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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뜰에바다 Aug 17. 2024

니체의 초인들, 신의 자리에 앉다

얼마 전,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글로 써보라'라는 과제를 받은 적이 있다. 무엇이 나를 가장 즐겁게 했을까, 그동안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사안인지라 곰곰 돌이켜 보았다. 소소한 기쁨들이 있었다. 감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정작 나를 행복하게 한 것은 결혼도, 친구도 아니었다. 여행도 아니었다. 직장도, 동료들과의 뒤풀이도 아니었다. 침묵 여정 중에 신의 말들을 새롭게 듣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휴가를 계획하고, 여행으로 시간을 알토란같이 보내는 한 여름이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여름과 겨울 중 한두 차례씩 4박 5일, 침묵의 여정을 만들었다. 그 시간은 꿈결이다. 충분한 힐링의 순간이다. 넉넉한 안식 자체다. 그렇다고 내가 믿음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새벽을 잃어버린 지도 오래되었다. 다만 평범한 일상을 엮어 살아가다가 한 번씩 만들어내는 침묵 여정이, 나에게 최고의 가치인 것만은 확실하다.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라는 말이 있다. '개독교'라는 말도 있다.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린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기독교가 낮은 곳에 서 있지 못하고, 물질주의, 축복 제일주의에 휩쓸린 까닭이다. 말씀과 삶이 따로따로 인 것이 화근이다. 대형 교회의 세습까지 겹쳐서 손 쓸 수 없을 만큼 정도가 지나쳤다. 신앙인들이 세력을 만들고, 신앙을 정치의 시녀로 추락시켰다. 목회자 성 윤리마저 땅에 떨어졌다. 더 큰 문제는, 개독교라는 말이 10여 년 회자해도 아직 한국교회에서 다른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거기에 한몫하고 있다.

결과, 찐 여부를 떠나 현대는 '무신론'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연약해서 신을 만들었다."

"애당초 신은 없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독일 철학자, 1844~1900)가 그의 책,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 집필. 김수영역. 작가와(전자책), 2024.)에서 "신은 죽었소. 이제 우리는 초인이 살기를 원하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근대 이후 지금까지 역사와 철학, 인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니체의 망치가 서구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으므로, 더욱 주목받고 추앙받았다. 다만 차제에 생각해 보는 것은,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 아니었다면, 니체가 그렇게까지 회자하였을까?

참고로, 니체는 "신은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의 약함이 신 때문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니체는 건강이 약했다. 건강 문제로 35세에 바젤대학교 교수직에서 퇴직하고, 요양 생활 중, 40세에《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완결했다. 그 후 꼭 5년 , 정신병 발병으로 자신(자아)을 잃고 10여 년간 투병하다가 죽었다. 그를 비하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을 짚어보자는 것이다.


결국, 니체는 명석한 필력으로 신을 죽였다. 그가 신을 죽인 이유는, 신이 사람들에게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사랑, 동정심, 미덕, 겸손, 희생 등을 가르쳐, 사람을 빈약하게 만들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람이 신의 노예가 되었으니, 그 동굴에서 나올 것을 강력하게 권고한다. 교회와 사제가 원인 제공자다. 하여 니체는 과감하게 신을 죽이고, 대신  자리에 새로운 존재, 초인(超人, 위버멘쉬 ; Übermensch)을 앉혔다.

니체의 초인은 힘, 의지, 창조성으로 함축할 수 있는, 미래의 이상적인 사람이다. 초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무한히 자신의 삶을 창조하며 개척해 나간다. 초인은 또 다른 신인 셈이다. 그것은 니체 자신의 표상이기도 하다.


니체 이후, 근현대에서는 허무주의, 근본주의, 자유주의, 실용주의, 과학주의, 유물론자, 무신론자들만 대량 양산했다. 신이 죽었으니, 사람 스스로가 초인이 되기 위해 피가 마르도록 고군분투한다. 그것이 상생보다 경쟁하는 사회 구조를 만들어, 투쟁적으로 나가게 한다. 때로 국가 간의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최근에는 무신론자들은 물론 자기 과신자들,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나르시시스트를 아낌없이 생산하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여러분조차도 신을 죽이고, 의지할 데 없는 우주의 고아로 살게 하지 않는가?    


이쯤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신을 죽이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과연 잘 살까? 얼마나 행복한가? 혹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덕목들을 빼앗기고,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잃은 채 우왕좌왕하지는 않는가? 근현대사에 니체의 초인이 몇 사람이나 나왔나? 오히려 몇몇 독재자들과 히틀러가 그 그림자가 아닌가? 니체의 초인은 허울뿐인, 이상이지 않은가?  


1952년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오슬로를 방문했던 알버트 슈바이처가 세계를 향해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과감히 현상에 직면하십시오. 인간은 초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인적인 힘을 가진 이 초인은 초인적인 이성의 수준에까지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힘이 커짐에 따라 그는 점점 가련한 인간이 되어 갑니다. 초인이 되면 될수록 비인간적이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양심을 불러 일깨워야만 합니다."

《소유냐 삶이냐 사랑한다는 것》(에리히 프롬. 고영복·이철범 옮김. 동서문화사, 2023)


사람은 사람을 낳아준 신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때 무한한 힘과 의지를 발현하는 재 창조자로서, 인류와 세상에 헌신하는 초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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