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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뜰에바다 Jun 25. 2024

어른 아이

치매 중등도에 이르면 어휘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지남력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살고 있으나 옛 시절, 거기에 머물 때가 많다. 그것은 학벌을 초월한다. 고도의 경험도 소용없다. 천천히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진행하기도 하지만, 현저하게 보이는 경우도 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주옥같은 어록들을 가졌던 y 어머니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로 35년을 봉직했다. 하여 종사자 전부가 초등학교 어린이로 보여서 어머니의 말들은 언제나 ‘얘’로되, 다른 이들이 쓰지 않아 가히 어록이라 할 만한 것들이었다. 

‘너는 어쩌면 머리가 비단결 같니?’ 

‘얘, 그건 몰상식한 말이야. 나쁜 사람들만 쓰는 말이잖니.’ 

‘저 아이는 오늘 하루 종일 뾰로통하구나. 내가 쟤를 사랑하는데, 쟤는 나를 먼 나라 여우 할멈처럼 보는구나.’

... 그런데 근래에는 새들의 노래처럼 온 자리를 상큼하게 하던 어머니의 말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표정도 무덤덤했다.   


늦은 시간, 원장이 퇴근하기 위해 겉옷을 걸치고 가방을 든 채, 101호실 문 앞에 섰다. 

“어머니들,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한 어머니가 침상에 걸터앉았다가 손을 흔들었다.

“잘 갔다 와요.”

그 옆의 어머니도 배시시 웃으며 푸근한 말을 건넸다.

“밤이 어두웠네. 어서 가.”

다른 어머니는 원장의 퇴근을 알아차리고, 얼른 현관문으로 이동했다.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원장실 가까이에서 생활하므로 출근할 때 가장 먼저 만나고, 퇴근할 때 가장 늦게까지 만나는 사이였다. 그날도 밤 8시가 되어 평범하게 인사한 것에 불과했다. 

101호에 이어서 102호 앞에서도 똑같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어머니들, 윤 원장,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다른 두 어머니가 각각 침상에 누워서 손을 흔들었다. 예의 y 어머니는 화장실에서 등을 돌린 채 손을 씻고 있었다. 잘 못 들으니, 원장도 못 보았으려니, 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로비를 거쳐 출입구에서 신발을 꺼내 신는 순간, 쏜살같이 달려온 어머니가 턱에 숨을 달고 말했다.

“너, 어디 가니?!”

잘 다녀오라고 말하기 위해 곁에 섰던 다른 어머니와 종사자가 놀라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워낙 소스라치게 놀라 파리한 얼굴로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어머니는 보행이 어려웠다. 요양원에 입소한 후 결코 뛰는 걸음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반드시 복도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야 이동이 가능했다. 

원장이 이실직고하듯이 말했다.

“어머니, 제가 집에 다녀오려고요.”

어머니가 되물었다.

“집?”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마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거울을 통하여 원장의 실루엣을 보았으리라. 순간 손을 다 씻지 못하고 뒤따라왔으리라. 빠른 보행이 어려우니, 안전 손잡이를 잡고 사력을 다하여 겅중겅중 뛰어서 말이다. 아니다. 당신을 두고 떠나는 원장이 수상해서 말이다. 이제 어머니에게는 원장이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는 퇴근한다는 것이 머리에서 사라졌으니까. 원장은 어릴 적 엄마같은 존재니까. 그런데 가방을 들고 나가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말이다.     

어머니의 놀람과 급한 보행에 원장의 가슴이 뻐근했다. 어머니에게 또박또박 천천히 귀엣말했다. 

“어머니, 제가 집에 갔다가 내일 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집에 가지만 여기 이 선생이 밤에 어머니와 같이 잘 거예요.”

그럼에도 어머니가 잘 못 들었다. 귀가 어둡기도 하거니와 놀란 가슴 탓일 터였다. 어머니의 귀에 바짝 대고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제가 집에 가서 한밤 자고 다시 올게요. 어머니는 여기에서 안녕히 주무세요.”

그제야 어머니가 원장의 말을 알아들었다.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어머니가 질문했다.

“얘, 네가 집에 갔다가 다시 온다는 말이니?”

“그럼요. 제가 집에 가서 한밤 자고, 아침에 다시 올 거예요.”

어머니가 뜨악하게 물었다.

“여기서 자면 안 되는 거니?” 

대답이 궁색했다. 

어머니가 겨우 표정을 풀고 다시 말했다. 

“얘, 나는 네가 가서 안 오는 줄 알았어. 내일 아침 오는 거, 맞지?” 

“그럼요. 내일 아침 일찍 올게요.”

“그럼, 얼른 갔다 와.”

원을 나섰다. 어머니가 손을 흔들었다. 다른 어머니도 옆에서 손을 흔들었다. 퇴근길에 출입구와 로비 큰 창 너머로 아직도 손을 올려 목을 길게 빼고 서 있는 어머니로 인해, 젖먹이를 떼어놓는 아이 엄마처럼, 원장의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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