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1930~1993) 시인의 시, <귀천>을 보면, 이 세상의 삶은 소풍 나온 것이다. 소풍을 마치면 사람은 모두 하늘나라로 돌아간다. 사람의 한평생이 100년이고, 하늘나라의 삶은 끝없는 것이니, 정답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하지만 지금 21세기는 노을빛 기슭에서 놀다가 소풍 끝내고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구름 손짓하면은 아름다운 이 세상의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편안함을 상실했다. 좋은 음식과 잘 듣는 약들, 의료 기술이 사람의 수명을 연장했으나 죽음의 존엄은 파괴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이 그렇다)
서울 강동구 동네병원에 3일째 입원해 있던 어머니에게 불현듯 호흡곤란이 왔다. 119 구급차를 타고 강동구 일대를 2시간 이상 헤매었다. 받아주는 응급실이 없었다. 현 정부와 의료인들의 대치 국면에서 의료대란을 겪는 병원들이 응급실 기능을 상실한 결과였다. 3시간이 지나 겨우 남양주의 중형 병원 응급실에 들어갔다. 그때는 자가호흡이 어려웠다. 생각할 새도 없이 인공호흡기 처치에 동의하고 삽입했다. 이후 의식이 있으나 말할 수 없었다. 목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강제 수면으로 지냈다.
골든타임 2주간이 지났다. 소생의 가능성이 없어졌다. 주 1회 단 1명 보호자 면회 시간에 눈길조차 오갈 수 없었다. 20일이 지났다. 이제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길 잃은 목숨이었다. 다른 병원에 전원 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이 세상 소풍을 마쳤지만, 하늘나라로 돌아갈 길이 요원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평소에 강건했다. 고혈압약이나 고지혈약도 먹지 않은, 작지만 깨끗한 몸이었다. 여러 가지가 맞물려서 폐렴을 잡을 수 있는 적기를 놓친 것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제 소풍을 마치려 함에도 마칠 수 없는 고통의 상황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 존엄의 문제였다.
비단 우리 어머니만의 문제인가? 이것은 지금, 수많은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많은 이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대부분이 인생의 소풍을 마치는 날, 숨을 크게 몰아쉴지언정 자녀들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살던 집에서, 존엄하게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복을 완전히 빼앗겼다.
그럼에도 아직도 말하는 이들이 있다.
“죽기 바로 전에 신을 믿겠다. 지금은 할 일이 많아서 시간을 낼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할까? '죽기 1년 전이나 바로 몇 달 전까지 세상의 즐거운 일, 하고 싶은 일 다 해보고 나서 신을 믿고 구원받아 하늘나라 가겠다’라는 바람이 가당한 희망인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2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첫째는, 죽음이 쉽다는 오해이다.
둘째는, 신과 함께 사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오해이다.
어쩌면 소확행을 꿈꾸는 여러분의 생각일 수도 있다.
먼저, '죽음이 쉽다는 오해'를 생각해 보자. 앞서 말한 대로 현대는 죽음의 강을 건너는 일이 쉽지 않다. 20세기까지는 쉬웠다. 의술도 약했고, 약도 다양하지 않았다. 수는 길지 않았어도 오래 고생하지 않고, 소풍처럼 일생을 마칠 수 있었다. 현대는 다르다. 죽기 힘들다. 죽음이 어렵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아프고 죽겠다'는, '9988234'는 언감생심이다. 자녀들의 손을 잡는 대신 각종 기계를 삽입하고 자아를 상실한 채, 소풍을 마쳐야 한다.
둘째, '신과 함께 사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오해를 풀어보자. 신과 함께 산다는 것은 진실로 소풍 나온 삶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단연코 신과 함께 사는 이유가 죽을 때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 이 세상을 소풍처럼 살기 위해서다. 죽음은 소풍을 끝내는 것이다. 하여 이 세상 100년의 세월을 소풍 하며 살 수 있는 비결은 신과 함께 사는 것이다.
소확행을 꿈꾸는 이들이여! 아직도 신을 멀리하는가?
하루라도 빨리 신과 함께 사는 것이 이 세상을 즐거운 소풍으로 사는 비결임을 놓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