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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뜰에바다 Nov 23. 2024

고통과 감사는 서로 맞닿았다

  

침묵기도 중, 불현듯 찾아왔다. 인생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 기억과 사랑이. 장로님이 오랫동안 기도 안에 머물렀다. 장로님 내밀었던 통장과 도장도 눈앞에서 빙글 춤사위처럼 돌았다. 감사가 넘쳤다. 먹먹함이 눈물이 되었다. 잊고 있었다. 통장과 도장은 더더욱 잊고 살았다.

다음 날 오전, 전화했다. 신호는 가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다음 날 오후, 다시 전화했다. 연결되었다. 큰 소리로 불렀다.

"장로님!"

"잘 있었어요?"

너무나 반가운 목소리였다. 85세라고 했다. 여전히 하루 10km 달리기와 봉사활동을 왕성하게 한다고 했다.

"한번 가서 뵈어야 하는데, 맨날 말만 하고 못 가서 죄송해."

"한번 와요. 우리는 언제든지 시간이 있으니."
 
그날은 10월 2일이었다. 새벽 6시경 승용차로 고속버스터미널을 향했다. 터미널에 차를 세우고, 서울에서의 세미나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날이 밝아오는 중이었다. 안개가 끼었다. 터미널이 가까워지는 지점에서 앗, 차에 무엇인가가 툭, 받쳤다. 신호를 기다리다가 6차선 도로에서 다 같이 출발한 직후였다. 직감이 있어, 짧게 부르짖었다.
 "주님! 이게 뭐예엿!!"

쿵쾅거리는 가슴을 붙들고 150m 정도 더 나가서 승용차를 도롯가에 세우고, 내려서 뛰었다. 여자 어르신이 쓰러져 있었다. 식이 없었다. 외상도 없었다. 검정 우산이 5m 지점에 떨어졌다. 택시 하나가 가까이 와서 섰다

"어떡해요! 왜 어르신이 중앙 분리대에서 나오나요! 전화 좀 해주세요!"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에 119가 왔다. 500m 지점에 있던 병원 응급차도 왔다. 병원차가 어르신을 싣고 내달리면서 말했다.
"뒤따라오세요."
온몸이 떨려 운전하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여러 번의 심호흡을 하며 병원에 도착했다. 인적 사항을 알리고 대기하는 동안, 침통한 시간이 흘렀다. 3시간 후, 날벼락이 떨어졌다.
"돌아가셨습니다."

"헉!"

서 있던 다리가 꺾였다. 외상 하나 없었는데 별세라니. 나중에 그림이 그려졌다. 80세 어르신이 비 오는 새벽, 검정 우산을 쓰고 6차선 도로의 정원이 있는 중앙 분리대에 섰다. 건널목이 아니었다. 1차선에서 승합차가 지나가니, 바로 도로에 들어섰다. 그런데 2차선의 내 차는 작고 1차선의 승합차는 커서, 어르신의 눈에 내 차가 보이지 않았다. 나도 승합차에 가려 어르신을 보지 못했다. 어르신이 내 차에 허벅지를 받혔다. 상은 없었으나 안으로 출혈이 있었다. 병원에서는 빨리 발견하지 못했다.

하얗게 질려 있다가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썼다. 내가 지방 소도시에서 생활한 지 8개월이 채 안 되었을 때였다. 결혼 전이었다. 형제들과 지인들이 달려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때 소식을 들은 장로님이 달려왔다. 장로님 손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오후 3시, 경찰이 말했다.

"집에 가서 기다리세요."

내 차는 두고, 장로님의 차를 타고 귀가했다. 그때 장로님이 넌지시 통장과 도장을 내밀었다.

"필요할 것 같아요."

얼결에 받아 가방에 넣었다. 감사의 마음을 담을 경황은 없었다. 오후 5시, 장로님이 다시 여러 지인 같이 다.

"고인이 장례식장으로 가셨다니, 우리가 지금 문상 가는 게 좋겠어요."

울어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퉁퉁 부었으나, 따라나섰다. 문상 중, 나는 차에 있었다. 고인에게 죄송하여 얼굴을 들 수 없음이었다. 장로님은 내가 해를 당할까, 그것을 걱정했다. 이후 합의 절차와 일절 처리를 장로님이 담당했다. 싫은 소리, 나쁜 소리는 다 장로님이 들었다. 나는 뭇매 맞지 않았다. 다만 석 달 이상 '죄인'이라는 의식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었다.

6개월 후에, 재판을 받았다. 금고 8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20시간이었다. 재판장에서 어떤 사람이 사망사고[(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에는 유례없는 가벼움, 이라고 탄복했다. 보호관찰소에서 보름 동안 서류 정리하며 사회봉사 명령을 행했다. 그 후 만 7년 소도시에 사는 동안 운전하지 않으며, 사죄하며, 사랑하며 살려고 나름 애를 썼다.


4일 후 새벽 6시, 승용차로 출발했다. 쇠뿔을 단번에 빼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았다. 소도시를 떠난 지 17년 8개월 만이었다. 장로님이 여전히 왕성하게 봉사 활동 중이므로 오후에 참여해야 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좀 서둘렀다. 예정 시간 11시에 도착했다. 15분 전, 전화했다.

"성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성당이 어디였는지 생각이 나지는 않았다. 다만 부모처럼 밖에서 기다리다니, 다시 가슴에 따뜻한 물결이 렁였

"장로님!"

성당 맞은편, 집 근처 공용 주차장 입구에 장로님이 서 있었다. 17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단아하고 강건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댁에 들어가, 작은 선물 하나를 드렸다. 더 큰 것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제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만난 지 8개월도 채 안 되었을 때, 저를 무조건 지지해 주시고 수렁에서 끌어올려 주셨어요. 그것을 저는 잊고 살았지만, 주님이 기억하셨어요. 지난 금요일 기도 안에서 그 모습이 오래 머물러서, 이번에는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장로님, 그때 통장과 도장까지 내 주신 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용하지도 않았었는데, 뭘...."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장로님이니까 하신 일이었어요."

울먹이는 나의 말에 장로님도 오래 전의 기억에 머무른 듯했다. 예약해 놓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카페에서 이런저런 얘기로 17년간의 회포를 풀었다. 이렇게 하면  것을, 17년 만이라니. 


사람은 서운한 일은 잘 기억한다. 그럼에도 가슴에 담긴 감사한 일조차 미루고 또 미루며 잊어간다. 기억하고 찾아서 감사하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다. 주님이 밝히 알려주전에는. 소확행 하는 그대들은 제발 나와 같지 않기를.... 그런데 4시간 후 돌아설 때, 또 빚을 지고 말았다. 어느새 장로님이 김장 김치와 참기름과 여비를 승용차에 던져 으셨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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