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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뜰에바다 Aug 31. 2024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영화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장군(지바고 이복형)이 타냐(지바고 딸)에게 질문한다.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니?"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으므로 타냐가 얼버무린다.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 장군이 다시 묻는다. "정말 헤어진 이유가 무엇이지?" 그제야 타냐가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한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았어요." 그때 장군이 타냐에게 넌지시 말한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거야."

아버지의 손을 놓친 그녀의 삶은 피폐했다. 사회국가 혁명기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울타리와 지붕이 없이 의지할 곳 없는 삶을 견디고 개척해야 했다.     

아버지의 부재는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손이 없다는 이다. 싸워야  때 부를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힘들  찾아가서 쉴 품이 없다는 이다. 평생, 괄목할 만한 이력을 쌓으며 잘 살았다고 하더라도, 변수 많은 세상은 어느 순간 내 손으로 어쩌지 못할 때를 들이민다. 그때 부를 이름이 있는가? 그때 부를 이름이 무엇가? 그때 부를 이름을 가졌는가?

  

30대 초반에 무릎 수술로 서울의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다음 날, 90세 어르신이 넘어져 다리가 부러져서 같은 병실에 입원했다. 어르신은 부기가 심하여 수술하지 못하고 한밤을 그냥 지냈다. 그때 어르신이 밤새도록 부른 이름이 있었다. "엄마! 엄마! 엄마!" 새날이 밝아 일상이 시작되고, 어르신도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마쳤다. 어르신에게 물었다. "엄마가 아직 살아계신가요? 어젯밤에 밤새도록 엄마를 부르셨어요." 어르신이 말했다. "엄마가 살아 있긴. 내가 시집가기 전에 벌써 돌아가셨는걸."

마음이 서늘했다. 그토록 고통스러울 때 자신도 모르게 부른 이름이 돌아가신 엄마라니. 이미 송장이 된 엄마가 무슨 도움을  있는가. 어르신에게는 어릴 적 전부였던 엄마 이름 외에는 부를 이름이 없었던가?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지라도 부모이름은 어릴 때 부르는 이름이다. 친구나 인 이름의 유효기간은 더 짧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실존의 벼랑이 있고, 그 고통을 돕기 위해 곁에서 주시하고 있는, 정신의 아버지가 있다. 사람이 한평생 부를 이름이다. 차제에 무릎 수술 후 전신마취에서 깨어날 때, 나의 의식 안에 있었던 말이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람은 건강한 의식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무의식 안에서의 바람이나 소망까지 다스릴 수는 없다. 어쩌면 조만간 여러분의 인생에도 예기치 않게 실망과 공허와 혼돈이 몰려올 수 있다. 한잔 술과 게임과 쾌락에 탐닉해도 해석할 수 없는, 깊은 상처와도 만날 것이다. 그때 부를 이름이 있는가? 그때 부를 이름이 무엇인가? 그때 부를 이름을 가졌는가?


기독 신은 사람을 자녀라고 부른다. 사람의 정신을 낳았으니, 당연지사다. 문제는 그것이 안 믿어지는 것이다. 사실임에도 안 믿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관심이 아닐까? 바람을 믿는가? 공기를 믿는가? 죽음을 믿는가? 출생을 믿는가?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으로 바람을 본다. 사람이 숨 쉬고 사는 것으로 공기(산소)를 본다. 죽음을 만져보지 않았지만, 주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죽음을 본다. 출생을 보지 못했지만, 모의 지극한 사랑을 경험하며 나의 출생을 본다. 마찬가지다. 신(아버지)을 보지 못했어도 우주에 있는 숱한 흔적으로 신을 본다. 안 보인다면 내 마음이 문제다.


김소월의 시 <초혼>에는 을 잃은 비통함이 구구절절이 배어 있다. 그중에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는 두 가지 의미로 긴 여운을 준다. 한 사람, 소월에게는 산산이 부서진 죽은 의 이름이다. 다른 사람, 내게는 영원히 살아있어, 언제나 즉시 대답하는 충만, 그 자체의 이름이다.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고아는 더더욱 아니다. 아버지는 기다린다. 아들이 돌아와 손잡기를. 아버지 품에서 쉬기를. 아들은 아버지를 멀리하고, 인정하지 않으며, 공격을 가할지라도 친아버지는 결단코 아들의 손을 놓지 않는다. 단 한 번도 아들의 손을 놓은 일이 없다. 언제까지 우주의 고아로 살 것인가? 아들이 아버지를 부정한다고 해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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