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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뜰에바다 Dec 07. 2024

삶의 민낯

소망인가 절망인가?

나는 주 1~2회 요양 병동을 방문하여 어른들을 만난다. 한 주간 후에 보면, 지난주에 보았던 한두 분의 침상이 없어졌다. 집으로 퇴원했거나 다른 병원으로 옮긴 예가 있지만, 대부분은 먼 나라로 이사 갔다. 의료인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매주 죽음을 보는 셈이다. 그때마다 올라오는 감정이 있다. 두 가지다. 하나는 안심과 감사다. 다른 하나는 아픔이다. 그 이상의 느낌은 일부러 차단한다.

중증 요양 병동의 삶은 치열하다. 죽음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다. 죽음이 끝이라면, 아쉽기만 할 것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삶의 연속과정이다. 그래서 직접이든 간접이든 나는 두 가지 죽음을 어렵지 않게 구분한다. 면죄부(구원)를 가졌으면 저절로 감사가 터진다. 완전히 기회를 잃었으면 잠깐 마음이 침몰한다.

누구나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알고 있다. 다만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간과한다.  걸음만 더 가면 보이는데,  보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죽음을 다룬 고전, 레이먼드 무디(1944~ 미국) 《삶 이후의 삶올해 제목을 바꾸어 전자책으로 나왔다. 《죽음, 이토록 눈부시고 황홀한》(배효진 옮김. ㈜서스테인, 2024)이다. 제목이 눈길을 끈다.

레이먼드 무디는 의사요, 심리학자요, 교수로서 강연을 많이 했다. 거의 수업마다 30여 명 중 적어도 한 명은 따로 찾아와 자신이 겪은 죽음에 대한 체험을 말해준다. 그가 죽음 체험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의사들마저 죽었다가 소생한 환자 중에서 이례적인 경험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그에게 보내준다. 이후 무디의 연구 내용이 신문에 소개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 보내주는 사람들도 생긴다.

"이제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바란다거나 지금 죽고 싶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아직 저는 할 일이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지금 저쪽 세상으로 가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제가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이곳을 떠나면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알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곳에 가봤으니까요."

      

K어른은 요양 병동에서 입에 욕설을 달고 살았다. 꽝 마른 체구에 눈이 부리부리한 어른의 목청은 컸다. 한마디를 총성처럼 병실 구석구석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저런, 저런. 또 죽으라고 왔구먼! 싫다는 데 왜 자꾸 와, 미친년아!"

한 번은 강하게 대꾸해 보았다.

"제가 왜 죽으라고 오겠어요? 잘 사시라고 오지요."

어른의 말은 한결같았다.

"미친년, 또 왔어! 보기 싫어! 어서 가!"

"알겠어요. 빨리 죽으라고 온 사람은 아니지만, 얼른 갈게요."

지난 10월, 어른의 병환이 깊어졌다. 중환자실에서 만났다. 욕설할 힘을 잃었다. 인사하고 안부를 물으니, 작게 대답했다. 

"몸이 아주 아파요."

음 들어보는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반가워서 크게 반응했다.

"어떡하면 좋아요. 원장님도 아시나?"

"알아요."

그 후 거의 한 달간 어른의 일상이 수면으로 채워졌다.

11월이 되자, 산소 줄을 꼈다. 호흡이 가빴다. 아주 가까이에서 귀엣말로 인사했다. 그때 어른이 가만히 말했다

"이제 주 앞에 가려고요."

깜짝 놀랐다. 귀를 의심했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욕쟁이 어른이 주 앞에 가겠다,  말하다니. 너무 뜻밖이어서 나도 모르게 어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른이 눈동자에 힘을 얹어,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주 앞에 가려고요."

기쁨과 흥분이 려왔다.

"네, 그럼요! 주님 앞에 가셔야지요! 주님 앞에 어떻게 가는 건지, 아시지요? 예수님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믿으면서, 마음으로 예수님의 손을 꼭 잡고 계시면 되어요.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시고, 천사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셔요.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암송하셔도 좋아요. 온몸이 아프시면 하늘나라를 생각하면서 견뎌주세요. 지금 주 앞에 가신다고 말한 것을, 주님이 다 들으셨어요. 천사를 보내주실 거예요."

어른이 한마디라도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듯, 가만히 응시하며 경청했다. 얼마 동안 손을 만져 주며, 호흡만 남은 듯한 앙상한 가슴을 쓸어주었다.

그다음 주는 호흡이 거칠었다. 살짝 손등을 터치했다. 어른이 을 반쯤 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아주 선량한 눈이었다.

"주님 앞에 가실 것이므로 천사가 와서 가시는 길을 도와줄 거예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무서워하지 마세요. 나의 죄를 용서하고, 나에게 영원히 사는 생명을 준 예수님의 손을 꼭 붙잡고 계셔요."

그다음 주에는 어른이 눈을 뜨지 못했다. 그다음 날부터 3일간은 아예 혼수상태였다. 몸을 구부려서 귀엣말로 인사했다.

"먼저 주님께 가세요. 저는 나중에 게요. 하늘나라에서 만나요."

그날, 어른이 주에게로 갔다.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초라한 죽음이지만 마음이 따뜻했다.


 오래전에, 장년 이후에 면죄부를 받는 것이 최대 15%라는 통계가 있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삶의 후반에는 이미 생각과 마음이 굳어져서 새것을 받고 새기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K어른이 그토록 분노하고 욕설을 일삼았을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면죄부를 받은 것은 언젠가 그것을 받아 놓았을 것이다. 에게 간다, 는 것을 아는 것이 면죄부니까. 그럼에도 어른은 왜 마지막 두어 달을 제외하고는 그토록 욕설을 일삼았을까? 무엇이 어른의 분노를 촉발했을까? 아마도 상처였을 것이다. 왜곡된 해석이었을 것이다.

상관없다. 삶의 마지막 정거장에서 잘 믿고 못 믿고는 문제가 아니다. 어른처럼 설사 반대편에 서 있었더라도 괜찮다. 다만 예수가 값을 치른 면죄부를 가졌는가, 못 가졌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소확행을 추구하는 여러분에게도 권한다. 속는 셈 치고 마음을 내라.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삶의 민낯을 가릴 유일한 증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므로 인류에게 선물한 면죄부를 받아놓아라. 그것만이 죽음과  이후의 삶을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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