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뜰에바다 Jun 25. 2024

출근했는데, 퇴근을 안 시키다니

요즈음 MZ세대들에게는 결단코 화두가 되지 않는 말이다. 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퇴근과 동시에 퇴사했을 것이므로. 아버지는 99세다. 요즈음의 아버지의 화두가 이것이다. 출근했는데, 퇴근을 안 시키다니.


몇 주째 집에 가야 한다고 승강기 앞을 떠나지 않던 아버지가 늦은 오후, 종사자의 손에 이끌려 원장실에 들어섰다. 덕분에 원장과 종사자들은 종일토록 2층만은 승강기를 사용하지 않고 계단을 오르내린 후였다. 아버지를 모시고 내려온 종사자가 원장에게 눈을 껌벅이며 속삭였다.

“원장님을 만나야 한다고 우기셔서, 할 수 없이 모셔 왔어요.”

원장이 큰 소리로 인사하고 안부를 물었다.

“아버지, 어서 오셔요. 제게 하실 말씀이 있었지요? 하루 종일 찾으셨다는데, 제가 외근을 다녀오는 바람에 얼른 시간을 낼 수가 없었어요. 죄송해요.”

아버지가 본성적으로 가진 예우를 갖추어서 점잖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바쁜 것은 몰랐어요.”

일단 아버지가 격앙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는 성공했다. 승강기 탑승을 말리는 것만큼 승강기 집착을 불러일으키는 줄 알면서도 대안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파킨슨으로 슬며시 담을 넘어온 그것이 아버지를 찾아오면 아무도 말릴 재간이 없는 까닭이었다. 

이어서 원장이 한껏 너그러움을 부풀려서 공손한 자태로 말했다.

“무슨 말씀인데, 하루 종일 저를 찾으셨어요?”

아버지가 천천히 말했다. 아직 말에 힘이 들어 있었다. 

“내가 백 살이에요. 집에 가야 해요. 출근했는데 퇴근을 안 시키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어요?”

아버지의 평생이 아버지가 사용한 ‘모순’이라는 그 한 단어에 다 녹아드는 듯했다. 가슴이 아릿했다. 얼른 말을 받았다.

“그러셔야지요. 출근하셨으니, 퇴근하셔야지요.”    

 

70세가 넘도록 외국을 다니며 건축 현장의 관리자로 일했던 아버지의 평생은 출근과 퇴근의 연속이었다. 당신의 기억에는 출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퇴근하지 않은 날도 없었다. 출근했으면 승강기를 타고 되내려와서 퇴근하는 것이 아버지의 인생이었다. 더욱이 아버지는 자타가 칭송하는 건축의 업적들을 서울 곳곳에 가지고 있었다. 그것 때문일까? 그것이 아버지가 여기에 고착하게 된 이유일까? 왜냐하면 출근하는 사람 모두가 이 빛깔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장은 누구를 막론하고 출근하고 퇴근한다. 그렇다고 슬며시 담을 넘어온 그것이 꼭 거기, 그 지점에 머물지 않는다. 출근과 퇴근이 무엇이었기에 아버지는 거기 머물게 되었을까? 가족이나 다른 이에게는 멋있었던 출퇴근의 삶이 아버지에게는 나름 버거웠을까? 하여 벗어나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족쇄였을까? 아니면 그 반대였을까? 아버지는 거기에 머물렀다. 하여 다른 것은 다 잊었어도 출근과 퇴근은 잊지 않았다. 출근했는데 퇴근을 안 시키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근래에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양귀자의 장편소설, 《모순》이 생각났다. 그 소설의 끄트머리 어간의 말도 떠올랐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한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아버지의 선언대로 백 살은 아니어도 아버지는 90대 최 후반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아버지에게 고급한 어휘가 만추의 돌감처럼 몇 개 상큼하게 남아 있음이 기뻤다. 무엇보다 당신의 현재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은 감동이었다. 

할 말은 없었다. 어떻게 아버지가 퇴근하여 본원에서 나가는 것을 허락한단 말인가. 그것이 아무리 희망이요, 가족으로부터 처음 분리하여 겨우 안착하고 있는 아버지의 소원이라도 말이다. 

궁여지책으로 아버지의 감정을 더 지지하기로 했다. 

“아버지, 오늘 출근해서 많은 일을 하시다 보니 힘드셔서 어서 퇴근하고 싶으시지요? 저도 얼른 퇴근하고 싶은데, 오죽하시겠어요.”

아버지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퇴근해서 쉬어야 해요.”

“아버지, 얼른 퇴근시켜 드릴게요. 잠시만 여기 편안하게 앉으세요.”

아버지를 의자에 앉게 했다. 아버지가 원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지금 저희가 몹시 바빠요. 퇴근을 30분만 늦게 하시면 안 될까요? 날이 어둡기 전에만 퇴근하면 되시지요?”

아버지가 동의했다.

“그렇지요. 어둡기 전에만 퇴근하면 되지요.”

“그럼, 저희 일을 조금만 도와주셔요.” 

“알았어요.”


그때 조금 떨어져 있던 종사자가 얼른 아버지가 집중할 수 있는 색칠자료를 가져다가 원탁에 놓았다. 아버지가 색칠자료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버지의 생각이 전환되었다. 습관대로 색칠할 색깔들을 미리 선택하여 10개 정도의 색연필을 원탁 바닥에 꺼내놓았다. 곧 색칠하기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집중했다. 덕분에 출근했으니, 퇴근해야 함을 잊었다.

이전 02화 어른 아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