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언니가 다른 점이 무엇일까?
언니와 엄마가 같은 점이 있을까?
3월의 환절기를 살아내면서 몸이 휘청거렸다. 코로나19의 코호트 세월도 아니건만 코로나19로 뜻밖에 세상을 떠난 친정어머니와 다른 두 분을 애도하는 중, 몸과 마음이 자꾸 깊은 물속에 잠기는 듯했다. 오전, 어머니의 파킨슨 전문의 진료가 예약 후 처음 있는 날이었다. 어머니를 승용차에 태우고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눈이 아프고, 목덜미가 땅겼다. 간신히 운전하여 병원에 도착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보행이 가능하지만, 흔들리는 어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 천천히 100미터 정도의 걸음을 걸어 출입문을 여닫은 후, 승강기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짧게 한마디 했다.
“언니가 같이 있으니까, 난 걱정이 없어.”
뜬금없는 말이었다. 손을 잡은 채로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어머니는 진심이었다. 추호의 의심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 순간 언니의 손을 꼭 잡은 어린 동생일 뿐이었다.
어머니는 코로나19 세상을 견디느라 아주 오랜만에 수많은 사람이 출입하는 대학병원에 나왔다. 그러다 보니 어떤 불안이 앞섰을까? 길을 잃어버려 혼자 남겨지는 두려움이었을까? 언니가 필요한 두려움인 것만은 분명했다. 어떤 감동을 가지고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되뇌었다.
“그래요? 언니가 같이 있으니까, 걱정이 없으셔요?”
그런데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되뇐 그 한마디가 원장의 기운을 돋았다. 그 말은 11년 전, 다른 어머니가 한 말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11년 어머니도 오늘의 어머니처럼 시간이 갈수록 아이가 되고, 천사가 되었다. 어휘력은 그대로 있었으나 자주 병원을 출입하는 중 몇 차례나 위급한 순간을 넘겼다. 퇴근을 미루고 몇 번이나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조금 안도하는 기간이 생겼다. 그때는 어머니의 배변에 문제가 생겼다. 어머니가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횟수가 많으니 요양할 손이 모자랐다. 한참 동안 어머니의 그것을 손으로 만져 떼어 낼 때 어머니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며칠 후 수순에 따라서 어머니의 배변 문제를 기저귀 착용으로 바꾸고, 어머니는 침상에 누웠고, 원장은 침상 모서리에 앉아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다.
“난, 집이가 언니 같우. 죽어서도 못 갚아.”
그런데 어머니의 그 말은 원장의 원기를 회복했다. 그 저녁의 단상을 지금도 기억할 정도였다.
차가운 북풍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툭
스러지는 사명
아니라 하여도
서걱서걱
발밑에 밟히네
초라한 그 이름 하나
나는 집이가 언니 같우
죽어서도 못 갚아
아!
한 말씀
86세 어르신
여윈 얼굴에
곱게 묻어난
고마움
영혼이 밝아지네
바람이 멎네
되살아나네, 사명
그분의 말씀이네.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진료실로 올라갔다. 꽤 넓은 병원 회랑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빼곡하게 찼다. 어머니가 말했다.
“언니가 같이 있으니까, 좋아.”
어머니의 말을 곱씹어서 반영했다.
“그렇지요? 언니가 같이 있으니까, 걱정이 안 되고 좋지요? 저도 그래요.”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언니, 고마워.”
원장도 힘주어 말했다.
“저도 고마워요.”
잊고 있었다. 엄마는 못 되어도 언니는 되겠다는 다짐을. 실제로 본원에서 종사자들은 엄마가 되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자녀들에게는 못 맡겨도 종사자들에게는 당신들의 치부를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망각이라는 병의 덫게 걸려도 치부를 드러내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2시간 이상의 진료와 검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 한결 몸이 가벼웠다. 이른 시각, 원에서 병원으로 출발할 때의 휘청거림도 사라졌다.
“어머니, 우리 드라이브할까요?”
어머니가 말했다.
“언니가 가면, 나는 따라가지.”
“언니가 드라이브할 테니까, 동생은 따라만 오세요.”
사람은 확실히 몸(신체)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었다. 영혼이 있었다. 영혼 깊숙한 곳에는 따뜻한 말과 인정과 애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젊은 언니가 있었다. 사랑스러운 늙은 동생이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