도 어느 날 나뭇잎처럼 우수수 떨어져, 어머니를 떠날 것이다. 빈 뜨락만 휑 덩그러니 남을 것이다. 하여 표정이 없어지고, 말이 사라지며, 동공마저 비게 될 것이다.
“어머니, 아들 이름이 생각 안 나면 또 물어봐 주세요. 제가 오늘 아들 이름은 물론 딸들 이름까지 다 수첩에 적어 놓았어요.”
어머니가 고운 얼굴에 미소를 듬뿍 담았다.
“알았어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